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한 평론가가 아무 생각없이 툭, 던진 한 마디 이후 화가는 절망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자신감은 사라지고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뭘 하든 평론가의 비평만 생각나고 초조하고 산만해지고 정신분열의 지경에까지 이른다. 급기야, 화가는 자신의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길로 발을 내딛는다.

평론가는 악의는 없었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의미 없이, 쉽게 내뱉은 말이었다. 누군가가 그로 인해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채.

타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있다. 함부로 내뱉는 문장, 일부러 지껄이는 고의의 목소리들.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낯익은 광경들. 이야기하는 순간 사라지는 그것 뿐인 무의미한 난도질들. 피하고자, 피하고자 아무리 달려도 끝끝내 사라지지 않는 무례한 언행들.

다만 꿋꿋해져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독설과 무지한 수근거림에 침울해 하지도 위축되지도 말 것. 괜히 자기 자신을 책망하고 서럽게 울지도 말 것. 내가 정말 이상한가, 잘못됐나,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을 것. 그래야 이 무식한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험난한 세상을 씩씩하게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자책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안아주기. 아무 말이나 툭툭 던지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었던 오늘의 나를 잘 참았다 보듬어 주기.

그래도 성이 안 차면 경박한 그들의 인격을 마음껏 조롱하고 경멸하고 쏘아봐줄 일이다. 조소 가득 어린 눈빛으로 한껏 냉소적인 미소를 날려주면 조금이나마 울컥 했던 화가 가라앉기도 한다. 더한 독설로 그들의 기를 바싹 꺾어 놓기. 내가 잘하는 일들이다.

문제는... 이렇게 솔직하고 날카로운 말들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가식적인 얼굴로, 그들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깔깔대며 일상을 지내는 것이다. 그런 무리들과는 말을 섞지 않는 것보다 함께 어울려야 하는 것이 더욱 피곤하고 진이 빠진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런 빌어먹을, 얼굴이 마음을 폭로하며 배신을 하다니!'라며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마음을 폭로하지 않는 얼굴이 오히려 불쌍하게 느껴진다.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나의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 같이 입게 하소서

그래서, 다윗이 한 기도를 나도 따라한다. 차마 내가 대놓고 해주지 못하는 말들을, 다윗의 기도인 양 한 구절 한 구절 가슴 속에 새긴다. 내 신앙의 수준이 이것 밖에 안 되나 부끄럽기도 하고 죄스럽기도 하지만, 때론 나도 누군가를 향해 이렇게 말해주고 싶을 때가 있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머릿속으로 막연하게 떠올리는 것과는 달리 훨씬 더 잘못된 짓인 것 같아 무섭기도 하지만.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치미는 부아를 나도 때론 어쩌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 나는 부끄럽고 얄팍하고 인내심 없고 참을성 부족한, 그저 그런 나약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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