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평점 :
느낌이 비슷한 책을 고르라면 <그리스인 조르바>. 인간 본연의 순수에 마음껏 충실했던 두 주인공. 사회적 체면과 가식과 억압, 정형화된 틀이니 타인의 시선이니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모든 인위적인 장치들을 훌훌 털어버린, 오로지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히 표현했던 두 사람. 규범을 중시하는 나로서는 내 생애 어느 한 때, 이 두 사람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 날이 한 번이라도 있을까, 감히 엄두도 못 내겠는 홀가분함. 나 또한 그들과 같은 궤도 이탈을 원하지만 답답한 새장이 주는 아이러니한 안정을 훌쩍 저버리지 못하니 웃지는 못하나, 가만 생각하면 꽤나 우스운 코미디다.
알을 벗어나고자 하나 차마 알을 깨지 못하는 어려운 자기 고민에 빠진 것과는 별개로, 한편으로는 노인에게 깊은 공감을 하지 못해 다소 어리둥절해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바람처럼 가벼웠던 노인의 모습을 그렇게나 갈망했으면서도 노인에게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또다른 모순에 부딪친 이유가 뭘까. 와, 바로 이거야, 라며 통쾌하게 휘파람을 불지 못하고 그냥 그런가 보다, 덤덤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
책을 앉아서 읽지 않고 누워서 훌렁훌렁 읽어서? 그럴 수도 있다. 집중력도 떨어지고 몰입의 정도도 정독을 할 때보다 약해지니. 아니면 추석 연휴에 이미 다른 책으로 감정을 소진할 대로 소진해서? 읽을 때마다 주르륵, 무너지는 책을 신나게 읽은 터라 더 이상의 기력이 남아있지 않기도 했다. 아니면... 아흔이라는 나이가 창녀라는 삶이 낯설어서. 그들의 사랑은 커녕 그들의 존재 자체가 서먹해서.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나와 관련되지 않으면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무언가 조금이라도 나와 연계된 끈이 있어야, 그제서야 조금 관심을 갖고 눈길을 돌린다. 나의 이해관계와 관련없는 일들에는 이보다 더 이상 무관심할 수 없을 정도다. 내가 기자를 그만뒀던 이유 중에 하나도 나의 무관심이었다.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는 관심도, 흥미도, 재미도 없는데 내 일보다 더 적나라하게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참으로 대단한 폐쇄성이고 거리감이다. 이런 형편이니 32살의 내가 아흔살 노인의 감정을 헤아리기란... 아흔살. 상상도, 어림짐작도 안 되는, 결코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한 미래다. 그래서, 노인의 환희와 절망과 절박함과 초조함과 희열과 조바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폐쇄성과 거리감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짙어지는 듯 하다. 사회생활을 할수록 점점 더 쾌활해지고 개방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나만의 방을 향해 기어들어간다. 타인에게 관심을 두고 그들과 어울리려고 기를 쓰고 애쓰고 노력하다가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듯, 피곤하고 아프다. 나이를 먹는 것은 좀 더 뻔뻔해 질 수 있는 것인지, 예전에는 그래도 억지로 맞지 않는 신발을 신어보려고 낑낑대더니, 이제는 누가 뭐라하든 맨발로 돌아다닌다. 그게 훨씬 편하고 아프지 않아서. 그래도 신발을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가끔은 발바닥이 아프기도 하고 맨발로 돌아다니는 나를 미친년 바라보듯 하는 타인의 시선이 유난히 신경 쓰이기도 하다. 지금은, 발바닥도 아프고 다른 사람들의 작은 수근거림에도 매우 예민해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애매모호한 시기.
아흔살이 되면, 지금의 들끓는 소란스러움과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갈팡질팡하는 혼란이 조금은 정리가 되겠지. 아흔살이 되면, 경험이 많아지고, 그러면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는 일이 조금 더 많아지겠지.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상대방의 냉소에도 조금은 단단해지겠지. 그러면 나도 지금보다는 좀 더 편안해 지겠지. 아흔살이 되면 나도 보통 사람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겠지.
그러나 지금은 32살의 삶을 살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