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 생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623
김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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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노력, 결국 우물에 포섭되고 만다네. (12쪽, 폴짝인입니까?)

법의 언어가 아니라
경전의 언어가 아니라
숫자의 언어가 아니라
신화의 언어가 아니라
고유명사를 찬미하는 송가가 아니라
보통명사 하나하나를 고유한 세계로 맞이하려는 태도,
그 따스한 흔들림으로부터

이곳의 정의는 (평평으로)

(중략)

이곳의 민주주의는 (평평으로) (39족, 한 마을의 시가 태어나는 자리)

발 딛고 선 이곳이 운명이라는 건
어디서든 의지로 나를 지킨다는 건

당신이 내 운명이라는 건
내 의지로 당신을 지킨다는 것

그러므로 운명은 없다는 것 (73쪽, 벼랑 끝 나무로부터 배운 운명은)

꽃을 먹으면서
내가 먹는 것이 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략)

말과
돌과
금과
총알과
포탄이
뒤섞인 하늘 아래에서
너무나도 똑똑해진 사람들이 살아간다

꽃을 들고서
꽃이 없다고

꽃을 먹으면서
꽃이 보이지 않는다고 (96-97쪽, 무화과)

배꼽에서 탯줄이 자라
엄마에게 닿을 때까지 (104쪽, 축 생일)

궁리 끝에 도달한 결론은 시시했다
떠났다 혹은 흩어졌다, 이 정도로구나
세상의 이쪽에서 어딘가 다른 쪽으로 떠나는 것
유목민이 천막을 걷어 살 곳을 옮겨 가듯이

여기에 사람으로 잠시 머물다 흩어져
저기의 무엇, 무엇, 무엇인가로 가는 것
그리하여 어느 날 어느 때에 무한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 (121쪽, 여명)

지금껏 살던 대로 살아간다 해도
봄은 올 것입니다

인간 없는 봄이

그때
우리의 부재를 슬퍼할 누군가 있을까요? (140쪽, 거대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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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시인선 기념 티저 시집에는 시인들의 얼굴까지 있다. 시를 읽으며 상상했던 시인의 모습을 보다니, 편견을 또 한 번 깬다. 시인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전제 하에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시와 어울리지 않는 이도 있다. 이러한 발상이 참 웃긴 이야기지만, 시인의 발생에 대하여 신비를 품고 있었나 보다.    

부제가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그 말이 맞다. 그들의 아름다움이 글이 되어 내게로 왔다.

어디를 펼쳐도, 누구의 시와 산문을 읽어도,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괜찮다를 동시다발로 연발하고 있으니, 딱 집어낸 말에서 들킨 마음에는 질투까지 났다.  

부모님을 만나고 왔다. 말의 틈새를 이용하여 아들과 같이 살면 안될까,를 살짝 얹고, 이 딸 저 딸로 내달리는 엄마의 말에서는 한영옥의 시가 들어 있다.

눈꺼풀로는 볼 수 없지만 선명하다고 우기고 있는, 우리의 기억들을 맞춰보면서 서로의 불안을 잠재우고, 바라볼 수는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가지만, 이쯤 되면 아무것도 지긋지긋해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을 거 같다. 시인들이 필사의 노력으로 그리 말하고 있으니, 좀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만들 수 있을 거 같다.

96번째와 88번째의 봄 날에 있는 부모님을 보고 오면 진한 소원도 빌어야 하고, 서로가 사랑이라 부르는 단단한 매듭도 완성해야 한다. 아직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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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 문학동네시인선 100 기념 티저 시집 문학동네 시인선 100
황유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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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중략) 우리는 시인에 대한 여하한 신비주의도 품고 있지 않다. 아니, 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아는 훌륭한 시인들은 타고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그저 노력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필사적인 노력에 신비로운 것이라고는 없다. 노력이란,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는, 처절한 세속의 일이다. 조금도 신비롭지 않은 그 노동이 멈추면 시인도 함께 소멸된다. (4쪽, 신형철 ‘펴내며‘)

올여름은 생각 속에 내내 잠겨 있었다. 그동안 쓴 시들을 꺼내 읽어보려 했는데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내가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지난다고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34쪽, 김경인 ‘심심(心心), 심심(深深)‘)

어떤 감정이나 습관은 상황에 관계없이 주기를 갖고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 같다. 이러한 감정의 주기성은 단순히 한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에도 존재한다. (중략) 그것은 우리가 가진 생의 리토르넬로다. 어떤 선생은 그 음악을 예민하게 들어야 한다고 했고 어떤 선생은 리토르넬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생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했다. (60쪽, 김정진 ‘우리가 사는 음악 속에는‘)

흘러간 시간의 냄새가 났다. 바스러지는 낙엽들. 그리고 가을이다. (중락)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 겪는 건 좀 다르다. 그리고 그리다보면 그림이 형성된다. 가을이다. 갈색으로 물든 잔디밭에서 떨어진다. 누군가의 무릎에서 떨어진다. 찬바람이 뺨을 때린다. 해는 저물고 그리고 눈송이가 떨어진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잠깐 춥다. 그리고 떨어진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보면 가을이 간다. 잠깐 왔다가 눈이 온다.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고 찌는다. 날 선 가을이 찢는다. (98쪽, 서정학 ‘가을‘)

슬픔이 낭떠러지에 선 인간의 등을 떠밀어버리려는 것을 보게 된다면, 쓰고 싶은 시가 좀 달라질 것 같다. (중략) 남의 불행에 대하여 눈부셔하거나 황홀해하다가 눈꺼풀을 닫아버리는 일과, 나의 젊음이 뜨겁거나 아까워서 죽으므이 관념을 가지고 놀아보는 일. 다 지어치울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지긋지긋해하지 않고 잘 살 것이다. 얼음을 입에 물고 착실히 굳어가는 겨울의 허벅지처럼. 죽을 만큼 밉다는 말보다 죽을 만큼 슬프다는 말을 진실로 믿으며. 나는 아직 그런 슬픔을 위로해본 일이 없는 것 같다. (138쪽, 유계영 ‘바라볼 수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죽고 싶은 것과 사록 싶지 않은 것은 달라요
둘 사이의 공백을 견디는 게 삶이죠
약을 먹으면 인생은 다시 좋아질 케지만
가능성이란
불가능한 광년 너머에나 있는 것
(163쪽, 이용한 ‘불안들‘)

눈꺼풀로는 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간혹 눈을 감고 본다. 눈꺼풀로 본 것이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중략) 내가 눈꺼풀로 본 것은 달무리처럼 모호하고 어렴풋하다. 그것은 분명 과거의 퇴적물이지만 죽은 기억은 아니다. 내 글쓰기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미 오래전 망각되고, 피와 살과 뼈를 이룬 기억이다. (176쪽, 장석주 ‘눈꺼풀로 본 것들‘)

딸 많은 우리 어머니
이 딸에겐 저 딸 얘기
저 딸에겐 이 딸 얘기
점잖으신 우리 어머니도 그러시던걸
이 사람에게 저 사람 흘리고
저 사람에게 이 사람 흘리고
사람이 모지라서 그런 것 아니라네
말이라는 게 원래 정처가 없다네
(중략)
괜찮네 본심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네
우리의 말, 늦가을에 다시 피어나는
봄꽃처럼 얇아서 늘 조마조마하던걸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는 안타까운 주름
그걸로 충분하네 이해가 오고 있네
측은하고 반갑고 또 많이 고맙네
(220쪽, 한영옥 ‘측은하고, 반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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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구들, 유일한 친구 모임, '오숙일미(다섯명 O숙, 한명 O미)'가 동해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곳에는 우리의 남사친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동성동본인 그 애는 나를 좋아했다고 전해 들었다. 여전히 그 애는 또 다른 오숙일미와 같다.  

가는 기차에서 바다가 보일 때 마이크로 나오는 기관사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오늘 따라 잔잔한 바다를 보면서 우리 인생 또한 파도 같기도 한 데, 블라블라,, 

묵호에서 내려 현지인 맛집부터 여러 장소로 옛 추억과 다녔다. 특히, 헤어질 결심 촬영지에서는 최근 들은 말러 음악이 맴돌았다.

너와마루 와인, 정라진 찹쌀떡, 본인 여행책자를 챙겨 왔고, 친구들은 쌀, 드립커피, 올리브 오일로 답했다.

어디를 가나 다양한 방면으로 박학 다식하고, 기억력 또한 탄탄한 그 애의 이야기에 간간히 섞인 이야기들은 여기저기로 시간 여행으로 오갔다. 

그리 오래 만났지만 몰랐던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면서 더 끈끈해졌다. 서로를 더 자세히 알게 된 시간이었다.

책(2025 소설보다 가을과 겨울/ 수전 손택 여자에 관하여)을 읽었지만, 갑자기 천정 누수가 진행 중이고, 어찌할 수 없는 반복되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에 정말 알라딘 서재가 저기 있는데, 코앞에 있는데도 외면했다.

그러면서 놀러 다녀 와서, 읽었던 글이 생각났다. 이번 친구들과 그 애와 다니면서, 

이러 이러한 정체성을 드러내고 드러낸 순간, 어디 사람 같다, 어디에 산다, 자식은 이러하다, 배우자는 어떠 하다라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나를 포장해주는 이미지가 깨지는 순간, 계획된 삶으로 자신을 몰아가다 순간 전혀 다른 환경과 연결된 순간이었다.    

육십대 중반이 된 그녀들에게서 능동적인 성인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야 서로를 제대로 알게 되었구나, 아니 나만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 모든 일에서 가장 늦게 알게 되는 부분이 내게 허다했으니, 암튼, 더 편안한 모임이 될 수 있겠다, 멋진 남사친도 아주 조금 남은 감정까지 사라지게 한 시간이었지,싶다.  

'나이 듦은 본질적 특성상 남성보다 여성이 피해를 훨씬 많이 본다'는 손탁의 말에 동의한다, 이왕 여자로 태어났으니 이중 잣대의 시간에서 '자신이 살아 온 삶이 얼굴에 드러나도록(52쪽)' 살아보자고 다짐한다. 어떻게는 각자 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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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5 소설 보다
서장원.이유리.정기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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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랑 일본 사이엔 과거가 있잖아." 히데오의 이야기는 늘 그렇게 끝났고, 그러면 우리는 연극이나 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곤 했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아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과거가 있고 그것은 전혀 청산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죄를 히데오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30쪽, 히데오)

이제 히데오는 그를 찾는 인터뷰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레퍼토리는 늘 비슷하다. 어렸을 때 일본에서 자랐으며 그곳에서 심각한 이지메를 당했다고 고백하고, 그래서 한국으로 이주하여 보낸 학창 시절이 소중하다고 강조한다. 일본에서도 한국인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전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이제 더는 히데오가 아닌 히데오를 히데오라고 부르곤 한다. (38쪽, 히데오)

나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이며 나무며 모든 것이 엄청나게 작게 보였다. 까마득히 높구나. 여기서 떨어진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멈출 수 있다면, 당장 지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략) 안 죽어. 안전 바가 있잖아. 안 죽을 거 알면 그냥 재밌는 거지. 몇 번이고 떨어져도 안 죽는다고. (88-89쪽, 두정랜드)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승주는 늘 결백했다. 무엇에서든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나를 속이지 않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요행은 금물. 바라지도 않는 편이 좋다. 오직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승주가 생각하는 진실이었다. 승주는 나를 속이는 길과 속이지 않는 길, 그 갈림길 앞에 설 때마다 이 명제를 되새겼다. (122-123쪽,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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