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봄날의 소품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예를 들면 오늘 나쁜 일을 한다고 치세. 그게 성공하지 못하네."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네." "그러면 내일 똑같이 나쁜 일을 하네. 그래도 성공하지 못하지. 그러면 모레 또 같은 일을 하네. 성공할 때까지 매일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거지. 365일이라도, 750일이라도 나쁜 일을 똑같이 되풀이하네. 되풀이하다 보면 나쁜 일이 뒤집혀 좋은 일이 된다고 생각하거든. 언어도단이야." "언어도단이지." (76쪽)

"저렇게 아무렇게나 끌을 쓰는데도 생각한 대로 용케 눈썹이며 코가 만들어지는구나"하고 나는 너무나도 감탄한 나머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러자 조금 전의 그 사내가, "무슨 소리, 저건 눈썹이나 코를 끌로 만든 게 아니네. 저대로의 눈썹이며 코가 나무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을 끌과 망치의 힘으로 파낸 것일 뿐이야. 마치 흙 속에서 돌을 파내는 거소가 같은 이치니까 절대 실패할 리가 없지"하고 말했다. 나는 이때 비로소 조각이 그런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과연 그렇다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9쪽)

안주인은 눈이 쑥 들어가고 코가 움푹 패었으며 턱과 볼이 뾰족하여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여자로, 언뜻 보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여성을 초월하고 있었다. 신경질, 비뚤어짐, 고집, 오기, 의심 등 모든 약점이 온화한 이목구비를 실컷 가지고 논 결과 이렇게 비뚤어진 인상이 된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134쪽)

고양이는 특별히 화를 내는 기색도 없었다. 싸움하는 걸 본 적도 없다. 그저 가만히 누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누어 있는 자세에도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없다. 한가롭고 편하게 몸을 옆으로 뉘고 햇볕을 쬐고 있는 것과 달리 움직일 만한 자리가 없기 때문에, 아니 이것으로는 아직 형용이 부족하다. 께느른함의 정도가 일정한 한계를 넘어 움직이지 않으면 외롭지만 움직이면 더욱 쓸쓸해지게 때문에 가만히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43-144쪽)

바람이 높은 건물에 부딪혀 생각처럼 똑바로 빠져나갈 수 없어서인지 갑자기 번개 모양으로 꺾여 머리 위에서 비스듬히 포석까지 불어 내려온다. (147쪽)

10월의 해는 조용한 산골짜기의 공기를 하늘 중간에서 감싸 직접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산 너머로 도망친 것도 아니다. 바람 없는 마을 위로 언제나 떨어져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뿌옇게 있다. 그사이에 들과 숲의 색이 점차 변해간다. 신 것이 어느새 달콤해지는 것처럼 골짜기 전체에 세월이 더해간다. (181쪽)

더구나 나는 작년 연말부터 감기에 걸려 거의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매일 이 유리문 안에만 앉아 있어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은 전혀 모른다. 기분이 좋지 않아 책도 읽지 않는다. 그저 앉았다 누웠다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내 머리는 이따금 움직인다. 기분도 다소 변한다. 아무리 좁은 세계라고 해도 나름대로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작은 나와 넓은 세상을 격리하고 있는 이 유리문 안으로 때때로 사람이 들어온다. 그들은 또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로,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한다. 나는 흥미에 가득 찬 눈으로 그들을 맞이하거나 보낸다. (209-210쪽)

불쾌감으로 가득 찬 인생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나는 자신이 언젠가 한번은 이르러야 하는 죽음이라는 지경에 대해 늘 생각한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을 삶보다 편한 것이라고만 믿고 있다. 어떤 때는 그것을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지고의 상태라고 생각하는 일도 있다. (226쪽)

마주 앉은 O와 나는 무엇보다 먼저 서로의 얼굴을 보고 거기에 아직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 그리운 꿈의 기념물처럼 남아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예전의 마음이 새로운 기분 안에 어렴풋이 가미되어 있는 것처럼 온통 어슴푸레하게 흐려져 있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무서운 ‘시간‘의 위력에 저항하여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헤어지고 나서 지금 다시 만날 때까지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과거라는 불가사의한 것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231쪽)

이것이 그들의 허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허영은 돈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이었다. (262쪽)

비뚤어진 내 마음은 별도로 하고 나는 과거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했다는 씁쓸한 기억을 갖고 있다. 동시에 상대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일부러 평이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은근히 그 사람의 품성에 창피를 준 것과 같은 해석을 한 경험도 많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293쪽)

나는 가끔 그 여자를 만나 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만나보면 필경 할머니가 되어 있어 옛날과는 전혀 다른 얼굴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도 얼굴과 마찬가지로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바짝 말랐을 것이다. (303쪽)

어머니는 내가 열서너 살 때 돌아가셨지만, 지금 멀리서 불러일으키는 그녀의 환상은 기억의 실을 아무리 더듬어가도 할머니로만 보인다. 어머니의 만년에 때어난 나에게는 끝내 어머니의 젊고 싱싱한 모습을 기억할 특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303-304쪽)

약한 바람이 때때로 화분에 심어진 구화란의 긴 잎을 흔들었다. 정원수 안에서 휘파람새가 가끔 서툴게 지저귀었다. 매일 유리문 안에 앉아 있는 내가 아직 겨울이다, 겨울이다,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봄은 어느새 내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명상은 아무리 앉아 있어도 형태를 이루지 못했다. (309-310쪽)

집도 마음도 쥐 죽은 듯 조용해진 가운데 나는 유리문을 활짝 열고 조용한 봄 햇살에 싸여 넋을 잃은 채 이 원고를 끝낸다. 그런 후 나는 이 툇마루에서 잠깐 팔꿈치를 구부려 베개로 삼고 한숨 잘 생각이다. (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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