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책들을 읽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대충 파악했다고 믿었다. 답답한 것은 문제를 안다는 것과 그것을 극복하는 일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113쪽)
그것이 인혜의 함정이었다. 사랑과 연민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 늘 연민이 앞서고 사랑이 뒤따라 온다는 것. (181-182쪽)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부터 내게는 제대로 된 대상을 향해 정당하게 분노하는 기능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거절하는 기능, 부탁하는 기능, 내 것에 애착하는 기능 등이 발달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의 성향일 것이다. (230쪽)
배우자와 애인이 있으면서도 또 다른 연인을 찾아 눈길을 두리번거리는 사람, 통장에 십 억을 넣어두고도 돈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 비만이 분영한 체형인데도 과식, 폭식 습관이 조절되지 않는 사람, 숨 돌릴 틈도 없이 약속을 만들고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사람, 다음 날 일상이 망가질 게 뻔한데도 도박판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 그들이 원하는 것이 돈이나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의식 저 깊은 곳에 비어 있는 구멍, 그것을 채워 줄 따뜻한 보살핌과 사랑이라고 했다. (290쪽)
인혜는 처음부터 인간 사이의 소통이라는 게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아무리 서로를 껴안는다 해도 끝내 솜털 한 올 섞일 수 없는 엄연한 현실, 아무리 서로의 입으로 혀를 밀어 넣는다 해도 마지막에는 자신의 체액밖에 간질할 수 없는 육체였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자신의 입에서 나와 자신의 귀로 들어가는 소리일 뿐이었다. (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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