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 신경림의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시
신경림 엮음 / 다산책방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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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는 돈을 벌지도 못하고 쌀을 생산하지도 못하며 자동차도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돈을 벌고 쌀을 생산하고 자동차를 만드는 그 주체인 사람을 즐겁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고 사람답게 살게 만든다. (5쪽)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선운사에서 중. 최영미(17쪽)

문득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성산포 앞바다는 잘 있는지
그때처럼
수평선 위로
당신하고
걷고 싶었어요

-문득. 정호승(33쪽)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중. 박라연(35쪽)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그 여자네 집 중. 김용택(43쪽)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 중. 천상병

거기 먼저 와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길 중. 박영근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가 듣고 싶으면 내려와 계곡이 된다

산은 한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도 되고 명산도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산 중. 김광섭(122-123쪽)

허전하단 말도 허공에 주지 않을뿐더러
-그 사람 다시 생각지 않으리
-그 사람 미워 다시 오지 않으리

-밤 미시령 중. 고형렬(136쪽)

저만치 여름숲은 무모한 키로서 반성도 없이 섰다
반성이라고는 없는 녹음뿐이다
저만치 여름숲은 성보다도 높이, 살림보다도 높이 섰다

-여름숲 중. 장석남(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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