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 시인 최영미, 축구와 인생을 말하다
최영미 지음 / 이순(웅진)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아스널 선수들이 먼저 운동장에 나와 몸을 풀고, 박수소리가 터지고, 전광판에 `Welcome to the Arsenal Stadium` 환영 자막이 뜨고 드디어 귀에 익은 노래, 챔피언스리그의 공식 음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귀빈들을 소개한 뒤에 들어준 감미로운 팝송, 많이 듣던 곡인데 가사가 멋져 내 뒤에 앉은 젊은 여자에게 제목을 물어보았다. [The Wonder Of You].

When on one else can understand me
When everything I do is wrong
You give me hope and consolation
You give me strength to carry on
......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할 때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잘못되었을 때
너는 내게 희망과 위안을 주었지
너는 내게 살아갈 힘을 주었지
......
너는 공, 너는 축구, 너는 시.
너보다 나를 위로해준 사람은 아직 없었지.

아스널의 노래에 감동한 탓인가, 약팀에 대한 동정심에서인가. 경기가 시작되고 나도 모르게 아스널을 응원하는 이상한 일이 내 속에서 일어났다. (48-50쪽)

그러나 나의 `그이`는 이제 여기 없다. 그는 바르셀로나를 떠나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뛰다, 마침내 그의 고국인 브라질로 돌아갔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그는 브라질 대표팀에 뽑히지도 못했다. 그가 없는 브라질은, 소심한 둥가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브라질답지 않은 수비적이고 실망스러운 경기를 펼치다 일찍 짐을 쌌다. 튀어나온 턱의 야생마가 없는 월드컵은 심심했다. 아직 은퇴할 나이가 아닌데, 축구의 신을 가까이서 알현할 기회를 놓쳐, 아쉬웠다. 세계 무대에서 그를 다시 볼 날이 있을까? 호나우지뉴에 대한 그리움을 접고, 나는 해변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바르셀로나에 왔는데 바다를 못 보고 그냥 가면 너무나 서운할 터. (70쪽)

기술이 뛰어난 검투사들은 유명한 운동선수와 비슷한 인기를 누렸다는데, 지금 그 이름은 어디에도 없고 무대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쇼`는 계속된다. 칼과 헬멧 대신 현대의 검투사들은 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공을 찬다. 피로 물들던 모래바닥이 땀으로 범벅 된 잔디로 바뀌었을 뿐, 게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 그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한 번으로는 부족해 두 번 세 번 그물망을 흔들어 적의 전의를 완전히 꺾는 것. 관중을 흥분시키고 박수소리를 들으며 무대에서 내려오는 짜릿함. 극적인 순간에 터진 예술적인 골이 우리에게 주는 황홀감. 인간은 게임 없이는 살 수 없다. 잔혹한 싸움이 평화로운 공놀이로 변했으니, 역사는 진보했다 말할 수 있으리. (92-93쪽)

무리뉴의 얼굴에 깃든 허탈한 냉소는 그가 이미 경기를 포기했음을 말하고 있었다. 감독이 경기를 포기하는데, 선수들이 싸울 의지가 생길까? 오바마에 버금가는 우리 시대의 웅변가가 이번에는 또 어떤 발언으로 자신을 변호하려나, 2대0으로 홈에서 패한 뒤에 심판의 판정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는 말했다. "가끔 나는 이런 세계에 사는 게 역겹다." 그처럼 강하고 잘난 남자도 이 세상이 역겨워질 때가 있다니. 아시아의 변방에서 쪼가리 글로 연명하는 어느 작가에겐 위로가 되리. (108-109쪽)

감독은 `두렵다`고 밖에 대고 말하면 안 된다. 우리 감독이 상대편의 특별한 재능을 두려워하면, 우리 선수들은 기가 죽는다. 싸우기도 전에 힘이 빠져서, 혹은 `그분`을 막을 생각으로 몸에 너무 힘이 들어가서, 정작 실전에서는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성남 선수들처럼 너무 긴장해서 미끄러지거나 헛발질을 하기 십상이다. 상대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어느 특정 선수를 `막는` 방향으로 전술의 초점이 맞춰지면 곤란하다. 그렇다면 이미 훈련에서부터 저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거나 마찬가지. 축구는 11명이 겨루는 단체경기다. 개개인의 능력보다는 여럿이 어떻게 하나의 팀으로 움직이는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공은 둥글고, 순수하고, 평등하다. (134-135쪽)

나는 왜 수비수가 되었나


국민학교 피구선수였던 나는, 상대를 정확히 맞춰 때리는 재주가 없음을 일찍이 간파하고 용감한 수비수가 되었다. 전속력으로 날아오는 공을, 둥그런 아픔을 가슴으로 껴안으며 뻐근한 쾌감이 나를 관통했다. 자기를 버리는 기쁨을 안 뒤부터 승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도 공만 보이던 그날부터 나만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운동장 밖에는 더 큰 세상이 있어, 치명적인 공이 바로 내 앞에 떨어지기까지 누가 적이고 누가 진짜 친구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최영미, 시집 [돼지들에게]에서 (171쪽)

"대한민국! 짝짝짝." 일본 열도를 뒤흔드는 함성이 우리를 진정으로 해방시키리라. 나라를 잃고 언어를 잃고 자존심마저 빼앗겼던 굴욕의 세월들, 전후 세대인 우리는 잊었지만 우리의 실핏줄 어딘가에 도사린 찜찜한 식민지 백성의 콤플렉스를 한방에 날려 보내리라. 바싹 현실로 다가온 꿈을 걷어내며 창문을 연다. 귀에 익은 경적 소리, 소리는 소리를 부른다. 우리 동과 마주보는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 아이들이 나와 박수를 치고 함성을 지른다. 서로 화답하는 소리들과 거리를 질주하는 붉은 티셔츠들, 조용하던 신도시가 깨어난다. (182쪽)

월드컵은 끝났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던 남자들의 야망이 만나 연출한 황홀한 연극은 막을 내렸다. 땀을 흘린 선수들은 연극의 배우였고, 대한민국을 합창한 국민들은 어마어마한 돈과 재능과 시간을 쏟아 부은 축제를 관람한 관객이었었다. 히딩크는 무대 뒤로 사라졌지만 그해 유월, 내 이마에 내려앉았던 뜨거운 햇살은 영원하리라. 오로지 추억 속에서. (188-189쪽)

오로지 이기기 위해 90분 동안 미리 짜인 각본대로 선수들이 움직인다면,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아무리 뛰어난 감독이라도 공의 흐름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 기다리지 않는 곳에서 공이 와야 경기의 수준이 높아지는 법. 내가 기다리는 곳에서. 기다리지 않는 곳에서도 공을 주고받아야 사회도 게임도 아름다워진다.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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