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목마의 데드히트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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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생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는 일종의 무력감에 사로 잡히게 된다. 앙금이란 그 무력감을 말한다. 우리가 아무데도 갈 수 없다는 건 이러한 무력감의 본질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집어넣을 수 있는 인생이라는 운행 시스템을 소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시스템은 우리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회전목마와 비슷하다. 그것은 정해진 장소를 정해진 속도로 돌고 있을 뿐이다. 아무데도 갈 수도 없고, 내릴 수도 갈아탈 수도 없다. 누구를 따라잡을 수도 없고, 누구에게 따라잡히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그런 회전목마 위에서 가상의 적을 향해 치열한 데드히트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5쪽)

그래도 몇 번인가 회를 거듭하며 사소한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동안, 나는 거기서 일종의 요령 같은 것을 발견했다. 인터뷰는 인터뷰하는 상대방의 내면에서 남들과 달리 숭고하고, 예민하고, 따뜻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아무리 사소한 점이라도 상관없다. 한 인간의 내면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내는 데 성공하면 질문은 저절로 나오게 되고, 따라서 생생한 기사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진부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애정과 이해다. (40쪽)

스무 살이 지나면서부터 그는 `반환점`이라는 사고방식이 자신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느껴왔다. 자신을 알려면 자신이 서 있는 장소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사고방식의 기본이었다. (64쪽)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도 나름대로 귀하게 자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녀가 얼마만큼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는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 수 있었다. 응석을 부리고, 늘 칭찬만 받고, 보호를 받고, 물질적인 혜택을 누리며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응석을 받아주거나 용돈을 주는 것이 아이의 버릇을 버려놓는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 어른들이 표출하는 성숙하면서도 비뚤어진 갖가지 감정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책임을 누가 떠맡느냐 하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이 그 책임을 회피하고 아이에게 좋은 얼굴을 보이고 싶어할 때, 그 아이는 확실히 버릇없는 아이가 된다. 마치 여름날 오후 모래사장에서 알몸으로 강한 자외선을 쬐는 것처럼, 막 태어난 귿르의 보드라운 에고는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그것이 가장 큰 문제다. 오냐오냐 키우고 부족함 없이 돈을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에 따르는 부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94쪽)

우리는 많든 적든 모두 돈을 내고 여자를 사고 있다, 라고. 물론 훨씬 젊었을 때는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는 아주 단순하게 섹스라는 것은 공짜라고 생각했다. 일조으이 호의와 호의(좀더 다른 표현도 있겠지만)가 만나면, 거기서 극히 자연스레 자연발화하듯 섹스가 생겨난다는 생각이다. 젊었을 때는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사고만으로도 통했고, 무엇보다 돈 자체가 없었다. 나한테도 없고, 상대에게도 없다. 낯선 여자의 방에서 자고, 아침이 되어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면서 차가운 빵을 나눠먹는 생활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나름대로 성숙해짐에 따라, 우리는 인생전반에 대해서 좀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즉 우리의 존재 혹은 실재는 다양한 종류의 측면을 긁어모아 성립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분리 불가능한 총체라는 견해다. 즉 우리가 일해서 돈을 벌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선거에 투표를 하고, 프로야구 야간경기를 보러 가고, 여자와 자는 각각의 작업은 하나하나가 독립되어 가능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같은 것이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 데 지나지 않는다. (136쪽)

그리고 나는 그 옛날, 섹스가 산불처럼 공짜였던 시절을 떠올렸다. 정말로 그것은 산불처럼 공짜였는데. (157쪽)

"신경성 병이 나타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죠. 원인은 하나지만 결과는 무수하고요. 마치 지진과 같아요. 방출되는 에너지의 질은 똑같은데, 그것이 분출하는 장소에 따라 지상에 나타나는 현상이 완전히 달라져버리죠. 섬이 하나 생길 때가 있는가 하면 섬이 하나 가라앉을 때도 있고."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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