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첩기행 5 - 북아프리카 사막 위로 쏟아지는 찬란한 별빛 문학동네 화첩기행 5
김병종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장바구니담기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면 내 안에서 발버둥치던 자아가 비행기의 상승과 함께 상승하고, 비상과 함께 비상하는 느낌이 든다. 인류사의 허다한 영적 스승들이 '길과 깨달음'의 연관성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고정된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행로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싶다. 비행기를 타는 일은 우선 그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일이고말고다. 나와 다른 피부색을 하고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머리 모양을 하고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 속으로 섞어드는 순간, 나의 자잘한 자의식의 서푼짜리 고뇌의 뿌리를 이루는 무지며 의식의 한계 같은 것이 서서히 보이고 또한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21쪽

그(존 버거)에 의하면 '떠남'은 "예언의 시간"이며 "영원한 새벽"을 맞으러 가는 일이고 "내가 태어난 마을을 들이마시며" "그 강의 굴곡을 어루만지는"일이다. 무엇보다 "아주 오래된 산맥보다도 더 오래된 가슴속의 꽃 한 송이" 피어나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그에 의하면 사람들이 고향 혹은 그와 비슷한 시간 속의 옛 장소를 찾아가려 하는 것도 단순히 추억이나 과거를 그리워해서만은 아닌 "사라진 것을 기려 말을 걸게 하기 위함"이고, 그렇게 말을 걸어서 산맥보다 오래된 가슴속의 꽃 한 송이가 계속 피어 있게 하기 위함이다. -63쪽

모든 종류의 옳고 그름은 종교적 분파나 구별보다는 그 조준경이 자연과 우주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로서의 옳고 그름에 대한 사색에서부터 출발함이 옳다고 한 것이다. 죄가 나쁜 것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기 때문에보다는 이 자연과 우주의 척도로 볼 때 자신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바로 이 관점 때문에 기본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기본, 내가 챙겨야 될 것은 신앙의 노선이나 색깔이 아니라 기본이었던 것이다. 그 영구적인 자연과 우주의 렌즈로 비춰보는 기본 말이다. -102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미술은 아름답다. 모든 덧없음과 허무와 슬픔을 이겨내게 하는 혹은 잊어버리게 하는 아름다움이다. 거대한 아름다움이고 숨이 멎는 아름다움이다. 보라. 신전의 벽화들마다 원근법과 공간감이 얼마나 과감히 무시되고 있는지. 원근이나 공간은 예컨대 시간과 거리에 관한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시공간 속에서 만난다면 그런 시각법은 유치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 면에서 시간을 이겨내고 공간 또한 주물러댄 이집트 미술은 위대하다. -146쪽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대체 무엇이 실존이고 무엇이 허구이며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허상이란 말인가. 수많은 인간들이 일상과 삶의 현장에서 실존이고 실상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순간에 무너질 허상 일 수 있지 않을까. 사하라는 내게 그런 묵시 같은 느낌을 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실존과 허상의 경계 같은 것을 갖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159쪽

내가 좋아하는 정신의학자 어빈 얄롬이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외로움에 대한, 소외와 두려움에 대한 불안이 녹아 없어져버리는 상태라고.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그 불안을 덮는 대신에 자신을 놓아버리거나 잃어버리는 대가 또는 기꺼이 치러야 할 것이라고. 그런 면에서 소외와 죽음. 그리고 외로움과 고독의 어둠과 맞서 싸워가며 불빛을 찾을 만한 의지가 허약할수록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흡수시키면서 쉽게 사랑에 빠져드는 것 같다. 여린 짐승들이 서로의 상처를 혀로 핥아주듯 그렇게 말이다. -250쪽

어느 문화권이든지 제대로 알고 이해하려면 박제된 박물관보다는 재래시장으로 가라고. 그중에 제일은 페스의 이 미로 시장이라고. 물건을 팔기보다 시간을 파는 수크의 모래시계 장터에서 느리게 걸어보라고. 인생의 길을 잃은 사람일수록 그 미로 속에서 다시 길을 찾아 나설 일이라고.-30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