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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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와 나는 운명처럼 지워진 사회적 불평등 속에 내던져지듯 태어났다는 강렬한 감각이 우리 두 사람의 내면에서 활활 타오른다. 우리의 화두는 살아보지 않은 삶이다. (중략) 문제는 우리 둘 다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중략) 우리도 좀 달라지고 싶지만 어찌됐건 우리가 느끼는 삶이란 게 그러니까. 그리고 삶을 느끼는 방식은 결국 삶을 살아낸 방식일 수밖에 없다. (6쪽~8쪽))

가면 갈수록 사회 변두리로 향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이 응어리진 쓰린 가슴을 달래주는 건 오직 도시를 가로지르는 산책뿐이었다. (20쪽)

"판단하기 좋아하는 사람인 걸 사과하는 것도 지긋지긋해. 판단하기 좋아하면 왜 안 되는데? 나는 판단하기 좋아하는 게 좋다고. 판단을 하면 안심이 된단 말야. 절대적인 것들. 확실한 것들. 그런 것들이 얼마나 좋았는데! 그런 걸 되찾고 싶어. 되찾을 순 없는 걸까?" (중략) "예전엔 모든 사람이 참 어른 같았지. 근데 이제는 아무도 안 그래. (47쪽)

이십대의 마지막 날 나는 어느 과학자와 결혼했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황폐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뭐랄까. 영문은 알 수 없었다. 바뀐 것도 전혀 없었다. 남편도 그대로고 나도 그대로였다. 몇 주 전만 해도 아침에 눈을 뜨면 마냥 들떠있었는데. (중략) 저 남자는 누구지? 나는 생각했다. 저이는 내 짝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사람만 있다면, 또 생각했다. 1년 뒤 우린 이혼했다. (69-70쪽)

삶이 불능의 총합처럼 느껴지려 할 때면 나는 타임스스퀘어까지 산책을 나선다. 세상에서 가장 오령넘치는 하층민들의 본고장인 그곳에 가면 금세 통찰이 회복된다. (73쪽)

실제로 삶을 빚어내는 바탕이 되었던 공감과 연민이 차츰 깎여나가면서 우리가 우정을 바친 그 마음과 영혼의 모험도 천천히,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중략) 영원한 친구따윈 없으며 오직 영원한 이익만이 있을 뿐이라던 윈스턴 처칠의 말이 떠올랐다. (84-85쪽)

세상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며 생각했다. 나는 내 울분을 제조해내려고 태어난 사람이구나. 하지만 왜? 하물며 소중한 인생에 내처 그걸 붙들고 있었다니. 대체 왜? (122쪽)

자기를 위해서도 못 하는 일을 상대방을 위해 해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134쪽)

나도 시모어 크림과 다를 바 없이 오랜 세월 걷고 또 걸었던 그 수많은 거리와 가로수 길을 터벅터벅 걸어다니며 지치지도 않고 꿈에 그리는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나리오를 구상하게 될 줄이야. 그러다 예순이 되던 어느 날 어떤 낯선 시간이 아늑하게 짜여 있던 이 구성을 사정없이 내동댕이쳤다. (162쪽)

예순이 된다는 건 앞으로 살날이 여섯 달 남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듣는 것과 비슷했다. 내일이라는 몽상 속 피난처로 숨어드는 것도 하룻밤 새 옛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오직 텅 비워진 방대한 현재뿐이었다. 이걸 채우는 작업에 진지하게 임하겠다고 그 자리에서 다짐했다. 물론 말이 쉽지. 몽상을 끊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그 긴 세월 해본 적도 없는 현재를 점유하는 일을 대체 어떻게 해낸단 말인가? (중략)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존재의 순간들‘을 자주 생각한 날들이었다. (165쪽)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벗어난다는 건 영원한 미완의 과제로,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완결되지 않는다. (167쪽)

외로움이라는 습관은 질기다. 레너드 말로는 외로움을 쓸모 있는 고독으로 바꿔내지 않는 이상 난 영영 엄마의 딸일 거란다. 물론 그 말은 맞기는 하다. 사람은 이상화된 타자의 부재로 인해 외롭지만, 그 쓸모 있는 고독 속에 스스로를 상상의 동반자 삼아 침묵에 생명을 불어넣고 지각 있는 존재라는 증거를 방 안 가득 채워 넣는 ‘내‘가 있다. 이런 통찰의 기틀을 마련하는 법은 에드먼드 고스‘로부터 배웠다. (184쪽)

지금 여기, 또다시 여름날 저녁이 왔고, 나는 그 광장을 다시금 걷고 있다. 거리를 뒤로하고 얼굴엔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아로새긴 채 막에 가려진 그 오래된 추억을 똑바로 들여다보다, 추억은 더 이상 내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광장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 검은 피부, 갈색 피부, 젊음, 떠돌이와 약쟁이와 엉성한 기타 연주자로 북적거리는 곳.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도시를 있는 그대로 느낀다. 내가 지금까지 몸으로 살아낸 것은 온갖 갈들이지 환상이 아니었으며, 뉴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하나다. (215쪽)

우리는(레너드와 나) 계속 함께 걷는다. 나란히, 묵묵히, 끊임없이 형성 중인 서로의 경험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목격자로서. 대화는 언제까지고 깊어져만 갈 것이다. 설령 우정은 그렇지 않더라도.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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