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한 기억 - 유성호 산문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유성호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마다의 생의 가치는 이처럼 ‘추억‘의 부피만큼만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누구라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명료한 척도로 계측할 수 있겟는가. 다만 자신의 시간 속에서 길어올린 ‘추억‘이 불러주는 꿈을 통해 이 불모의 결핍의 생을 견뎌가는 힘에서 생은 갈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의 가치는, 분주한 일상이나 만나는 사람들의 머릿수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추억 속에 살아 움직이는 ‘흔적‘의 활력과 온기에서 입증된다. (23쪽)

나는 근대문학의 속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리를 ‘기억‘으로 보고, 그 ‘기억‘이 고고학자의 시선처럼 현재의 지층 속에 화석의 형식으로나 있을 법한 오래된 질서들을 발견하고 재현하는 어떤 힘임을 발견하고 있다. 특별히 그것을 근대문학을 통해 발견하면서, 형이상학적 중심의 부재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시대의 척박함과 가벼움을 극복해가는 기율과 비의가 그 안에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 작가나 시인들에 대한 ‘기억‘에 정사와 야사가 따로 있을 리 없지 않은가. (84쪽)

문학은 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궁극적인 대상으로 다룸으로써 이를 접하고 누리는 이들로 하여금 사회적 존재로 성장하게끔 하는 문화예술의 한 영역이다. 그 점에서 아무리 영상매체가 주도적인 예술로 자리잡아간다고 해도, 문학을 통해 경험과 생각을 계발해가는 과정은 전혀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문학은 인간이 깊이 생각하고 사물을 인식하는 데 더없이 필요하며, 언어를 통해 감동과 사상을 키우는 데 변함없는 중심 역할을 할 것이다. (122쪽)

미당(서정주)은 일그러진 역사에 참여했던 자신의 한때를 시대의 압력에 순응한 결과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어쪄면 그가 시를 쓰면서 정말 중요했던 건, 역사나 독립 같은 것이 아니었을 터이다. 그건 오히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요, 그후에 찾아오는 근원적 초월과 달관의 직관적 순간을 아름다운 언어로 잡아채는 것이었다. 그뿐이었다. 아니 그것만이 그가 꿈꾸는, 그리고 꿈꿀 수 밖에 없었던 ‘시‘였다. (184쪽)

따라서 종교는 그 성격상 인간의 자기 인식 및 자기 성찰과 떼어질 수 없으며 인간의 삶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종교적 삶이 이성적 합리주의와 영적 초월이라는 두 경계선을 부단히 오가야만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곧 종교적 인식에 토대를 두고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포함한 인간의 역사와 현실에 관심을 투사하는 일과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궁극적 실재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의 양 측면을 아울러 이름하는 것이다. (26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