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문학상 대상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
공지영.손홍규.편혜영 외 19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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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처를 보여주면 얼마 후 그곳으로 공격이 시작되었다. 나는 점점 더 불안해지고 점점 더 숨고 싶어 하며 점점 더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모든 접촉에의 차단은 나에 대한 비난들을 누룩처럼 부풀렸고 내 특질과는 아무 상관없는 헛소문들이 내 귀에까지 자주 들려온다. 좋은 학교, 좋은 집안, 그럴듯한 외모, 젊은 여성, 이혼녀, 베스트셀러 작가. 이 반짝이는 모조구슬 같은 딱지들은 무대의상처럼 화려하고, 그 안에서 내 영혼은 썩은 내를 풍기며 곪아가고 있었다. (21쪽, 공지영)

박태기꽃을 보거나 나비와 마주치거나 갈림길을 만나거나 떡을 못 받거나 설령 받았더라도 나는 예외 없이 구시렁거리고 꿈지럭거렸다. 다시 말해 아무 때나 무슨 일에든, 꾸준히, 안 게으르게, 맹렬하게. 그러는 사이에 소설이 슬며시 끼어들었던 건 아닐까. 혼자하는 긴 원망과 반성, 하릴없는 궁금증, 고의적인 음해, 상상을 넘어선 망상, 일방적인 착각과 환멸, 이 상시적이고도 꾸준한 꾸물거림의 수풀 사이로 소설이 비단뱀처럼 흘러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꾸물거리는 것이 허비가 아닌 생산일 수도 소설의 경우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 (35쪽, 구효서)

간발의 차이로 죽지 못한 게 억울해 가슴을 탕탕 쳤지만 나는 여전히 나 자신밖에 모르는 어린애였다. 내 죄와 상처, 새 설움밖에 몰랐고, 내 죽음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타인의 죽음을 배우는 건 지난한 일이었다. (48-49쪽, 권여선)

그렇게 나는 글을 쓴다는 건 고독을 대면하는 일이라는 걸, 평생 글을 쓰겠다는 것은 평생 고독을 대면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축구장에 들어설 때만이 축구선수라 할 수 있는 것처럼 고독할 때만이 작가의 일은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놀랍게도 나는 그 고독이 따뜻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렇게 15매를 쓴 어느 날 밤에 깨닫게 된 사실일 것이다. 그 고독이 너무나 따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나를 둘러싼 모든 게 바뀌게 된 것 같다. (111쪽, 김연수)

이렇게 인간에게 딱지를 붙여 분류해 감옥에다가 딱딱 집어넣는 지식이 있다면, 그 감옥에 갇힌 인간을 풀어주는 일을 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돌이켜보면 ‘소설 나부랭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재미있었기 때문에 읽기 시작했고 마침내 작가의 길로 들어서 꾸준히 좋은 작품을 쓰려고 애썼던 나의 삶. 이제는 소설만 가지고도 인간을 교육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50쪽, 김지원)

학문적으로 말할 필요가 없다면, 소설이란 진지하게 ‘사는 것‘인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심오하게 ‘배우는 것‘이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싸안는 경험의 그물망, 그것이 소설의 깊이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는 것‘인 동시에 ‘배우는 것‘으로서의 소설과 작가를 염두에 두고, 심화되는 가속력의 세계와 퇴행하는 인간의 조건을 또한 경계해야 할 것이다. (176-177쪽, 박상우)

내 태생지의 자연과 인간의 모습들은 끈질기게 내게 들러 붙어 있다가 현재의 내 삶 속으로 불쑥불쑥 쳐들어와 문장을 일구어내곤 한다. 사실에 의해서보다는 결국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게 마련이라는 그 기억이란 것이 이렇게 지독한 것인가,싶어 때때로 몸서리쳐질 때도 있다. (199쪽, 신경숙)

세상에는 이렇게 절박하고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아직 나 개인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괴롭지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을 나는 믿는 편이고 아직은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238쪽, 윤이형)

이 세상에 태어난 자 누군들 외로움과 그리움에 몸부림치지 않으랴만, 그것은 그것과 싸우면 싸울수록 더 커지는, 신화 속의 괴물과 같은 것임을 일찍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었다. 그것을 싸워서 이겨내는 길은 없다. 지혜롭게 비켜가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이것이 운명이라고 하는 것임을 나는 이제 알겠다. (254쪽, 윤후명)

문학에 전혀 새로운 테마가 있을 리 없고 순수니 통속이니 하며 굳이 금기하고 배재해야 할 영역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작가가 삶을 다루는 새로운 층위가 있고 새로운 문학 형식의 고안이 있을 뿐이다. 나의 소설은 늘 삶 자체에서 생산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또한 많ㅇ니 다른 지점이 될 것이란 예감이 든다. 여성적 생명과 존재라는 생의 원형질적인 관심에서 올라서서 삶의 표면과 일상을 무대로 새로운 형식의 고안을 모색할갈 것이다. 그것은 나의 소망이기도 하다. 글쓰기의 고통은 그 현재성 속에서 늘 충분하다. (265쪽, 전경린)

몸을 갖지 못한 언어가 지은 집은 어쩌면 가장 무력한 것이 아닌가 절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전에 존재했던 것들, 동시대를 같이 숨 쉬는 것들,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존재할 것들은 역설적으로 오직 언어 안에서만 영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81쪽, 정미경)

삶의 객관적 조건을 아는 것과 삶의 내면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서류와 정보를 통해 누군가의 형편과 조건을 알 수는 있겠으나 그것으로 섣불리 삶을 짐작하려는 일은 각각의 삶을 단순화시킬 뿐이다. 숫자나 통계가 단순화시킨 삶을 벗어나는 방법은 개인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이다. 내가 지켜봐온 부모의 이야기, 세 자매의 이야기, 오빠의 이야기 같은 것들. 통계와 수치로는 짐작되지 않는 어떤 얘기들을. (315쪽, 편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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