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뒤에 숨은 사랑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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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칭이란 인생이 항상 그렇게 심각하고, 형식적이고, 복잡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는 유물, 어린 시절이 남겨준 유물인 것이다. 애칭은 또한 사람이란 함께 있는 사람,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지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준다. (41쪽)

아시마는 요즘 들어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평생 임신한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림은 긑도 없고, 언제나 버겁고, 끊임없이 남과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한때는 평범했었던 삶에 이제는 불룩하게 괄호가 하나 삽입되었고, 이 괄호 속에는 끝나지 않는 책임이 들어 있었다. 이를 통해 이전의 삶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 그 삶은 오히려 더 복잡하고 힘든 무엇인가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임신했을 때처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호기심과, 그리고 동정심과 이해심이 묘하게 뒤섞인 감정을 자아내는 어떤 것이라고, 아시마는 생각하였다. (71쪽)

어찌 보면 아쇼크와 아시마는 아주 늙은 사람들의 삶을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알던 사람들, 사랑하던 사람들을 모두 잃은 채 오직 기억만으로 위안을 삼으며 살아남은 사람들, 아직 살아 있는 가족들까지도 어떻게 보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볼 수도 없고 손에 닿지도 않는 곳에 있었으니까. (88쪽)

이제까지 고골리는 이름도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름 또한 사라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었다. (96쪽)

그는 그녀가 죽도록 보고 싶었다. 마치 부모님이 그 세월 동안 인도에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한 것처럼, 난생 처음으로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155쪽)

둘만 남겨져 있으니, 그에게는 어느 때보다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보다는 아직도 누구에겐가 기대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삶으로부터 망명을 자처한 그였고, 누군가로부터의 기대나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집에서 그는 어떤 책임도 없었다. (188쪽)

이제야 부모님이 그동안 속에 담아두셨을 죄책감을 알 것 같았다. 그들의 부모님이 인도에서 돌아가셨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으셨을 때, 게다가 돌아가신 지 몇 주 혹은 몇 달 후 그곳에 가서 자식으로서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음을 느끼셧을 때의 기분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234쪽)

드레스를 기억 못하는 그를 탓할 일만도 아니었다. 11월이었고 토요일이었다는 것만 기억났다. 그런 날들은 이제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다. 연애할 때의 기억은 지금 기념해야 할 일들로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321쪽)

처음부터 부모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물어볼 필요도 없이 결혼을 해야 한다는 보장된 장래가 오히려 매력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한때 그에게 글리게 했던 친숙함이 이제는 오히려 그녀에게 장애가 되기 시작했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끔가다 그를 생각하면 어떤 패배감과 함께 그녀가 거부했던 종류의 삶, 그토록 잊으려고 애썼던 종류의 삶이 어쩔수 없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니킬은 그녀가 함께 있기를 굼꾸어왔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그랬던 적도 없었다. (323쪽)

그리고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를 생각했다. 둘은 싸우지도 않았고 섹스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확신이 없었다. 그는 모슈미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 걸까? 그녀가 불평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모슈미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뭔가 불만족스러워한다는 것을, 그리고 다른 곳에 신경이 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349쪽)

그러나 고골리를 형성한 것은, 결정적으로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이것들은 사전에 준비가 불가능한 일들이지만, 되돌아보려면, 돌아보며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이해하려면 평생이 걸리는 일들인 것이다. 일어나서는 안 될, 제자리를 벗어난 곳에서 잘못 일어난 일들이지만, 결국 끝까지 삶을 지배하는 동시에 삶을 견뎌낸 것들이었다. (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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