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친 책 빌린 책 내 책 윤택수 전집 2
윤택수 지음 / 디오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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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듯하게 쓰는 것과 사실대로 쓰는 것의 문제가 그 속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나는 늦게야 알았다. 나는 첫 글에서부터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거짓말만 쓰다가 죽을 것이었다. (19쪽)

감자의 둥긂, 쟁기의 버팀과 힘, 헛간의 으스름. 나는 그러한 산문을 쓰려고 한다. 감자와 쟁기와 헛간은 두런두런 지껄인다. 욕심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중략) 그래도 나는 내가 쓰는 산문이 실패한 이들에게 용기를 주면 좋겠다고, 혼자 생각으로 몸을 웅크린다. (25쪽)

텔레비전이 없는 대산 어머니들이 옛날 이야기를 해 주는 시절이었다. 그 시절은 가고 없다. 옛날이야기는 이제 [구비문학전집] 속에 엉성하게 모여 있을 뿐이다. 귀신들도 어디론가 황황히 사라져 버렸다. 귀신도 살지 못하는 땅에서 사람이 홀로 잘살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을 넘어서 논리적 파탄이다. 시끄러워. 텔레비전이나 켜 봐. (94쪽)

사물들은 제자리로 놓여 있어야 사물스럽다지만, 제자리에서 쫓겨 난 사물들이 불안하게 진동하면서 냄새를 뿜으면, 하나의 사물은 추억과 회한의 존재가 된다. 사물들은 냄새를 발언한다. (170쪽)

4월 어느 날 다가온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눈이 부셨고 곧 열등감에 휩싸였고 끝내 불쾌한 자의식에 사로잡혔다. 눈부심이 빗선이라면, 열등감은 밑선이고 자의식은 수직선. 그 모든 것을 나는 냄새로써 획득한 것이다. 냄새는 직각삼각형처럼 구체적이고 치명적이다. (173쪽)

콩깍지 속에는 콩알들이 가지런하게 실려 있다. 그놈들은 서로 닮았다. 활자로 비유한다면, 완두콩은 ‘게리몬드체‘처럼 말쑥하고, 제비콩은 ‘샘이깊은물체‘처럼 대범하며, 동부는 ‘명조체‘처럼 무르다. 콩꼬투리를 따고 소쿠리에 까서 밥에 얹어 익혀 먹는 모든 절차에서는 콩의 반투명한 냄새가 난다. (237쪽)

한 권의 책을 읽기 시작하여 마지막 문장의 위태로운 마침표에 이르는 길에는, 유혹도 많고 함정도 많다. 우리는 맹금처럼 외롭게.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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