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 듯 저물지 않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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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벌레. 즉, 서두(書蠹). 별명으로 서치(書癡), 반와(泮蛙), 공붓벌레가 있다. 점잖게는 독서가(讀書家)라고 불리고. 그들의 행위는 오직, 수불석권(手不釋卷), 과골삼천(踝骨三穿), 위편삼절(韋編三絶)이다. 그런데, 나는 그저 그들의 그 행위를 부러워하며, 소소하게 장서가(藏書家)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이다. 같은 애서가(愛書家)라는 것에 위안을 삼으면서.


 부러운 책벌레가 여기 또, 있다. 소설 안이다. 일본 소설의 한 인물, 미노루. 나이는 쉰. 부모님의 유산으로 풍족하게 살고 있다. 어른이지만, 아이인 듯 사는 그. 피터 팬 증후군(Peter Pan syndrome) 같기도 하다. 전담 세무사이며, 친구인 오타케에게 그의 일을 맡기고 그는 책의 세상에서 유유자적한다. 다만, 사진작가로 독일과 일본을 오가는 친누나 스즈메. 또 같이 살지 않는 딸인 하토. 이렇게 둘과는 핏줄로 이어진 실을 놓지 않고 있다. 오타케와도 친구의 끈을 놓지는 않았고. 아뿔싸, 미노루의 핏줄인 하토의 엄마이며, 미노루의 옛 연인인 나기사도 있다. 그녀는 미노루를 떠나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책벌레 미노루의 아이 같은 어른의 얼굴에 고개를 돌리고, 이제 다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거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나비.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당연히 그건 소설이고, 조니도 라우라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지. 세상 어딘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떻게 다르다는 것일까.' -286쪽.


 소설, 그리고 현실. 그렇다. 다른 듯 같다. 그 경계가 모호하다. '저물 듯 저물지 않는' 해의 얼굴 같다. 해 질 녘의 그 해. 서쪽 바다에 담기던 그 해. 낮과 밤의 교차하고 있는 그 때. 때로는 어지럽지만, 신비롭기까지 한 그 때. 소설과 현실이 그렇다.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처럼, 나비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나비이다. 또,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인 거다. 삶은 그런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저물 듯 저물지 않는'은 소설 안의 소설로 시작한다. 미스터리 소설이다. 책벌레인 미노루가 읽는 소설이다. 북유럽의 미스터리. 그리고 미노루가 나중에 읽는 다른 소설도 미스터리 소설이다. 카리브해 어느 섬의 미스터리. 그렇게 두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미노루. 그리고 그의 현실. 긴장감 있는 소설이 끊기면서 현실이 스며든다. 그렇게 서로 뜻밖에 잘 어우러졌다. 잔잔하면서도 파문(波紋)이 인다. 에쿠니 가오리만의 물결이다. 이제, 나도 책벌레 미노루가 되는 꿈으로 다시 들어간다. 무늬만 장서가인 내가 여유로운 독서가를 다시 상상한다.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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