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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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남자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가장 뜨거우면서도 가장 차가운 남자! 강자에게 차갑지만, 약자에는 따뜻한 그! 더 넓고, 더 크게 보고, 거친 듯하지만, 부드러운 사내! 낭만적이고, 냉정한 탐정! 바로, 사와자키의 새로운 이야기다. 그 새 무대가 올라왔다. 전설이 이어진 것이다. 무려 십사 년 만이라고 한다1오랜 기다림 끝에 감격스럽게 다가왔다. 그 무대의 이름은 《지금부터의 내일》2이다. 이 무대에서 사와자키는 새로운 공연을 멋지게 펼쳤고, 또다시 많은 관객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다. 레이먼드 챈들러를 동경하며 하드보일드3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하라 료(1946~). 그가 일본 하드보일드 소설의 역사라 불릴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다시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제 오십 대가 된 탐정 사와자키. 신주쿠의 뒷골목에 있는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에서 여전히 탐정으로 홀로 지키고 있다. 그런 그에게 한 의뢰인이 찾아왔다. 저축은행 '밀레니엄 파이낸스'의 신주쿠 지점자 모치즈키 고이치라 밝힌 그. 대출과 관련해서라고 말하며, 아카사카의 요정 '나리히라'의 여주인인 히라오카 시즈코의 신변 조사를 부탁한다. 그런데, 사와자키는 그녀가 이미 고인이라고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의뢰인에게 알리려 하지만, 연락이 안 된다. 그래서 은행에 찾아가는 사와자키. 그런데, 갑자기 복면 강도와 마주치게 되고.


 '오십 년 이상 살다 보면 놀랄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탐정 업무를 하는 탓에 죽음의 위험에 빈번히 노출되기도 하지만, 땅속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폭력이 상대라면 악담을 내뱉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에 들린 담배를 다시 들고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나는 아무래도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 -422~423쪽.


 '의무반고(義無反顧)4'라는 말이 있다. 의로운 일이라면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와자키가 그렇다. 칼에 베이고 화살에 맞아도 의로운 일이라면 조금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정말 위험하다. 의인은 고난이 많다고 하더니 역시다. '의에 살고 의에 죽는' 사와자키가 위험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영화, <영웅본색>(1986)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의 주윤발과 버금간다. 그렇지만, 주윤발은 이겨낸다. 그 힘은 호연지기(浩然之氣)5에서 비롯됐으리라. 사와자키도 그렇다. 호연지기로 승풍파랑(乘風破浪)6의 마음을 품고 이겨낸다.


험한 인생길이여, 험한 인생길이여!

수많은 갈림길에서 나는 지금 어디 있는가?

큰 바람을 타고 물결을 깨치며 나아가는 날이 반드시 오리니

구름 같은 돛을 곧장 펴고 드넓은 창해를 넘어가리라!

行路難 行路難
多岐路 今安在
長風破浪會有時
直掛雲帆濟滄海

-이백의 <행로난(行路難)> 중에서.

 사와자키도 이백과 같은 마음이리라. 험한 인생길에서 이렇게 다짐했으리라. 그렇게 지금도, 내일도 대장부가 되기로 하고 나아간다. 의식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맹자가 말한 그 대장부(大丈夫)!


 居天下之廣居   천하의 가장 넓은 곳에 살며

立天下之正位   천하의 가장 바른 곳에 서고

行天下之大道   천하의 가장 큰 도를 행한다.

得志與民由之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하고

不得志獨行其道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행한다.

富貴不能淫      부귀도 나를 타락시킬 수 없고

貧賤不能移      빈천도 나를 움직일 수 없고

威武不能屈      위세나 무력도 나를 꺾을 수 없다.

此之謂大丈夫   이런 사람을 일컬어 대장부라 한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의 하편 중에서.

      

 이렇게 사와자키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 지금부터의 내일에 걸어야 할 길은 대장부의 길인 것이다.

 책, 《지금부터의 내일》은 역시, 사와자키의 매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의 대사와 행동에 그의 향이 진하게 묻어난다. 그리웠던 그 향! 잘 음미했다. 그나저나 사와자키 탐정! 내일은 건강을 위해서 정말 금연해야 할 텐데.


 


 

  1. 일본에서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가 2004년에 출간되었고, 《지금부터의 내일》이 2018년에 출간되었으니, 14년 만이다.
  2. 하라 료, 《지금부터의 내일》, 문승준 옮김, 비채, 2021.
  3. 1920년대부터 미국 문학에 나타난 창작 태도. 현실의 냉혹하고 비정한 일을 감상에 빠지지 않고 간결한 문체로 묘사하는 수법이다. 헤밍웨이의 <살인자>를 비롯한 초기 작품이 있으며, 주로 탐정 소설에 영향을 끼쳤다.
  4. 한나라 사마상여의 《유파촉격(喩巴蜀檄)》에 의불반고(義不反顧)라는 표현이 있다.
  5. 1.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원기. ≪맹자≫ <공손추(公孫丑)>의 상편에 나오는 말이다.
    2. 거침없이 넓고 큰 기개.
  6. 먼 곳까지 불어 가는 바람을 타고 끝없는 바다의 파도를 헤치고 배를 달린다는 뜻으로, 원대한 뜻이 있음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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