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 '황성(城) 옛터'라는 노래를 들었었다. 폐허가 된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滿月臺). 그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쓸쓸한 감회(懷)를 그린 노래였다. 1928년에 나왔다는 이 노래. 일제강점기였던 그때, 조선 망국의 한(恨)도 스민 노래였다. 폐허, 슬픔과 아픔이 묻어 있는 곳이다. 나는 개성의 무너진 만월대를 걸은 적은 없지만, 재개발을 앞둔 마을을 걸은 적은 있다. 어릴 적, 친구들과 뛰던 그 골목들. 재개발을 반대하는 절규들이 곳곳에 물들어 있던 곳. 설운 회포들이 담긴 곳. 나는 그런 잔해들을 순례하며, 우울을 만났다. 그리고 여기, 파멸의 잔해를 여행하는 이가 또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한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던 1992년 8월, 다소 방대한 작업을 끝낸 뒤 나는 내 안에 번져가던 공허감에서 벗어나고자 영국 동부의 써픽주(州)로 도보여행을 떠났다.'-20쪽.


 소설에서 말하는 이는 여행을 떠났다. 공허감에서 벗어나고자. 떠났다. 그런데, 결국 마비된 상태로 입원하게 된다. 노퍽 지방의 주도(州都)인 노리치의 병원에. 일 년 만에. 그리고 글을 쓴다.


 '폐허에 가까이 갈수록 망자들의 신비로운 섬에 와 있다는 생각은 점점 사라졌고, 그 대신 미래의 어떤 대재앙으로 파멸한 우리 자신의 문명의 잔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사회의 본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가 남겨놓은 금속과 기계의 쓰레기더미 사이를 돌아다니는 미래의 이방인처럼 나 또한 도대체 어떤 존재들이 여기서 살고 일했는지 (…) 이해할 수 없었다.' -278쪽.


 여행을 떠났던 그. 정처 없이 다닐다가, 미로에 길을 잃기도 한다. 파멸한 문명의 잔해를 만나는 그. 전쟁과 침략의 광기. 그 욕망의 광기. 그 광기가 그런 상처를 남겼다. 희생자들의 아픔을 뚜렷이 그린 그. 제국주의로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는 그 대재앙의 깊은 아픔을 안다.


 '때때로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사는 데 결코 적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고, 삶이란 끝없이 진행되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실수라는 생각이 듭니다.'-259쪽.


 우울. 폐허에서 어두운 우울을 만나고 아파한다.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진다. 그 날카로움으로 난 상처가 아리다. 그래도 그 안에 무딤도 있다. 끝없이 진행되는 실수인 삶. 영원히 이어지는 실수의 삶. 그렇게 실수와 함께 소생하는 삶. 그 안에서 새롭게 탈바꿈하며, 우울을 벗어나야 한다. 파괴는 고통이다. 그리고, 고통을 넘어서 무너진 것을 다시 세워야 하리라. 힌두교의 신 시바가 파괴자인 동시에 변형과 재건까지도 책임지는 복합적인 존재인 것처럼.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모든 강은 하늘에서 내려왔으리라. 하늘에서 내린 빗방울이 모이고 모인 강. 그 강은 유연함으로 길을 이룬다. 강은 파멸하면서도 끝없이 재생한다. 부드러움과 힘참, 감미로운 빛과 은밀한 향. 우렁찬 함성과 소리 없는 노래. 그것이 함께 어우러진 강. 삶과 죽음이 소용돌이치는 강. 제발트의 소설 '토성의 고리'도 마치 강 같다. 사실과 허구가 모호하게 어울린다. 여러 사진으로 사실성을 부여하지만 결국은 허구인 소설이다. 꿈과 현실이 강처럼 그 경계에 있는 제발트의 낯선 소설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이도 제발트인지 아닌지 모호하기도 하고. 그리고 강처럼 하늘 같이 높은 사유가 모여 흐름이 된다. 그렇게 매우 독특하게 다가온다. 유연하게 의식의 길을 이룬다. 또 어렵게 다가온다. 그래도 설명할 수 없는 큰 위안을 받게 된다. 그저 계절의 바뀜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이는 말.


 하나. 소설 '토성의 고리'는 제발트가 남긴 네 소설 가운데 세 번째 소설이다.

 둘. 제발트 문학에 열광하는 독자들을 제발디언(Sebaldian)이라고 한다고 한다.

 셋. 토성의 고리는 토성의 달이었던 것이 행성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여 그 기조력으로 파괴된 결과 남게 된 파편들인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