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 <도마뱀에 물린 아이>. (사진 출처: 흐름출판 네이버 포스트)
'예술은 삶의 한계 속에서 어떤 자유를 느끼게 하고, 그 자유 이상의 책임을 떠올려주며, 이런 책임 속에서 다시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지를 절감케 한다. 자유와 책임 중 하나라도 누락된다면, 예술은 미망에 불과하다.
(……)
삶의 변화는 내가 꿈꾸면서 다른 사람의 꿈을 깨울 수 있을 때 비로소 일어난다. 우리는 예술 속에서 다시 꿈꾸고 선택하며 새롭게 깨어나 행동하게 된다. (……) 예술은 설렘과 아쉬움의 교차 경험이다. 이는 우리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잠시 돌아보게 한다.' -'프롤로그' 중에서. (28~29쪽)
'예술의 경험은 우리의 세계가 그리 좁은 것이 아니라는 것, (……) 깨우쳐준다.
예술이 아름다운 것은 예술 자체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경험에서 오는 감각의 쇄신 때문이다. 감각의 쇄신은 삶의 쇄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넓고 깊은 삶의 지평을 떠올리게 하지 못한다면, 예술은 쓸모없을지도 모른다. (……) 이 지평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다른 가능성, 다른 삶의 형성 가능성이야말로 곧 예술의 가능성이고 아름다움의 가능성이다. 다르게 살 수 없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의 배반이다. 심미적 경험이 삶의 변형에 이어지지 못한다면,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 -서문 '삶의 심미적 조형' 중에서. (11~12쪽)
르누아르, 렘브란트, 드가, 마네, 피카소, 최북, 추사(김정희), 브람스, 슈만, 김수영, 백석, 황인숙, 카프카, 포스터, 국립중앙박물관, 도산서원 등. 강의에 소환된 예술의 혼이다. 그 혼들의 예술. 삶의 한계 속에서 자유와 책임을 떠오르게 한다. 또, 예술은 삶의 변화를 준다. 나는 예술을 만나서 그리움, 눈물, 상상, 감동을 경험했다. 이 경험이 내 다른 삶의 형성 가능성을 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랬다. 풍성한 삶. 그것은 예술이 바탕이었다.
'삶의 자발적 구성, 바로 여기에 미학 수업의 목표가 있다.' -서문 '삶의 심미적 조형' 중에서. (13쪽)
우리 옛 선비들이 갖춰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심미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심미안으로 예술을 했고, 또 예술을 감상했다. 시, 서, 화 등. 그 안의 아름다움과 그 짝인 끔찍함을 포용하며. 그들의 삶을 구성해 나아갔다. 자발적으로. 그렇게 품격 있는 삶을 이루어 나아갔다. 이 마흔여섯 강의를 이어온 목소리도 말한다. 예술로 삶을 자발적으로 구성하라고.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옛 선비의 예술로 이루어진 삶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살리라 다짐했다. 선비로서의 자유와 책임을 느끼며.
그림, 음악, 소설과 시, 조각과 건축 등. 그 예술과 요즘 가까이 하지 못했다. 그저 정지해 있었다. 바쁨과 피곤을 핑계로. 그 좋았던 기억이 있었음에도. 예술은 가까이하면 할수록 더욱 나에게 크게 다가올 텐데. 예술의 아름다움. 그 영원한 기쁨과 함께 할 텐데. 예술이여. 나의 삶과 함께 하자.
깊은 사유로 '미학 수업'이라는 예술 강의를 담았고, 그 강의에 경청했다. 잘 준비된 강의였다. 매 강의마다 빛나는 통찰이 있었다. 그의 높은 뜻이 나의 '영혼을 섬세하게 조율'해주는 책이었다.
덧붙이는 말.
이 책은 2011년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영혼의 조율'을 새롭게 가다듬고 수정하여 편집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