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추락한 이유
데니스 루헤인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람이 있었다. 대체로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는 그 사람. 그 사람을 오랫동안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서서히 다가갔다. 더 좋아지고 싶어서. 그런데, 무반응. 그래서, 결심하고 확인했다. 마음이 악보처럼 접히지 않는다고. 마음을 서로 맺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큰 용기였다. 다음 날, 나에게 온 답은 거절이었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마음이 아팠고, 이어서 몸도 아팠다. 지금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않았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다시 시작되는 아픔. 비록 외사랑이었지만, 깊은 사랑이었기에 그런 듯. 이제 잊도록 해야 하겠지. 어떻게 놓아주어야 할지 몰라 볼 때마다 멀리하게 된다. 얼마 후면 보기 어려울 수도 있는 그 사람. 슬픈 마지막 인사를 준비하고 있다. 모질지 못한 나는 좋은 말만 하겠지. 눈물이 앞을 가리어 보이지 않아도. 사랑했지만, 보내주어야만 하는 나. 또 다른 슬픈 사랑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공명(共鳴)했다.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5월의 어느 화요일, 레이철은 남편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7쪽.


 '이틀 전, 만약 누군가 그녀더러 남편을 사랑하냐고 물었다면 그녀는 "그럼."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사실, 누군가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던 순간 같은 질문을 했다면 그녀는 "그럼."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9쪽.


 사랑하지만, 남편에게 죽음을 선물한 여인, 레이철. 어쩌다가 그랬는지. 그녀는 아버지와 헤어져 어머니와 살았다. 유명 작가이지만, 독단적인 어머니, 엘리자베스 차일즈와 함께. 어머니와 어긋나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산 레이철. 그녀가 대학생 때, 어머니는 교통 사고로 생명을 잃는다. 이제, 유산을 받은 레이철은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아는 건, '제임스'라는 이름. 대학에서 가르쳤다는 사실. 또, 그녀가 본 마지막 뒷모습. 사설 조사원 브라이언 델라크루아에게 도움을 받고자 하지만, 받은 건 충고와 거절. 아버지는 과연 어디에. 그리고 몇 년 후, 레이철은 유능한 기자가 된다. 그녀의 이름을 듣고 찾아온 사람으로부터 아버지의 실마리를 찾고. 결국 제러미 제임스라는 사람을 찾는다. 그런데, 그는 친부가 아니었다. 기자인 레이철. 특파원이 되어 7.0의 지진이 난 아이티로 향하고. 그곳의 참상. 그리고 강간, 죽음. 아픔의 소녀들을 보고 공황 발작을 일으킨다. 생방송에서. 유튜브로 널리 퍼진 영상. 그녀는 이혼과 해고를 당하고야 만다. 세바스찬과 이혼. 기자직에서 해고. 그리고 공황 발작과 대인공포증이 거칠게 찾아오고. 그런데, 우연히 브라이언을 다시 만나고. 그의 사랑으로 공황 발작과 대인공포증이 잠잠하게 된다. 그렇게 브라이언과 2년 동안 사랑의 힘을 느낄 때였다. 레이철이 그가 없어야 할 곳에서 브라이언을 본다. 이 남자, 뭔가 수상하다. 그의 비밀은 뭘까.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ㅡ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ㅡ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1925), 진달래꽃, 매문사, 190-191.


 이별의 정한(情恨).1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라는 체념도 아니고, '나 보기가 역겨워' 떠나는 님도 아니지만, 레이철은 남편 브라이언과 스스로 이별한다.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라는 사랑. 님의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는 이별의 슬픔을 축복으로 승화시키는 비애. 또, 그 아픔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는 인고(忍苦). 사랑, 비애. 인고는 시 '진달래꽃'과 이어진다. 그 울림이 어울린다.


 '이게 어떻게 끝날진 모르겠어. 내 진짜 위치를 모르겠어. 그녀는 어둠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받은 유일한 답은 더 깊은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위층에는 빛이 있을지도 모르고 다시 밖으로 나가면 분명 빛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운명의 장난으로 빛이 없다면, 세상에 남는 것이 밤뿐이고 빠져나갈 길이 없다면?
 그렇다면 그녀는 밤과 친구가 될 것이다.' -495쪽.


 레이철과 브라이언. 그들이 추락한 이유는 사랑의 어둠 때문이었을 것이다. 레이철로 인한 브라이언의 죽음. 서로 사랑했지만 생사의 강으로 이별했다. 그래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2 날개가 있기 때문에 날고 날기 때문에 추락할 수 있는 것이다. 레이첼과 브라이언은 사랑했기에 날았고, 또 사랑했기에 추락했다. 사랑이 날개였다. 이제 레이철은 사랑하기에 다시 날 것이다. 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그녀이기에.


 몇 년 전, 우연히, '셔터 아일랜드(Shutter Island, 2010)'라는 영화를 보았다. 굉장했다. 그리고, 그 원작이 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데니스 루헤인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이 '우리가 추락한 이유'도 그의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다른 듯하다가 역시 그였다. 힘차면서도 섬세한 심리 묘사의 손. 달의 뒷면까지 비추는 듯한 그의 냉철한 눈. 잘 어우러져 있다. 차분히 이어지던 이야기가 급류를 만난 듯 몰아치고. 그와 함께 발자국을 남기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이다. 사기꾼, 살인, 탐욕, 복수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AP)'라는 평. 정말 적절하다. 내 사랑의 아픔에도 깊은 위로를 받았다. 아, 갑자기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이 듣고 싶어진다. 이 작품을 되뇌며, 내 사랑을 보내며, 듣고 싶어진다.       

     


 

  1. 시 '진달래꽃'의 해설은 두산백과 참조.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4767&cid=40942&categoryId=32868 )
  2. 이문열의 소설 이름이다. 또 이 소설이 원작인 동명의 영화도 있다. 이 이름은 잉게보르크 바하만(Ingeborg Bachmann)의 시집 제목이자 시구에서 차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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