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

 

 

 

거울 속의 몬스터 죽이기!

 

 

<올드보이>는 필자의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거울 속의 몬스터 같은 작품이다. 그래서 복수를 테마로 한 그 어떤 작품들보다 전복적이고 이율배반적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올드보이>가 일본의 동명 원작 만화를 모티브로 했다지만 애드가 앨런 포우의 단편 소설 '윌리엄 윌슨'과 더 닮아 있는 듯하다.

이쯤에서 미리 경고한다! 리뷰에서 반전에 관한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을 것이지만 필자도 모르게 암호나 힌트가 나갈 수 있으니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이 글을 읽지 않기를 당부한다. <올드보이>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적게 알고 볼 수록 충격의 파장이 커지는 영화이므로!!

우선 애드가 앨런 포우의 '윌리엄 윌슨'을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소설에 대해 간략히 설명부터 하자면 윌리엄 윌슨이라는 가명(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가명을 쓴다. 이는 곧 <올드보이> 속에서 주인공 오대수가 자신을 몬스터로 지칭하는 것과 흡사하다)의 주인공이 자신과 이름이 같고 얼굴도 거의 흡사한 인물과 조우하게 되고 그로 인해 끝없는 혼란과 자아 분열을 겪게 되다가 마침내 증오와 복수로 점철된 파국을 맞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바로 자신의 대칭과도 같은 인물과의 조우이다. <올드보이>에서 주인공 오대수는 술에 취해 경찰서에서 작은 난동을 부리는 등 남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하지만 그의 친구가 잠시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거는 사이 그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하게 된다. 그것이 15년 간의 감금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는 15년 간의 길고 지루한 시간을 버텨낸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그랬듯, 오로지 자신의 인생을 조롱하고 파멸시킨 자에 대한 복수의 일념 하나로 이를 갈며 버텨낸다. 15년 후 풀려난 오대수는 자신을 가둔 청년 실업가 이우진의 정체를 추적하며 어째서 그가 자신을 15년 동안 가두었는지를 알아내고자 한다. 영화는 바로 이 '누가', '왜'에 관한 긴박한 퍼즐게임이다. 라스트에 가서야 오대수는 자신이 그토록 복수하고자 한 이우진이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대칭점 상에 놓인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전 영화의 특성상 이쯤에서 '세 치 혀'를 더 이상 놀릴 수 없겠다. 그래서 '윌리엄 윌슨'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하고자 한다.

'윌리엄 윌슨'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을 손바닥 안에 놓고 조롱하듯 간섭하고 좌지우지 하는 대칭의 인물에게 마침내 분노어린 응징을 가한다. 그 순간 그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과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혼란스럽게 바라보며 혼돈에 빠진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 속의 몬스터를 죽이고자 했지만 사실 거울 속의 몬스터를 죽이는 일은 거울 밖의 자신을 죽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비틀린 복수의 알고리즘은 결국 자신의 목줄을 조이게 만드는 이율배반으로 전복되고 만 것이다.

<올드보이>의 라스트에서 오대수와 이우진은 거울 속의 상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누가 진짜 '윌리엄 윌슨'(혹은 몬스터) 인지를 모호하게 함과 동시에 이제까지의 알고리즘을 허물어버린다. 또 오대수는 유리창이나 과거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자아와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 때마다 오대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인생을 통째로 복습할 시간이다'라고 말한 이우진의 말처럼 그는 거울의 표면을 구석구석 면밀히 닦으며 자신의 상을 분명하게 확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깨뜨려 버리고자 고뇌한다. 결국 <올드보이>는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돌아보고 면밀히 살피며 대칭점에 있는 거울 속의 자신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 지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자신의 얼굴 조차 잊고 사는 오늘날 현대인들 모두에게 감독은 작은 티끌 하나도 상세히 보이는 커다란 거울을 들이대는 것이다. '바윗돌이건 모래알이건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라고 말하는 이우진의 말은 감독이 관객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날카로운 비수이다. 이 영화의 엄청난 반전은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입김을 불어서라도 거울을 흐리멍덩하게 만들고자 하게 한다.

사실 '윌리엄 윌슨'은 포우의 워낙 유명한 단편 소설 중 하나라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미 읽어 봤으리라 짐작한다. 분명히 말해두고 싶은 것은 '윌리엄 윌슨'이 <올드보이>와 표면적으로 비슷한 스토리를 가졌거나 결말이 유사하다라는 것은 결코, 전혀 아니다. 이야기 속에 담긴 내적인 이미지가 닮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적인 닮음은 포우의 또다른 단편 소설 '아몬틸라도 술통'과도 연관이 있다. 이 소설에서 복수에 대한 정의를 내리길, '복수는 벌로 다스린 이에게 보복이 온다면 진정한 복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벌을 저지른 자가 자신이 처벌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역시 진정한 복수라고 말 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진정한 복수자는 자신이 복수한 것에 대해 어떤 응징도 받지 않아야 하며, 처벌을 받는 이는 그 자신이 지금 벌을 내리는 자로부터 복수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자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성립되어야만 진정한 복수의 완성이라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속 최후의 복수자의 심리를 절묘하게 대변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전체적으로 <올드보이>는 박찬욱 감독의 최고 걸작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대중성과 작가주의를 절묘하게 오가며 색다른 스타일과 박력으로 관객들의 혼을 뒤흔든다. 특히 영화의 중반부 최민식이 장도리를 들고 싸우는 복도 액션씬의 박력과 리얼함은 한국 영화사상 유례가 없을 명 액션 씬으로 꼽힐 것이다.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올 반전은 충격적이다 못해 장도리로 심장을 후벼파는 것만큼 전율적이다. (정말 세다 못해 지독하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혀를 내두르게 한다) 최민식의 연기는 <파이란>에서 그가 보여준 신의 경지에 오른 연기력을 다시 한번 입증함에 손색이 없다. 유지태와 강혜정의 연기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감독의 완벽한 연출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다만 아주 개인적인 견해 하나를 말하자면 극단을 달리는 이런 식의 설정, 이런 식의 분위기는 필자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듯한 우울하고 찝찝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올드보이>는 올해 <살인의 추억>과 함께 가장 잘 만들어진 한국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살인의 추억>이 그러했듯, <올드보이>도 상업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근래 보기 드문 한국 영화 수작이다.

끝으로 계속해서 이 영화와 비교한 포우의 소설 '윌리엄 윌슨'의 도입부 문장을 올리며 리뷰를 마칠까 한다. <올드보이>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극중 오대수의 심정을 이해함에 있어 더 없이 좋은 문장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우선 내 이름을 윌리엄 윌슨이라고 해 두자. 내 앞에 놓인 이 흰 종이를 나의 본명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다. 이 이름은 이미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 경멸과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분노의 폭풍이 불어 그 유례 없는 오명이 지구 끝까지 닿았다. 아, 모든 사람들이 저버린 추방자! 대지조차 너를 영원히 저버렸느냐? 대지의 명예와 대지에서 피어오르는 꽃들과 눈부신 대기도 너를 저버렸느냐? 짙게 드리워진 끝없는 구름이 너의 희망과 천국 사이에 영원히 걸려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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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쿠엔틴 타란티노

주연 : 우마서먼, 루시리우, 데이비드 캐러딘, 쿠리야먀 치아키

 

 

타란티노의 펄프픽션 속으로 들어간 사무라이 잔혹미학

 

 

 

<킬빌>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네 번째 연출작이자 그가 <재키 브라운> 이후 6년 만에 내놓는 신작이다. 그런 만큼 그의 '헤모글로빈의 시'를 기다려 온 많은 팬들로부터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관심과 비평의 중심에 놓이게 될 작품이다.

필자 역시 쿠엔틴 타란티노의 B급 액션에 녹아 있는 폭력미학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또 개인적으로 공포영화 마니아라 피가 난무하는 잔혹한 영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쓸데없이 스토리가 복잡한 영화는 싫어하는 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킬빌>은 제작 과정에서 부터 필자의 눈을 사로잡았던 영화였다. <킬빌>은 복수라는 가장 간단명료하면서도 매혹적인 테마로 장장 3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피와 광기로 물들인다.



조직을 떠난 킬러, 브라이드는 결혼식 날 조직의 보스 빌로부터 피의 응징을 당한다. 그리고 4 년 뒤 그녀는 복수의 화신이 되어서 자신의 인생을 파멸시킨 다섯 명의 인물들을 차례차례 제거해 나간다. 이 간단한 스토리에 타란티노는 자신의 주 특기인 B급 액션 영화의 모든 매력들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킬빌> 1부에서는 타란티노가 일본 사무라이 영화에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청엽옥 결투에서 일본 사무라이 영화가 가진 칼 끝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매력과 비장함, 그리고 사지절단의 잔인함을 모두 보여준다. 그는 사무라이 영화에 매혹당했던 무명 시절의 기억들을 폭력과 블랙 유머의 펄프픽션으로 포장해 과도한 액션의 연속에서 분출되는 흥분과 쾌락으로 승부수를 띄운다.



분명히 극과 극으로 찬반이 갈릴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오마주니, 짜집기니를 운운하기 전에 철저히 관객의 입장에서 보다 가시적인 평가를 하고 싶다. 예전부터 타란티노의 가장 큰 특기 중 하나는 장르와 관습을 해체하고 재조립해서 전혀 다른 색깔, 다른 디자인을 만들어버리는 솜씨라고 생각했다. <저수지의 개들>과 <펄프픽션>에서 그는 시간의 재조립을 통해 내러티브의 파괴를 시도했고 수 십년 동안 내려오던 장르적 고정 관념을 깨버렸다. <킬빌>에서 그는 사무라이 영화에 대해 간직하고 있던 열정들을 미국 웨스턴 무비의 내러티브 속에 중화시켜 국적불명의 독특한 액션영화를 재창조한다. 그 결과 적어도 관객의 눈을 지루하지 않게 할 폭발적인 애너지의 오락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게다가 개성강한 개릭터들이 뿜어내는 카리스마의 향연과 사건의 근원에 대한 감추어진 사연들은 유쾌한 보너스다.

이번 영화에는 그의 예전 작품들에 있었던 대중 문화에 대한 블랙 코미디적인 철학은 없다. 그저 한 여인의 복수에 관한 잔혹한 이야기만 있다. 복수는 강렬하면서도 단순해야 한다. <킬빌>은 바로 그러하다. 청엽옥에서의 결투가 그러하고 고고와의 대결이 그러하며 오렌 이시이와의 진검승부가 그러하다. 타란티노는 그 위에다 추억의 명곡들을 향수처럼 깔아놓아 잔혹한 폭력 뒤에 쉬어갈 수 있는 긴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그는 역시 장르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탁월한 역량가임에 틀림없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러닝타임이 좀 길다는 것이다. 너무 길어서 반으로 자른 것이 1시간 50분인데, 사실 오락 영화로서는 좀 긴 러닝타임이 아닌가 싶다. 시종일관 즐거워야 할 영화임에도 액션과 액션의 공백이 다소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액션의 임펙트가 너무 강한것에 대한 반작용인 듯 싶다. 약 15분 정도 짧았더라면 더욱 타이트한 오락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시각적 즐거움을 표방하고 나선 영화라면 액션의 반복에서 오는 지루함을 피해가기 위해서라도 러닝타임을 최대한 짧게 해야 치고 빠지는 효과를 크게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킬빌>은 오락 영화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는 관객들이라면 필견의 가치가 있는 영화다. 우마 서먼이 노란 추리닝을 입고 사무라이 검을 휘두르며 적들을 사지절단하는 일당백의 결투씬과 라스트 루시 리우와의 눈밭에서의 진검승부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지나친 폭력이나 단순한 오락영화에 거부반응을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장르적 특성을 훤히 꿰뚫고 자유자재로 변형시켜 폭력미학으로 승화시킬줄 아는 타란티노의 네 번째 펄프픽션과 조우해 보기를 권한다.

 

살인교수 | 200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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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워쇼스키 형제

주연 :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쉬번, 캐리 앤 모스

 

뺏을 수는 없으나, 받을 수는 있는 것!

 

 

영화 역사를 다시 쓰게 한 충격의 사건, <매트릭스>는 천문학적인 상업적 흥행과 함께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매트릭스 추종자'들을 만들어냈다. 워쇼스키 형제 감독은 1편의 거대한 성공으로 제작사로 부터 2편과 3편을 동시에 찍을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얻어낸다. 그리고 그들은 <매트릭스2 : 리로디드>를 거쳐 마침내 거대한 디지털 서사시의 종지부인 <매트릭스3 : 레볼루션>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매트릭스 추종자'들은 의문으로 가득했던 <매트릭스2 : 리로디드>의 속시원한 해답을 <매트릭스3 : 레볼루션>에서 찾고자 마지막 빨간 알약을 먹고 네오와 함께 매트릭스에 최후의 접속을 한다.

말그대로 <매트릭스> 1편의 기술적, 철학적, 작품적인 완성도는 속편에 대한 팬들의 기대치를 끝 간데 없이 높여 놓았고 그로 인해 시리즈의 완결편인 <매트릭스3 : 레볼루션>에 거는 팬들의 기대는 거의 무한대에 이르렀다. 이제 상상의 극치를 영상화한다고 해도 관객들은 그 이상을 기대하게 되 버렸다. 감독으로선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고 기다리는 팬들로선 엄청난 불안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부담과 불안을 안고 전세계 동시 개봉이라는 유례없는 방법으로 매트릭스 시리즈의 완결편이 개봉되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결말' 이라는 근사한 카피로 완결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 <매트릭스3 : 레볼루션>는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수많은 추종자들의 선택을 받게 될 운명에 있다.

필자도 그 추종자들 중 한 명이었고 오늘 그 디지털 성서의 완결을 감상했다. 이제부터 지구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던 <매트릭스>의 최후의 이야기에 대한 간략한 생각을 말하고자 한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으니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읽기를 멈추시길~!

우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매트릭스3 : 레볼루션>은 필자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한 영화였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필자의 기대치가 너무나도 높았다는 것이다. 시리즈의 한 편이 아닌 독립된 SF영화의 한 편으로 본다면 <매트릭스3 : 레볼루션>는 더할 나위 없이 통쾌하고 장엄한 액션 대작으로 손색이 없음을 분명히 말해둔다.

하지만 대다수의 매트릭스 추종자들이 그러하듯 필자 역시 과도한 기대감을 갖고 영화를 감상했으니 어느 정도 실망과 당혹감은 감출 수 없었다. 물론 충분히 각오한 일이지만. (관객들을 네오로 만들어버려 스크린 속의 스미스 요원이 튀어나오게 만들지 않는 이상 끝 간데 없는 기대치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

<매트릭스3 : 레볼루션>에서는 전체적으로 '사랑과 희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매트릭스2 : 리로디드>에서 수없이 재기되었던 많은 의문점들은 이 '사랑과 희생'이라는 숭고한 정신 속에 묻혀버려 결국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오라클은 시종일관 '그건 이미 네가 알고 있어' 혹은 '그건 나도 몰라. 네가 선택해야 할 문제야'라는 다소 김빠지는 대답만을 던진다. 2편에서 매트릭스 설계자에 의해 자신이 한낱 시스템의 통제자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비밀을 듣게 되는 네오였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3편에서는 'The One'보다 더 위대한 존재로 부각된다. 또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던 스미스에 대한 비밀도 풀리지만 특별히 기막힌 비밀 같은 것은 없다. 네오의 대칭점, 다르게 해석하자면 네오와 함께 서로를 견재하며 능력을 상승시키는 동반자 같은 존재다. 마치 '드래곤 볼'의 손오공과 베지터처럼.(물론 스미스는 베지터 보다 더 사악하지만...!)

감독은 정말로 멋지고 기발하며 센세이션할 만한 그러한 결말은 처음부터 없었나 보다. 굉장히 무난하고 평화적인 라스트를 선택하며 안정적인 결말을 그려낸다. 그로인해 인간미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던 무자비한 기계조직, 현실과 너무나 비슷한 매트릭스라는 가상공간, 또 시온이라는 구시대적인 현실공간, 그리고 전쟁과 구원자라는 복잡하고 현학적인 관념들이 해피한 앤딩을 위해 밋밋하게 마무리되어 버린다. 그것은 각각의 존재성에 대한 경계마저 모호하게 만들어 버려 명쾌한 해답을 기다리던 관객들에겐 미지근한 인상만을 안겨다 준다. 결국 한 시대를(매트릭스 안에서 혹은 현실 세계에서) 살다간 영웅들의 이야기는 기나긴 세월(매트릭스 혹은 현실의)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역사로 남을 뿐 위험과 악몽, 사랑과 희생, 전쟁과 평화는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결말인 것이다.

어쩌면 <매트릭스> 1편의 결말이 '감히 상상할 수없는 결말'이었던지 모른다. 네오가 총알을 피하고, 죽었다가 살아나고, 도저히 대적할 수 없었던 스미스 요원을 한방에 날려버리며 엄청난 기계조직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벅찬 라스트, 그것이 정말로 멋지고 기발하고 센세이션한 결말이 아니던가. 필자의 개인적 생각은, 감독은 처음부터 매트릭스 시리즈를 3부작으로 기획했었다지만 어쩐지 거짓말같다. 1편으로 끝날 것을 억지로 2, 3편으로 늘였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매트릭스> 1편은 감독이 평생동안 만들고 싶었던 숙원의 기획작품이었을 테다. 그 벅찬 라스트의 뒷 이야기에 대한 에피소드들은 막연하게 머릿속으로만 그려두었을 것이다. 그러했던 것을 1편의 성공에 고무되어(평생동안 준비해온 1편에 비해) 다소 기획력이 떨어지는 속편들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조금은 씁쓸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

김빠지는 소리를 많이 했지만 앞서 얘기했듯 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았던 탓이다. <매트릭스3 : 레볼루션>는 상당히 뛰어난 시각적 효과를 자랑하는, 여지껏 만들어진 최고의 블록버스트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1, 2편 처럼 늘어지는 철학 강의는 초반 20분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고 나머지 런닝 타임 동안 내내 긴박감 넘치는 액션 장면과 입이 딱 벌어지는 디지털 영상의 혁신을 보여준다. 특히 <인정사정 볼 것없다>의 라스트 씬을 연상케하는 네오와 스미스의 최후의 빗속 대결은 헐리웃 디지털 기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모든 매트릭스 시리즈의 액션 씬들을 잊게 할 만큼 장엄하다. 17분간의 액션 씬을 위해 4천만불이라는 제작비를 쏟아부었다고 하니 과연 슈퍼 버럴(Super Brawl)이라 불릴 만 했다. (그래도 1편의 총알 피하는 장면이 계속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개인적으로 클럽에서 메로빈지언이 말한 인상적인 한 마디가 <매트릭스3 : 레볼루션>를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큰 키워드가 아닌 가 싶다. '뺏을 수는 없으나, 받을 수는 있는 것' 그는 그것을 원했다. 오라클의 눈이 상징하는 것은 트리니티를 위해 희생되는 네오의 눈이자 시온 국민들의 헌신적인 힘이자 모피어스와 니오베의 믿음일 것이다. 또 트리니티와 네오의 사랑이며 네오의 메시아적인 희생일 것이다. 결국 그 모든 것은 초반에 중간계 지하철 역에서 한 남자가 말한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한 숭고한 의미로 와닿게 된다.

<매트릭스3 : 레볼루션>이 타 시리즈에 비해 휴머니티와 드라마적 감수성이 유독 짙게 배어 있는 이유가 바로 '뺏을 수는 없으나, 받을 수는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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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 끝까지 짜릿하게, 마니아들이 열광할만한 호러 수작!

 

프랑스 개봉 당시에는 4만 5천명이 관람 후 실어 증세를 보였다고 하니 <엑스텐션>은 <스크림>, <링>, <식스 센스> 이 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무수한 아류작들과는 분명 다른 뭔가가 있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25세의 천재 감독 알렉산드르 아야 감독은 몸서리치게 미칠 만큼 무서운 영화를 만들어 보고자는 결심 하에 <엑스텐션>을 만들었다고 한다. 감독의 그러한 의지가 영화 전면에 걸쳐 확실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숨돌릴 틈 없이 위력적인 공포를 선사한다. 그 공포의 강도는 이제껏 호러 마니아들에게 걸작으로 추앙받는 <텍사스 살인마>, <서스페리아>, <매니악> 등의 충격에 버금간다. 때문에 포스터 카피를 화려하게 장식한 '목구멍 끝까지 짜릿한, 샤우팅 스릴러''전 세계 호러홀릭을 열광케 한 센세이션'등은 실로 거짓이 아니다. 이 영화는 점잔을 빼며 숨기려는 심리 스릴러나 혹은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팝콘 호러의 면모를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시종 일관 극단의 수위를 넘나드는 공포의 진면목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바로 이 '확실하게 보여준다'에서 호러 마니아들의 찬사를 자아낸 것이다.(개인적으로 3대 공포영화 <버닝>, <13일의 금요일>, <공포의 여대생 기숙사> 이 후 이렇게 가슴을 흥분시키는 슬래셔 무비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영화의 시작은 영화의 끝과 맞물려있다. 악몽같이 몽롱한 기억의 조각 위로 소녀의 독백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곧 영화는 두 소녀를 태운 자가용이 도로를 시원스레 질주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이때 배경음악으로 Sara Perche Ti Amo가 경쾌하게 흘러나온다. (사실 이 노래는 감독이 교묘하게 숨겨놓은 반전의 복선이지만 그것을 눈치채는 관객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알렉스의 집을 방문한 메리는 그날 밤 알렉스의 일가족이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잔혹하게 살해되는 광경을 목격한다. 살인마는 알렉스의 손발과 입을 묶은 후 어딘가로 데려가고 메리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살인마의 뒤를 쫓는다. 숨막히는 접전 끝에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게 되는 메리와 알렉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두 소녀와 살인마, 그들이 간직한 엄청난 비밀이 그들을 믿을 수 없는 끔찍한 공포의 패닉상태로 몰아넣는다.

살인마가 알렉스의 가족들을 찾아내어 하나 하나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초반 살해 씬과 라스트의 충격적인 전기톱 살해 씬은 이 영화의 백미로 기억될 것이다. 자칫 평범하고 무디게 느껴질 수 있는 살해 장면을 감독은 가히 천재적인 연출력으로 기가 막히게 표현해낸다. 혀를 내두를만한 잔혹함은 물론, 심장을 도려 낼 듯한 자극적인 음향과 감각적인 미장센등의 효과로 정말로 눈앞에서 살인이 펼져지고 있는 듯한 가공할 공포를 만들어 냈다. 마니아들이라면 아낌없는 열광과 환호를 보낼 만큼 훌륭한 솜씨였다.

이 영화가 프랑스 언론으로부터 '영화 100년사 최고의 걸작 호러!'라는 찬사를 받은 데에는 비단 이러한 살해 장면에서 오는 센세이션 때문만은 아니다. 대다수의 슬래셔 무비가 간과하기 쉬운 허술한 스토리 라인을 <엑스텐션>은 정교하고 빼어난 시나리오로 뛰어넘는다. 이 영화는 정신없이 자행되는 잔인무도한 살인 행각 뒤에 숨겨진 뒤통수를 치는 반전으로 관객들의 넋을 빼놓는다. 그리고 그 반전으로 인해 이 영화는 하나의 퍼즐로 변해버린다. '과연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순간 이 영화는 가족 대학살극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로 전환한다. 감독은 슬래셔 무비의 컨벤션을 조롱하듯 전통적인 장르적 관습들을 끌어와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결국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마지막에 가서 터뜨린다. 그리고 영화는 재해석된다.(결국 이 영화는 <데드 캠프>처럼 단순히 '살인마로부터 살아남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각설하고 <엑스텐션>은 진정한 호러 마니아들이라면 목구멍 끝까지 짜릿하게, 열광할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심리 스릴러, 심령 호러, 범죄 스릴러 등에 지쳐있는 마니아들이라면 더욱) 말만 앞세우는 공포가 아닌, 정말로 높은 수위의 공포를 확실히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엑스텐션>을 절대로 놓쳐선 안될 것이다. 호러 모조품이 판을 치는 요즘, <엑스텐션>은 '이것이 호러다'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단 노약자나 임산부, 심약자들이라면 관람을 삼가함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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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밍 풀

Swimming Pool

감독 : 프랑수아 오종

주연 : 샤를롯 램플링, 뤼디빈 사니에르

제작연도 : 2003

제작국가 : 프랑스

관람등급 : R, 18세 관람가

비디오 출시

 

정돈된 일상을 파고드는 모호한 균열

 

 

<스위밍 풀>은 프랑스의 젊은 천재 감독으로 연신 메스컴의 화제를 모으고 다니는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최신작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이제껏 국내에 단 한 편도 소개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국내 관객들에게 프랑수아 오종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작은 단서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스위밍 풀>은 프랑수아 오종의 특별한 세계와 조우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러한 이유로 <스위밍 풀>은 그 자체로 국내 관객들에게는 다소 낯선 프랑수아 오종 이라는 매혹적인 수영장 속으로 덜컥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과대한 기대감과는 달리 영화는 시작부터 굉장히 정돈되고 편안한 느낌이다. 편집장의 권유로 프랑스에 있는 그의 별장으로 휴가를 떠난 50대의 인기 범죄소설 여류 작가 사라는 화려하지만 고요한 별장의 정취에 흠뻑 빠져든다. 영화의 초반은 그녀의 디테일한 일상을 조용하게 따라간다. 넓고 조용한 자신만의 공간에 만족해 하며 사라는 새로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녀의 정돈된 일상에 균열이 시작되는 것은 편집장의 어린 딸 줄리가 별장을 방문하면서 부터이다. 사라만의 공간에 줄리라는 달갑지 않은 인물이 침입한 것이다. 줄리는 그 때까지 평온했던 사라의 일상을 엉망으로 망쳐놓는다. 낮에는 수영장에서 수영과 선탠을 하며 밤에는 남자들을 끌어들여 난잡한 섹스 파티를 즐긴다. 젊고 싱싱한 10대 소녀 줄리가 만들어내는 갖가지 소음들은 사라의 정돈된 일상 속을 파고들며 뒤틀린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둘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어 갈수록 점점 줄리의 도발적인 매혹 속으로 흡수되는 듯한 자신을 발견하는 사라는 줄리의 이야기를 글로 써 나간다.

영화의 마지막 30분은 이제까지의 나른하고 일상적이었던 영화의 분위기를 뒤엎어 버린다. 어느 날 줄리는 사라가 마음 속으로 흠모하고 있던 카페 주인을 별장으로 끌어들이고 그날 밤 그와 크게 다툰다. 다음 날 남자는 사라지고 수영장에는 핏자국이 가득하다. 이때부터 사라는 사라진 남자와 핏자국이 남긴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며 예상치 못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이야기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영화보기를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 시키며 영화의 주제마저 바꾸어 놓는다.

<스위밍 풀>은 정확이 무엇이다, 라고 꼬집어서 정의내리기가 무척 힘든 영화임이 분명하다. 물론 그것은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의도적으로 계산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는 관객들이 자신의 영화를 보고 여러가지로 상상하며 재해석하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실제로 <스위밍 풀>은 마지막까지 다 보고 나서도 한참을 더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사라와 줄리가 만들어간 미묘한 갈등과 심리전, 그리고 위험한 범죄 등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굉장히 모호하게 와닿는다.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판타지인지를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음으로 관객들이 이끌어낼 수 있는 상상의 범위는 커지고 그 가지는 여러갈래로 나뉘어진다.

어쩌면 프랑수아 오종 감독은 <스위밍 풀>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그 이상의 것까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와 줄리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또다른 상상력의 샘, 즉 그들만의 수영장(Swimming Pool)을 만들어 준 셈이다. 그 속에서 영화는 각각 새롭게 재 창작 되어 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스위밍 풀>은 하나의 결론으로 단정짓기 힘든 모호한 영화이다. 장르적인 면에서도 드라마, 에로, 심리 스릴러, 서스펜스, 추리극 등을 모두 아우른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언뜻 두 여인의 심리적인 갈등과 교점을 말하는 듯 하지만 창작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더 크게 아우르며 또다른 얘깃거리에 대한 공백마저 남겨둔다. 잘 짜여진 범죄 스릴러나 추리 소설적인 재미를 기대하면서 이 영화를 본다면 분명 실망할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류의 영화와는 많은 부분이 틀리다. 살인과 미스터리가 등장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재미는 사라와 줄리간의 치열한 대립과 심리전에 있다. 두 여배우의 연기는 백점 만점을 다 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래서 오히려 영화가 범죄물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후반부에서 전개의 스피디함에도 불구하고 맥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나 워쇼스키 형제의 <바운드>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바톤 핑크>만큼 창조적이지도 <바운드>만큼 자극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밍 풀>이 인상적인 이유는 정돈되어진 일상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모호한 균열을 일으키는 프랑수아 오종만의 마력적인 화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어차피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모호함의 연속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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