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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일반판)
올리버 색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알마 / 2016년 5월
평점 :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얇은 책이다. 하지만 깊이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깊은 울림과 함께 진실된 고백으로 묶여진 네 편의 에세이는 올리버 색스의 노년과 죽음에 대한 생각의 아주 깊은 곳까지 동행하게 한다. 힘든 내면의, 고통의 골짜기를 건넌 자의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보석같은 사색이 담겨있다. 그로 하여금 여든을 기대하게 하고,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게 하며, 무엇보다 죽음 앞에서 가장 강하게 느낀 감정이 고마움일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올리버 색스는 꼬마 때부터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처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것들에 시선을 돌리는 법을 익히면서 원소들과 주기율표를 친구삼게 되었고, 정통 유대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점차 자신의 성 정체성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부모로 인해 종교의 편협함과 잔인함을 깨닫고 종교를 떠나게 된다. 신대륙으로 이주한 그는 자살에 가까울 정도로 암페타민에 중독되며 내면의 깊은 고통의 시간을 겪는다. 그러한 그가 만성질환 병원의 환자들을 만나면서 점차 회복을 이루고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것을 사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의 베스트셀러<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도 그렇게 세상에 나온 책이다.
깊은 결속력과 사랑을 갈구하는 자는 사랑을 쏟을 존재들을 만나면서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삶의 열정과 자신의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전에없던 사랑이 샘솟기도 하면서 자신의 비전과 사명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사명을 확실하게 붙잡은 자의 인생은 아름답다는 것을 올리버 색스를 통해 다시 한번 더 확인하게 되었다.
종교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애인 빌리와 정통 유대교 친척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들의 따뜻한 환영에 비로소 종교와 화해하는 장면은 아직도 따뜻하게 마음을 적신다.
그날 안식일의 평화, 세상이 멈춘 평화, 시간 밖의 시간이 주는 평화는 꼭 손에 잡힐 듯했다. 주변 모든 것에 평화가 스며 있었다. 「안식일」(p.55)
오직 감사함으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그에게는 사랑과 일이 있었다. 그 안에서 그는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에세이들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노년의 아름다움과 쇠락함을 동시에 누리고 인정할 줄 알았던 그는 암으로 인한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할 일을 다 마쳤다고 느끼면서 떳떳한 마음으로 쉴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하며 인생을 마감했다. 누구에게나 노년은 비켜갈 수 없고, 죽음 또한 피해갈 수 없다. 그 노년과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떤 고백과 감정으로 서게 될지 궁금하다. 하지만, 나도 올리버 색스와 같이 고백하기를 기대한다.
두렵지 않은 척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고마움이다. 나는 사랑했고, 사랑받았다. 남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나도 조금쯤은 돌려주었다. 나는 읽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썼다. 세상과의 교제를 즐겼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나의 생애」(p.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