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늦잠을 잤고 아무 생각없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느끼며 오후까지 집에서 쉬다가 저녁 즈음이 되어 동네 북까페에 갔다. 이곳 또한 오랜만이라 어떤 책들이 있나 한참을 들여다보고서야 자리를 잡고 책을 펼칠 수 있었다.
내 목소리를 듣고 오랜만에 오신 손님이란 걸 아셨단다. 목소리를 기억하는 까페 주인이라... 원래 목소리로 사람들을 기억하느냐고 여쭈었더니 그건 또 아니라고 하시는데 말씀해 주신 이유에 감사하게도, 까페 주인이랑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아늑한 까페는 몇 편의 단편을 남겨 두었던 <아메리칸 급행열차>를 음미하며 읽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었고, 까페 주인과 나만 있음에도 꽉 차게 따뜻한 훈기가 흐르는 공간이었다.
두 시간 남짓 머물다가 책장에 꽂힌 책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보는데 반가운 김영하 작가의 오래된 소설집 <호출>이 눈에 띄었다. 책을 한참 들여다 보고 있으니 까페 주인이 "빌려 드릴테니 읽고 가져다 주세요." 하시더라. 무얼 믿고 빌려 주시나 싶어 책을 들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손님이 자주 오셨으면 해서 빌려 드리는 거예요." 라고 하신다. 순간 감동의 물결이. 왠지 이 곳이 나의 아지트가 될 것 같은 느낌이 확 밀려오더라. 예전에 왔을 때 책을 읽기에는 음악이 좀 시끄러운 듯 해서 부러 멀리있는 북까페에 갔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안심도 되었다. "네에~ 자주 올게요."로 화답하며 기분좋게 까페를 나섰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과 공간의 만남, 그리고 책과의 만남은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그래서 내일이, 한치 앞의 삶이 더욱 기대가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