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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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는 곧 우리네의 젊은 날의 초상이라 부르고 싶다. 삶에 대한 자그마한 것에도 깊이 반응하고 고뇌했던 그 젊은 날들, 부딪히고 아파하고 상처입고 상처주면서 조금씩 자리잡아가는 우리의 인생관. 그런 치열한 젊은 날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겠고 그러한 날들이 없었다면 고스란히 30대, 40대가 되어서 그보다 더욱 치열한 오춘기를 겪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삶의 허무가 곧 인생인 듯 살아가는 와타나베. 하나밖에 없던 친구 기즈키의 자살. 그리고 기즈키를 함께 기억하는 나오코와의 사랑. 또한 와타나베를 사랑하는 미도리. 상실과 갈등의 날들 속에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가는 와타나베의 젊은 날의 이야기. 


나오코와의 사랑은 자신을 향한 연민과 친구를 잃은 상실의 아픔과 연인을 잃은 나오코의 마음에 대한 공감과 그로 인한 그녀에 대한 연민, 보호본능이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낸 감정이라고 본다. 그녀를 평생 사랑하겠다고 하지만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다. 와타나베를 만나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관계를 가진 나오코지만 그 관계조차도 어쩌면 그 사람, 기츠키에 대한 그리움이 불러온 단 한번의 촉촉함이었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에 반해 미도리는 새로운 삶에 대한 탈출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과거의 상처와 상실의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는 새로운 사람. 나오코와 계속 함께 한다면 서로의 상처는 덧날 뿐이지만 미도리는 삶에 대한 허무함 속에 생기를 넣어준다.

 

나오코에게도 만약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면 죽을만큼의 아픈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조금씩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분명 오랜 연인이었던 기즈키의 가장 친한 친구 와타나베를 볼 때마다 더욱 과거 속에서 헤어날 수 없는 나오코였을 것이다. 과거는 과거 속에 두고 아픔은 시간을 두고서라도 치유해야 하며 결국은 터널 속을 빠져나가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봐야 하는 나오코에게 결국 희망은 주어지지 않았다. 삶의 포기를 선택한 나오코가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우리는 사랑에 대한 상실감.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잃은 상실감 속에 평생 자신을 가두고 살아갈 수 있고 그러한 젊은 날의 기억이 지금의 황폐한 나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아픔을 겪은 자는 그렇지 않은 자보다 더욱 그윽하고 깊은 눈을 가질 수 밖에 없고 더욱 깊은 통찰력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것을 소중한 것을 잃은 자들의 특권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여전히 부딪히고 아파하고 힘든 날들을 살아가지만 그래도..라며 그 상실감 속에서 살아갈 희망을 붙잡는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대로 아픔없고 상처없고 행복한 날들의 연속이면 좋겠지만 삶은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상처를 허락하고 상실의 아픔을 허락하고 고통과 고뇌를 허락한다. 그러한 치열한 싸움 가운데 삶에 대한 겸허한 자세와 삶에 대한 통찰을 가질 것을 가르친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라는 인생의 선배들이 남긴 말이 그냥 주어진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잃을수도 있고 더 아플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수록 더욱 희망을 붙잡아야 할 것이다.

 

희망의 빛 미도리. 과거의 상실 속에서 나를 가누지 못하던 나오코였던 나에게 희망의 빛으로 찾아온, 나의 미도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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