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긴 만남 - 시인 마종기, 가수 루시드폴이 2년간 주고받은 교감의 기록
마종기.루시드폴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물방울인 내가 강물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순간인 내가 연속적 시간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그리고 으레 그러하듯 진솔한 대화가

신들이 사랑하는 의식과 어둠,

또한 시의 고상함에 호소하기를

 

보르헤스, 「송가 1960」

  

주고받은 편지를 묶어서 책이 출간되는 사례는 일찍이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그 내용의 종류도 다양하다.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을 평생에 걸쳐 편지로 마음을 전한 예술가들의 서간집이라든지 반고흐와 동생 테오가 주고받은 『반고흐, 영혼의 편지』와 신영복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처럼 일기형식을 띄는 사색적인 편지글도 있고 『채링크로스 84번지』처럼 헬렌 한퍼라는 작가와 영국의 중고 서적상이 우연한 기회로 의도하지 않게 20년동안 주고받은 서간집도 있다. 하지만 이 서간집들의 특징은 의도되지 않은 순수한 편지라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마종기님과 루시드폴의 편지에세이 『아주 사적인, 긴만남』을 너무도 읽고 싶어서 구입해놓고는 갑자기 심각한 선입견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과연 이 책은 순수한 편지글인가. 아니면 출판사에 의해 철저하게 의도된 것인가.' 책을 펼치기도 전에 그 물음에 발목이 잡혀서 책을 머리맡에 두고서도 한참 후에야 첫 장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의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나의 순수하지 못한 마음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더욱 정성들여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생명공학 박사이면서 '루시드폴'이라는 예명으로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 연주하는 조윤석과 의사이면서 시를 쓰는 일흔의 老시인 마종기님이 2년에 걸쳐 주고받은 편지를 묶어 펴낸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은 영혼의 소통이 묻어나는 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기위해 멀리 타국 북유럽에 도착한 첫 날, 약간의 두려움으로 움츠린 루시드폴이 제일 처음 펼쳐든 책이 바로 마종기님의 「이슬의 눈」이었고 그 이후로 마종기님의 시는 루시드폴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2집 앨범을 만들 때에는 마종기님을 가장 훌륭한 음악 선생님 (p.15)이라고 표현하기에 이른다. 누구에게나 계기가 있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계기. 삶이 변화되어지는 계기. 그러한 계기는 언제나 어떤 극한 상황. 또는 인생의 고독의 시기에 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머나먼 이국 땅에서의 루시드폴에게 전혀 낯선 존재. 마종기 시인이 자신의 음악의 멘토같은 존재로 자리잡는 운명적인 순간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아, 이 시[동생을 위한 조시]를 저는 얼마나 많이도 읽었던가요. 그리고 늘 이 시의 뒷부분을 읽을 때면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것이 있어 전철역에서, 집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전화를 하는 중에 얼마나 읽고 또 읽어주었던지. 보내주신 편지 중에서 무엇보다도 '쉽고 좋은 시'라는 시구가 가슴을 울렸습니다. 그 '쉽다'라는 것이 저에겐 단어 그대로의 '쉽다'가 아니라, 시인의 가슴에서 독자의 가슴으로 '쉽게' 가는, 그런 시가 '쉽고 좋은 시' 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결심하게 되었지요. 나는 쉽고 좋은 노래를 써야겠구나..  (p.89)
  

 

그렇게 루시드폴이 마종기 시인의 오랜 팬인 것을 알게 된 어느 출판사가 두 분을 소개해 줌으로써 메일을 주고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의도된 기획이긴 하지만 출판사의 선한 의도였다고 할 수 있겠다.  

 

루시드폴과 마종기 시인은 같은 나이에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외로운 싸움을 싸우며 공부를 했다라는 동질의식과 생명공학 박사, 의사라는 전문분야에 몸담고 있으면서 또다른 직업, 예술을 한다라는 비슷한 처지에 쉽게 마음을 터놓으며 공감대를 형성해간다. 마종기 시인은 고향을 떠날 때 느꼈던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이야기하며 루시드폴의 이국 생활을 깊이 이해해 주었고 그 외로움과 소외감을 힘껏 응원해 주었다.아버지와 아들 뻘 되는 36년의 나이차가 무색하리만치 대화는 자연스러웠고 서로의 편지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루시드폴은 마종기 시인에게 더욱 존경과 감탄을, 마종기 시인은 루시드폴에게 더욱 깊은 호감과 반가움을 담으며 편지는 이어지고 있었다. 

 

서간집은 두 사람의 은밀하고 깊은 이야기를 몰래 훔쳐 읽는 기분으로 두 사람의 마음을 오가며 읽을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고 또한 내가 좋아하는 [소통]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어 좋아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소통의 부재]의 시대를 살아가고 짧은 인사말에 익숙한 시대를 살아가는 요즈음, 편지지 분량 2장은 족히 넘어보이는 이메일을 읽을 때면 무엇보다도 마음이 꽉차게 좋은 건 사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근황과 현재의 마음상태, 또는 계획과 비전을 긴 글로 써내려가며 상대방에게 나의 진심이 전해지도록 전하는 그 정성어린 마음이 무척이나 정다웠고 부러웠고 그리워졌다. 나조차도 그렇게 정성어린 편지를 쓰지 못하고 살고 있음이 돌아보아져서 반성이 되기도 한 시간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깊은 소통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정말 축복이고 선물이라고 한다면 분명 루시드폴과 마종기 시인은 서로에게 선물임에 틀림없다. 편지는 그렇게 2007년 8월 24일부터 시작해 2009년 3월 27일까지로 끝이 났지만 그 이후에도 평생에 걸친 소통은 계속 될 것이고 서로가 더 깊은 동질애로 가까워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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