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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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최규석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라는 작품을 접하고서 나는 '그'에게. 그리고 '최규석의 세계관'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평범하지 않은 생각들과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 그리고 짧은 우화들 속에 담겨진 사회비판들. 명랑만화 공룡둘리를 사회의 소외된 계층으로 탈바꿈시켜 우리 주위를 둘러보게 하는 여유. 그것만으로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기에는 충분했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읽으면서 30대 초반의 젊은 사람이 어쩜 이렇게도 뚜렷한 자기만의 시각을 가질 수 있을까 궁금해 했었는데 그 다음으로 읽은 『대한민국 원주민』을 통해서 그리고 『습지생태보고서』를 통해서 그럴 수 밖에 없는 그의 근원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77년생인 그는 시골의 가난한 집 막내로 태어나 가지고 싶은 걸 한번도 맘놓고 가져본 적 없는 그래서 포기를 일찍부터 배우게 되었고 운동화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의 가난 때문에 고무신이 최고라 여기며 살았고 누나들은 우리가 당연하게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입학하는 중학교를 가난 때문에 공장으로 보내자라고 하는 아버지와 중학교는 졸업해야한다는 어머니의 실랑이로 겨우 입학하는 아주 사치스런 것이었다. 도시로 이사를 오면서 그는 자신이 도시의 자기 또래들과는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가 자신의 세계관을 짧은 단편, 우화 등을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냈다면  『대한민국 원주민』은 자신의 어린시절과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 형성과정을 보여주고  『습지생태보고서』에서는 사회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습지생태보고서』라는 의미는 1화 [의태]를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하위 종(種)의 남루함을 자랑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딱히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어찌 보면 은근히 즐기는 듯도 한 뻔뻔함과 간혹 먹이사슬의 모순을 접할 때면 뒤에서나마 구시렁거릴 줄 아는 비판의식도 갖춘 편이다. 허나...전반적으로 일관된 서식 양태를 보여주는 듯 하다가도 이종(異種)으로서의 의태(擬態)가 가능한 상황하에서는 순간적으로 행동 양식이 돌변하기도 한다."

   

그렇다. 습지는 하위 종이 서식하는 곳. 즉 최규석을 비롯 친구 셋과 상명대를 상징하는 사슴인 녹용이(무척이나 응큼한)가 사는 자취방을 의미하고 그 곳은 그들의 서식양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적합한 곳이므로 그들의 생활보고서 즉, 생태보고서라 하겠다.

 

최규석은 자신을 습지에 사는 하위 종으로 인식하고 있고 그것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 구석구석에는 현실과 욕망 사이에서 쉼없이 고민하고 욕망을 쫓을 때마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최규석을 만난다. 심지어 연애에서조차도 그러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연애비용으로 돈을 많이 쓴 그에게 내면의 자아가 나타나 묻는다. "아버지 한 달 용돈 4만원인 거 알지? " 최규석은 이건 그냥 연애일 뿐이라며..죄 짓는 것이 아니고 남들 다 하는 연애일 뿐 (27화 남들 다 하는 것) 이라며 스스로 위안하려 하지만 고통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아르바이트 하는 곳의 아가씨가 자기를 붙들고 하소연을 하며 눈물을 흘릴 때 자신은 어떤 위로의 말도 못해줬음에 자책하며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친해질까봐..그 슬픔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질까 봐 무서웠어." (12화 정답) 약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품는 따뜻한 마음은 있지만 그 약자들의 세상이 얼마나 가슴시린지 알기에 애써 모른척 하려는 그의 독백에 내 마음이 시큰거렸다.

 

『습지생태보고서』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최규석은 좋은 대학을 나와 멋지게 출세하고 싶지만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케 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한다. 그들은 늘 그러한 현실과 욕망 앞에서 무릎꿇고 만다. 그들의 자취방 이야기는 하나같이 재미난 캐릭터에 재미난 이야기들로 넘쳐나지만 도무지 웃음이 나질 않는다. 그들 편에 서서 <힘내!>라고 도닥이고 있는 내 모습만 보일 뿐이다. 어쩌면 나조차도 그들의 생태를 너무도 잘 아는 하위 종인지도 모를 일이다.

 

최규석은 등장 인물 중에 지극히 객관적인 인물을 하나 설정해 두었는데 그 인물이 바로 사슴 녹용이다. 


"번화가에서 이고지고 걸어다니는 것도 쪽팔리고, 그러고 버스 타는 것도 쪽팔리고, 니네들 구질구질한 차림새도 쪽팔리고...하여튼 다 쪽팔려." "속물 근성이라니! 세상의 가치 기준에서 너 혼자만 비켜 서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 너도 좋은 집에서 멋진 차 타고, 스타일 죽이게 입고 폼 나게 살고 싶잖아!?" <p. 123>


어쩌면 녹용이는 최규석의 내면의 소리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최규석이 현실과 욕망앞에 늘 고민할 때 그의 마음을 반영하는 욕망의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녹용이의 대사가 그러한 부분을 많이 반영하고 있고 녹용이의 말에 최규석은 늘 고개를 숙이고 만다.

 

『습지생태보고서』는 젊은 청년들이 등장하는 젊은이들의 만화다. 하지만 등장하는 젊은이들 중 어느 하나 유행과 멋과 세상의 쾌락을 아는 자도, 누리는 자도 없다. 실제로  『습지생태보고서』는 최규석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경향신문에 연재한 글이다. 그리고 생각했던 액수만큼 모였을 때 과감히 연재를 중단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최규석은 이 작품 말미에 『습지생태보고서』는 자신에게 전세금을 마련해주었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변했다고 느껴지면 그것이 통장의 잔액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라며 끝을 맺는다. 그는 결국 『습지』로 습지를 탈출한 것이다.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세상의 욕망 앞에서 맞설 줄도 알고 고민할 줄도 아는 작가. 최규석. 

비록 자신을 습지에서 서식한 하위 종이라 표현하였지만 지금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시각을 간직한 채 세상을 바라본다면 앞으로의 그의 작품들은 더욱 빛을 낼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그것이 싫은 논리적인 이유를 백 가지는 더 댈 수 있는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도망이 아닌.. 선택일 수는 없는 걸까?

패배할 것이 두려워서 출발선에 서기를 피하고 있는 걸까?

혹은 어른이 되는 날을 자꾸만 미루고 있는 것일까?

불안한 눈빛으로 친구의 연봉을 묻거나 부동산 정보를 뒤적거릴 어쩜 슬픈 그 날에

한 때는 이렇게 되지 않으리 노력했노라 자위할 기억을 만들고 있는 것뿐일까?

세상 안으로 성큼 들어서지도 발을 빼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지금

그래도 조금씩은 자라고 있는 것일까?

자기 안의 수많은 모순과 세상에의 두려움을 한가득 품고도

영문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기분 좋은 외침은....

 

단지 어리석음 때문만은 아니겠지?

 

제 54화 그렇겠지? <p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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