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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 제목과 표지는 그야말로 참 눈부신 조화가 아닐 수 없다. 늘 단편 위주의 소설을 쓰다가 등단한 지 12년 만의 첫 장편이라 하니 그 사실 만으로도 설레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처음을 함께 공유한다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니까. 백수린 작가의 소설과 에세이를 좋아하는 지인은 그녀를 “다정함의 작가”라 불렀는데, 다정한 작가의 첫 장편소설을 다정한 시선으로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이겠다.
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제목의 “안부”에 시선이 한참 머물렀다. 안부, 누군가의 평안과 근황을 궁금해하며 마음을 쓰는 일. 그래서 안부에는 그렇게 기분 좋은 수식어가 많이 붙나 보다. 다정한 안부, 따뜻한 안부, 반가운 안부… 그중에서도 제일 좋은 안부는 기다리는지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던 당신의 안부가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면서 미소가 지어졌던 이유는 우리는 각자, 누군가의 “당신”이라는 것. 문득, 내 안부를 기다리는 사람의 당신이 되어 다정한 안부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이에게 내 안부가 눈부신 안부처럼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렇다면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는 과연 누구에게 도착하는 안부일까. 그리고 어떤 색깔의 안부일까. 표지처럼 정말 쨍하게 파란 빛깔의 안부일까. 궁금증은 더 커져만 갔고 읽을수록 이야기의 흡입력은 대단했다. "소리 없이 강합니다." 그만큼, 강력한 흡입력이었다.
소설을 읽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에게 소설 읽기란 사람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과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삶에 대한 이해가 되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저 읽기에 지나지 않겠지만 소설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환경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내 삶에서 녹여내는 것, 그것이 소설을 읽은 나에게 주어진 내 삶의 과제가 되는 것이다. <눈부신 안부>는 내가 접해보지 못한 참사 유가족의 삶과 독일 파견 간호 노동자의 삶이 등장하는데 주인공 해미의 눈으로 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어서 참 특별한 시간이었다. 파독 간호사(책의 표현) 중에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떠난 사람도 있지만 자유를 찾아서, 그리고 좋아하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 깊은 영향을 받아 설레는 마음으로 독일에 간 사람도 있었음을 이번 기회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한 가지 사건의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그저 가장 불행한 이야기로 뭉뚱그려 생각하며 산 것은 아닐까 돌아보게 되었다.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는 것까지 똑같이 칠해버리려 하거든." (106쪽)
열두 살이 되던 해에 가스 폭발 사고로 언니를 잃은 해미는 그 사건을 통해 사이가 멀어진 부모님이 잠시 떨어져 있게 되면서 독일로 유학을 떠나는 엄마를 따라 동생 해나와 함께 가게 된다. 그곳에서 친이모인 행자 이모를 만나게 되면서 파독 간호사로 고국을 떠났던 마리아 이모, 선자 이모 등 여러 이모를 만나게 되고 그녀들의 딸과 아들인 레나, 한수와 친하게 지내게 되면서 언니를 잃은 아픔과 죄책감의 슬픔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암에 걸린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아주기 위해 그녀의 아들 한수는 해미, 레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그들은 선자 이모의 일기를 훔쳐 읽으며 K.H. 라는 이니셜의 단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파독 간호사인 이모들의 삶을 취재하게 된다.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거짓말을 거듭하면서 내가 무엇을 거짓으로 말했는지가 헷갈리기 시작한다는 사실뿐이었다." (34쪽)
해미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이 힘들어 독일 생활을 하면서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거짓말”은 내가 주의깊게 본 이 소설의 전체적인 흐름의 주요 키워드이다.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이 견디기 힘들어 해미가 선택한 것이 거짓말이었고, 그것은 해미 자신이 살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었다. 거짓말 덕분에 모두가 편안하고, 해미도 거짓말에 숨어 보호받는 듯 보였지만 결국 그것이 해미 인생의 덫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해미는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레나와 한수에게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잊힌 사람처럼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돌아보면 나도 어릴 적부터 내 삶을 위협하거나 불안에 빠뜨리게 하는 많은 요소를 핑계와 거짓말, 책임 전가 등으로 나를 보호하며 살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만 알면 그만인, 가장 쉬운 선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만 알고 남은 모르지만 가장 쉬운 선택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인생에서 나를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씨앗임을 안다. 자신의 거짓말을 기억하기 위해 자물쇠 달린 일기장에 매일 기록하며 불안하게 살았던 해미처럼 그러한 선택은 삶의 평안을 앗아가는 것임을.
"생각해야 해. 내 안의 누군가가 다시 속삭였다. 생각해야만 해. 너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지? 더이상 도망치기만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264쪽)
<눈부신 안부>에서 특히 집중해서 본 부분은 참사 유가족이라는 환경 안에서 아픔을 이겨내고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한 사람, 주인공 해미의 성장이었다. 해미는 자신이 살기 위해 선택한 거짓말의 덫에서 또한 살기 위해 지난 시간을 바로잡으려고 용기를 내었고, 그 용기는 자신을 끝까지 기다려 주며 다정하게 곁을 지켜준 행자 이모와 우재 덕분이었다. 우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더이상 도망치기만 하면서" 살아서는 안 되겠기에 해미는 다시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 찾기에 나서게 되면서 선자 이모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삶 또한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304쪽)
언젠가 읽은 책에서 "나의 실존은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표현에서 위안을 얻은 적이 있다. 해미는 그 실존의 불안과 두려움 위에 참사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두려움까지 덧대어졌다. 얼마나 불안한 삶이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래서 해미는 거짓말을 통해 자신을 그토록 보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해미가 비로소 과거의 자신에게서 놓여놔 제주로 향할 때, 해미에게서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눈부신 안부"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삶을 구원한 그녀의 용기, 그리고 거짓말 또한 어쩌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해미의 방법이었겠구나. 해미 덕분에 많은 사람이 웃을 수 있었던 것도 해미의 다정함 덕분이었겠구나... 해미에게 정말 수고 많았다고, 너의 착한 마음이 많은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웃게 했다고 마지막으로 나도, 안부를 전하고 싶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한수를 구원해주고 싶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구원하고 싶었던 건 정말 한수였을까? (3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