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산티아고 길에서 나를 만나다 - 나의 산티아고 길 여행
하페 케르켈링 지음, 박민숙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이 길은 힘들지만 놀라운 길이다. 그것은 하나의 도전이며 초대이다. 이 길은 당신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비워버린다. 그리고 다시 당신을 세운다. 기초부터 단단하게. 이 길은 당신으로부터 모든 힘을 가져가고 그 힘을 세 배로 돌려준다. 당신은 이 길을 홀로 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은 그 비밀을 보여주지 않는다. (360쪽)
아주 오래전에 서영은 작가의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를 인상 깊게 읽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동경하게 되면서 언젠가 꼭 걷고 싶다는 꿈을 가진 적이 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로망이겠지만 실제로 그 길 위에 서지 않는 이상 영영 동화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꿈의 길로 남고 마는 곳이 산티아고 순례길일 것이다. 이번에 하페 케르켈링의 순례기를 읽으면서 마음에 한 점 흔적으로만 남은 그 꿈에 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는데 꿈은 얼마나 자주 불을 지펴주느냐에 따라 실현 가능성이 높아지는, 그래서 때마다 적절한 부채질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저자는 건강에 적신호가 계속 울리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일을 하다가 스스로에 대한 좌절과 분노로 결국 담낭이 터졌고 심근경색까지 의심되는 상태에서 병원으로 실려 간다. 이후에 사고의 전환을 위한 시간으로 순례의 길을 택해 프랑스 생장피드로프에서 출발해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프스텔라까지 장장 800킬로미터에 달하는 순례길을 떠나게 된다. 어쩌면 순례의 길은 내가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어 그 길이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의 유명 코미디언이자 MC인 저자답게 유머가 넘치는 그의 입담에 읽다가 자주 소리내 웃었고, 고통의 순간에서도 유머로 승화하는 그에게 깊이 매료되기도 했는데 순례길이 길어질수록 그렇게 유머가 풍부하던 저자마저도 짜증과 분노와 부정적인 생각이 그를 덮쳤다. 다녀와서 기억에 의존해서 적은 것이 아니라 매일 일기로 남긴 것이다 보니 마치 동행하는 것처럼, 그의 감정 변화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너무도 인간적이었고, 나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내가 순례길을 떠나게 된다면 저자보다 못하면 못 했지, 더 나을 순 없겠구나 싶었다.
흔히 갖는 환상 중에 결혼이 있는데 현실은 얼마나 다른지 모두가 인정하는 어떤 법칙처럼 얘기하곤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환상을 가지고 떠났다가는 바로 항복하고 말리라는 것. 실제로 몇천 명이 출발했다가 끝까지 도착하는 이는 20%도 채 안 된다는 것에서 산티아고 길은 결코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를 만나고 싶어서, 또는 신을 만나고 싶다는 목적으로 많이 떠나는 순례길 중의 하나인데 저자의 얘기를 읽다 보면 실제로 많은 사람이 친구들과 떠났다가 결국 서로 합의해서 홀로 걷는 것을 택한다고 한다. 마치 인생길 같았다. 함께 걷는 이가 있다 해도 결국 혼자 걷는 길, 혼자 걸어야만 하는 길. 그렇게 홀로 침묵 속에 걸으며 자신과 만나고 어느 순간에 이르면, 길 위에서 통제할 수 없는 울음이 터지면서 비로소 신과 조우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정말 거짓말처럼, 불현듯.
저자가 걷는 순례길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한 명 한 명의 묘사가 참 재밌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함께 걷다가 평생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거울처럼 자신의 못난 부분을 들여다보게 하는 사람도 만나고, 정신이상자, 사기꾼, 그리고 순례길마저도 여자들에겐 성범죄에 있어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이들도 있었다. 평생의 친구가 된 이들도 처음부터 마음이 잘 맞았던 건 아니었다. 오해와 불신 속에서 차츰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이 참 인상적이었고, 그의 한결 같은 진실됨이 그런 만남을 이루지 않았나 싶었다.
“순례자는 순례를 하는 동안에만 존재할 수 있다.” (346쪽) 산티아고 순례길은 어느새 35일 간의 대장정이 끝이 나지만 저자는 순례길이 끝나는 그 길 끝에서 진정한 순례의 길을 걷게 되었을 것이다. 인생길의 작은 축소판이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느꼈던 그 깨달음과 인생의 깊이를 세상 속 자신만의 순례길에서 더 깊이 느끼면서. 순례길을 걷기 이전과 이후의 삶은 확연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당장은 나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날 순 없지만, 내가 걷는 이 길 위에서 하루하루, 순례길을 걷는 마음으로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주한 일상에서도 나를 자주 들여다보고 신을 만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고, 침묵의 시간을 확보하여 자주 절대고독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 내가 왜 이 길을 걸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묻고 확인하면서 그 길 끝에 서고 싶다.
반복적인 일상에 무료한 이들이나 재밌는 여행기를 읽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은 이에게 적극 추천한다. 웃고 울고를 반복하다가 목적지에 도착한 그 길 끝에서 저자와 함께 우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