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에게 길을 묻다 - 알기 쉽게 풀어쓴 그리스로마신화의 인생 메시지
송정림 지음, 이병률 사진 / 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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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실패해서,
사랑을 잃어서,
병에 걸려서,
희망을 잃어버릴 이유는 많다.

하지만

희망은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희망을 버릴 뿐이다.

리처드 브리크너의 [망가진 날들]은
사고를 당해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해야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다리가 없이 평생을 살아야한다는
좌절감에 그는 간병인에게 묻는다.

˝내게 미래가 있을까요?˝
간병인은 이렇게 말한다.
˝장대높이뛰기 선수로는 희망이 없죠.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무한대의 희망이 남아있어요.˝

한 가지 희망이 사라질 때
우리는 종종 모든 희망을 함께 버린다.
그러나
˝신은 한쪽 창문을 닫으면
다른 쪽 창문도 반드시 열어두신다.˝

한쪽 창문이 닫힌다고 해서
인생의 모든 창문을 닫아버릴 필요는 없으며
조금 실패했다고 해서
전부를 포기해버릴 필요는 없다.

지금의 실패는 아주 작은 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낙엽처럼
사소한 것이며
낙엽이 땅에 묻혀
시간이 흐르면 땅의 영양분인
부엽토가 되어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주듯이
시간의 지혜 앞에서는
쉽게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지금의 시련이
떨어진 낙엽과 같지만
시간이 흘러 영양분이 되어
땅속에 흘러 들어가듯이
언젠가 삶은 비옥한 모습으로
당신의 창문을 열어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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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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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도 최악의 총기사건이 일어났다. 라스베가스에서, 한 미치광이 노인이 쏜 무차별 총기난사로 무려59명이 사망하고 500여명이 다쳤다. 살인범의 신원에서는 별다른 이력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은행 강도 출신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것이 그 살인범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부유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했던 범인의 동거녀는 그가 평소 다정하고 가정적인 사람이며 범행 전에도 생활비를 보내주었던 살인의 전조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수십 개의 총기, 호텔에 설치한 감시카메라와 같은 것들은 그가 총기난사라는 범행을 벌이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귀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건이 터졌을 때 읽기 시작한  '콜럼바인'은 총기난사의 주인공들과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겹쳐보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테러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흔히 그 사건의 당위성을 찾기 위해 살인마들의 취향이나 성향을 분석해 보곤 한다. 평소  잔인함이 있었다던가, 집안 내력에 병명이 있다던가, 아니면 성적으로 왜곡된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가정생활이 불우했던지에 대한 탐색이 그제서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이코패스들이나 살인마들은 너무도 평범하고 착한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이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 왜곡된 접근으로  언론은 날개를 돋쳐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범인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희대의 악마의 얼굴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가 말하였듯이, 모든 악은 평범하다. 콜럼바인의 총기 사건을 일으킨 두 아이, 에릭과 딜런 역시도 평범한 10대 소년들이었다. 10대에는 누구나 세상을 향해 분노와 우울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분노와 우울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 극복해 나가느냐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오가겠지만, 그들은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콜럼바인 총기사건'이 일어났을 때  피해자들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악마로 묘사되곤 하였고, 하위 문화에 속했던 고스 족의 범행으로 보았던 언론사도 있었고 게이와 호모들의 반란으로 묘사한 언론사도 있었다. 그런 추측성 보도들로 인해 피해자들의 신변 파악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하긴 바로 어제까지 수업을 들었던 친구가 자기들을 죽으려고 총기를 난사한다는 건 믿기 힘든 일이긴 하다. 과장과 왜곡 보도는 순식간에 미국 전역을 덮어가며 콜럼바인 고등학교는 점점 끔찍한 곳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과장된 기사거리들은 실제로 콜럼바인 고등학교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게 했다. 사건 초기 잘못된 접근과 과정된 자료들은 이후 에릭과 딜런이 썼던 일지로 다시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19개월만에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이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는 점이다. 


에릭의 일지를 통해 분석한 결과 에릭은 사이코패스 성향이 맞았지만, 반면 딜런은 우울증을 앓고 있던 청소년이었다. 그들의 부모들은 모두 유복했고, 자녀 교육이나 환경에 민감한 편이었다. 엄격한 유대인이었으며 군인 가정에서 바른 교육을 받고 자랐다. 사건이 발생하고 이들 가족이 견디기 힘들었던 부분이 부모들을 향한 비난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부모의 어긋난 교육이 아이들을 그렇게 망쳤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정반대였다. 


그러나 책을 읽을수록 놀라웠던 부분들은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이들을 분석하는 줄 알았는데 이후 에릭과 딜런의 일지를 통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게 되니 조금 달라진다. 사이코패스 성향이 강했던 에릭은 가면을 끊임없이 바꾸며 자신을 감추는데 능숙했으며 이런 사이코패스와 한짝패가 되었던 딜런의 우울증은 둘을 환상의 커플로 만들어 주었다는 점이다. ' 신경질적이고 변덕스러운 우울증 환자와 가학적인 사이코패스가 만날 때 폭발적인 짝이 된다.'(P408)  토네이도를 만들려면 냉기와 열기 둘 다 필요한 것처럼 에릭의 열기는 딜런의 냉기와 너무도 잘 맞는 짝패였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이코패스를 알게 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제까지 현대 의학에서 사이코패스는 치료방법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정신적인 치료는 사이코패스를 악화시킨다고 한다.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것은 에릭과의 상담자료가 사이코패스의 치료법에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이 콜럼바인의 총기난사 사건을 저널리즘 형식으로 새롭게 재조명된 가치는 바로 이점에 있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평범성의 연관은 끊임없이 연구되어야 한다. 


'어금니아빠'의 사이코패스 성향은 40점 만점에 25점이었다고 한다. 25점 이상이면 사이코패스로 보는데 범행에 비해 낮은 점수에 속하긴 하지만 커트라인은 넘겼다. 평소 10대 청소년들의 상담가를 자처하며 아내를 위한 사랑과  난치병 딸을 살뜰히 보살피는 천사의 얼굴을 하였던 어금니아빠 이영학이 사이코패스로 밝혀지며 그가 해온 범행 역시 낱낱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딸 친구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했으며 아내에게 성매매를 강요했다. 차마 입에 담기도 , 상상하기도 힘든 범행들을 보면서 악마는 선한 가면을 쓴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에릭과 딜런의 부모님들은 이런 말을 했다.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걸 몰랐어요.' 라고, 아이들을 키우는 데에는 사랑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행동으로 보여지는 성향들을 무심히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무슨 문제점이 있는지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관계는 아이가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는 단초들이다. <비극에 대한 완벽한 보고서>는 사이코패스 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현대의 보고서이다. 악마는 착한 가면을 쓴다. 바로 옆에 착한 가면을 쓰고 있는 누군가가 살인마로 돌변할지 모르는 불안과 위기 속에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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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화살 피하기

_ 고통을 다루는 기술



스승이 제자에게 묻는다.

“만약 누군가의 화살에 맞으면 아프겠는가?”

제자가 대답한다.

“아픕니다.”

스승이 다시 묻는다.

“만약 똑같은 자리에 두 번째 화살을 맞으면 더 아프겠는가?”

제자가 말한다.

“몹시 아픕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한다.
“살아 있는 한 누구나 화살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한 감정적 고통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첫 번째 화살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고, 두 번째 화살은 그 사건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다. 상실과 실패와 재난은 누구의 삶에나 일어난다. 그러나 고통의 대부분은 실제의 사건 그 자체보다 그것에 대한 감정적 반응으로 더 심화된다. 인생이 고통이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가장 많이 맞는 화살은 스스로 자신에게 쏘는 두 번째 화살이다. 첫 번째 화살을 맞을 때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두 번째 화살을 자신에게 쏘기 시작하며, 이 두 번째 화살이 첫 번째 화살의 고통을 몇 배나 증폭시킨다.

한 여성이 20년 전에 이혼을 했다. 그 20년 동안 그녀는 전남편의 부당한 행동에 화가 난 채로 고통스럽게 살았다. 자식들과 친구들 앞에서 그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남자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와도 한 달 이상 관계를 지속하지 못했다. 스스로 쏜 두 번째 화살이 너무 많이 박혀 있어서 사랑의 감정이 싹틀 공간이 없었다. 분노로 인해 그녀의 삶은 얼어붙었으며, 모든 관계가 제한적이 되었다.

백혈병 선고를 받고서야 그녀는 분노를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하지 않고 삶을 허비한 것이 너무 후회되었다. 『인생 수업』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를 찾아온 그녀는 평화롭게 살 수는 없었지만 평화롭게 죽고 싶다고 고백했다. 스스로에게 쏜 두 번째 화살이 자신의 삶을 망쳤음을 늦게야 깨달은 것이다. 이미 잃어버린 것에 집착하는 것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 잃는 지름길이다.

불쾌한 사건이 심리적 불행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하다. 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다른 차차가 방향 지시등도 없이 끼어든다. 우리는 금방 흥분해서 감정적이 된다. 두 번째 화살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맥박 수를 증가시킨다. 주말을 비워 두고 명상 프로그램에 등록했는데 하루 전에야 취소 연락이 온다. 숲 속 명상 센터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던 계획은 한순간에 분노의 감정으로 바뀌어 주최측과 자신에게 두 번째 화살을 쏘기 시작한다.

선의의 마음을 가지고 도와주었는데 돌아온 것은 배신이다. 형제와 친구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 경험만으로도 상처가 큰데, 두고두고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스스로에게 쏘는 감정적 화살이다.

선의의 마음을 가지고 도와주었는데 돌아온 것은 배신이다. 형제와 친구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 경험만으로도 상처가 큰데, 두고두고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스스로에게 쏘는 감정적 화살이다.

내 친구가 터무니없는 누명을 쓴 적이 있다. 그로선 억울한 일이었지만 인간 심리의 왜곡된 면을 바로잡기는 쉽지 않다. 진실하고 정의롭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자신의 이익과 질투심 때문에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곤 한다. 이 악의적인 비난 때문에 그와 가깝던 이들까지 등을 돌렸다. 조금만 상황을 살펴봐도 헛소문임을 알 수 있었지만 사람들은 때로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진실이 신발끈을 묶고 있을 때 거짓은 지구를 반 바퀴 돈다.

억울함, 배신감, 증오, 복수심이 꿈속에서도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그로 하여금 현재를 생생하게 살지 못하게 막았다. 화분에 뿌리가 꽉 차서 분갈이가 필요한 식물처럼, 마음속 화분에 부정적인 뿌리들이 뒤엉켰다. 우리는 상처 입은 감정들이 자신의 삶을 방해하는 것을 너무 오래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 친구에게 물었다. 어느 것이 그를 더 괴롭히는지. 일어난 사건인지, 아니면 그것에 대한 자신의 감정적 반응인지. 마침내 그 친구가 그렇게 했듯이 우리는 두 번째 화살들을 단호히 뽑아 버려야 한다.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자신에게 화살을 쏘아 대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은 것이다.

화살에 맞으면 아픔을 느끼되 그 아픔을 과장하지 말라고 붓다는 충고했다. 병이 난 제자를 찾아가서도 아파하되 그 아픔에 깨어 있으라고 가르쳤다. 상처에 너무 상처 받지 말 것, 실망에 너무 실망하지 말 것, 아픔에 너무 아파하지 말 것—이것이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이다. 잠시 아플 뿐이고, 잠시 화가 날 뿐이고, 잠시 슬플 뿐이면 되는 것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맑고 투명해진다.

우리는 첫 번째 화살에 반응을 보이는 데는 익숙하지만, 두 번째 화살을 다루는 데는 매우 서툴다. 칼루 린포체는 말한다.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해방시켜 주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을 향한 원망과 분노와 증오에서 나 자신이 해방되는 일이다.”

-(중략)

‘나는 나 자신에게 두 번째 화살을 쏠 것인가?’

삶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어리석으면 더 고통스럽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는가는 그들의 카르마가 되지만, 그것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당신 자신의 카르마가 된다.’는 말은 진리이다.

-알라딘 eBook (류시화) 중에서

너무도 공감가는 내용이다.
나 자신에게 쏘아대는 화살,
그 화살에 다쳐 아직도 반생을 떠돌고 있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 돌아보지 않듯
삶도 그러해야 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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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0-14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림모노로그님, 오랜만에 인사드리는 것 같아요.
많이 늦었지만, 지난 추석연휴는 잘 보내셨나요.
두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말은, 들을 때마다 늘 한번쯤 되돌아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람마다 다르지만, 늘 틀리는 문제를 틀리고, 같은 부분에서 실수를 하는 것 같거든요.
읽으면서,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 의미대로 산다는 것은 더 어려운 것임을 생각해요.
잘 읽었습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드림모노로그 2017-10-15 19:41   좋아요 1 | URL
오랜만입니다 ^^ 잘 지내시죠.
요즘 제가 많이 아픕니다 . 이 두 번째 화살에 자꾸 찔리는 거죠 ㅎㅎㅎ
그런 중에 이 글귀들을 읽으니 뭔가 굉장한 위로를 받은 기분이더라구요 ^^
힘들지만 그렇게 , 어차피 일어난 일에 마음 다치지 않도록 애쓰면서 살아가려고요 ^^
좋은 저녁 시간 보내세요 ~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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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지연이다. 학교다닐 때는 김지연이 너무 많아서 선생님이 출석 부를 때 김지연 뒤에 알파벳을 붙여 불러주셨다. 키가 작아 난 언제나 김지연A였고, 나보다 큰 친구는 김지연 B, 그보다 큰 친구는 김지연C 불려졌다. 흔한 이름처럼 나는 흔한 아줌마처럼 살고 있다. 비교적 평온하고 정상인 삶이었다. 공부하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할 때까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여느 아줌마들처럼 몸매까지 흔해져 버리니 나는 후져지기 시작했다. 내 뱃속에서 낳아 똥 싸는 모습까지 이쁘기만 했던 자식들은 사춘기가 되니까 뚱뚱해진 엄마를 싫어했다. 아이들을 키우며 내 관리를 할 시간적 여유가 도저히 되지 않았고 돈이 아까워 무엇 하나 맘대로 사 본적 없던 나를 아이들과 남편은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공개 수업에서 친구 엄마의 세련됨과 비교를 하며 배 나온 엄마의 모습이 부끄럽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운동을 시작했다. 사춘기 딸들은 내가 살이 많이 빠지고 나니 이제 조금은 가족구성원으로 인정을 해주는 것 같았다. 아이돌만큼이나 내게도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남편과 자식들은 전혀 몰랐다. 그냥 흔한 아줌마들처럼, 자식과 남편을 위한 희생은 보이지 않고 외모로만 나를 평가한다는 자체에 처음에는 너무 서운했다. 여성의 삶에서 자식을 낳고 기른다는 것은 전부를 의미했다. 그냥 가족이니까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살이 찌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의 상품가치를 제1차 사회적 구성원에게서조차 강요받으며 살아야 하는 현대사회가 얼마나 매정하고 냉정한 것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왜 남학생부터 번호를 매기는지. 남자가 1번이고, 남자가 시작이고, 남자가 먼저인 것이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남자 아이들이 먼저 줄을 서고, 먼저 이동하고, 먼저 발표하고, 먼저 숙제검사를 받는 동안 여자이이들은 조금은 지루해하면서, 가끔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주민등록번호가 남자는 1로 시작하고 여자는 2로 시작하는 것을 그냥 그런 줄로만 알고 살 듯이 -p46

 

 

나 김지연A는 흔한 이름처럼 여느 보통의 가정처럼 살고 있다. 만약 성별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여성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의 진액을 아이하나만 사랑하기도 힘든 세상에 남편 뒷바라지에 직장일, 가사일까지 감당하며 짜내는 일은 확실히 미친 짓이다. 거기에 여성으로서 외모까지 관리하며 살라는 요구는 정말 너무 가혹한 일이다. 사회는 과학적으로 진일보하고 있지만 여성인권에 대해서는 점점 퇴보하는 양상을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아이엄마들에게 벌레 같은 혐오의 의미를 붙여 만든 신조어 맘충과 노키즈존의 등장을 환영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보면 여성혐오라는 키워드는 낯설지 않게 사회 한구석에 꽈리를 틀고 자라 그 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 가운데 수많은 김지영이 생겨나고 있다. 그저 보통의 삶을 사는 대한민국의 여성. 그녀 역시도 나처럼 A.B.C로 출석을 불렸을 만큼 대한민국에서 흔하디흔한 이름이다. 너무 평범해서 그렇다할 이력이 없던 그녀는 알 수 없는 병, 빙의가 되면서부터 존재감이 부여된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이름하여 그녀의 보고서인 셈이다. 남편보다 수학을 잘했지만 집에서 초등수학 문제집을 푸는 아줌마로 살아가는 김지영의 삶, 그것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현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김지영을 보며 여성으로서의 김지연의 삶을 되돌아보는 일은 참으로 서글프고 씁쓸했다. 여성이라서, 들었던 수많은 모욕감들이 되살아났고 여성이기에 받았던 차별들이 생각나 서글퍼졌다. 하지만 태어나 보니 여성이었고 대한민국이었고 나이 드니 아줌마가 되었다. 별 존재감도 없고, 같이 입사한 남성은 임원이 되었지만 수십 년이 흘러도 나는 그저 시다바리 수준의 잡일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짤리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커피 심부름을 하고 집에 가면 아이들과 남편 눈치를 보며 하루를 또 버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보통의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삶이니까. 나는 또 하나의 김지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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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을 가보면 유난히 사람들에게 집착하는 버릇을 지닌 사람이 무리 가운데 꼭 있다.

그들은 모두 오지랖이 넓으며, 자신이 모임의 중심에 있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대화에 항상 누군가와 친근함을 과시하며 자신의 이야기보다 항상 친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은 사람을  좋아해 본적이 없거나, 진심을 다해 상대를 대해 본 적이 없는 부류다. 그런 류의 사람은 사람을 사귀어도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액서서리 같이 생각한다. 그런 류의 사람은 자신이  중심이 없기에 분명 옆에 있는 사람이 자주 바뀌고 자신의 편리에 따라 사람을 사귀는 스타일일 것이다. 항상 사람들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보여주기식의 관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말에도 진실성이 없기에 관계에 문제점이 쉬이 드러나곤 한다. 그런 사람의 주변은 그런 관계의 문제점으로 인한 트러블이 항상 따라다닌다. 한마디로 피곤하게 사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중심이 없는 사람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척이나 공감가는 사자성어다다. 피지상심 -가지를 꺾으면 나무의 속이 상한다.


#피지상심(披枝傷心)
#인문 #정민 #일침

어떤 사람이 과일 나무를 너무 촘촘하게 심었다.
곁에서 말했다.
"그렇게 빼곡하게 심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소."
그가 대답했다.
"처음에 빼곡하게 심어야 가지가 많지 않습니다. 가지가 적어야 나무가 잘 크지요. 점점 자라기를 기다려 발육이 나쁜 것을 솎아내서 간격을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하면 나무도 오래 살고 열매가 많습니다. 게다가 목재로 쓰는 이로움도 있지요. 어려서 가지가 많은 나무는 자라봤자 높게 크지 못합니다. 그제서 곁가지를 잘라내면 병충해가 생겨 나무가 말라 죽고 맙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성호사설'에 나오는 얘기다. 피지상심(披枝傷心)은 가지를 꺾으면 나무의 속이 상한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간격을 두어 널널하게 심으면 곁가지만 많아진다. 안 되겠다 싶어 곁가지를 쳐내니 그 상처를 통해 병충해가 파고 들어 결국 나무의 중심 줄기마저 손상된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 답답하리만치 빼곡하게 심어 운신의 폭을 제한했다. 그러자 어린 묘목은 딴 짓을 못하고 위로만 곧게 자랐다. 제법 자라 수형(樹形)이 잡힌 뒤에 경쟁에서 뒤처진 묘목을 솎아내 간격을 벌려준다.
이미 중심이 굳건하게 섰고, 이제 팔다리를 마음껏 뻗을 수 있게 되자 아주 건강한 과수로 자라고, 곧은 중심 줄기는 옹이도 없어 튼실한 목재로 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성호 자신이 직접 실험해 보니 그의 말이 옳았다. 가지를 자른 곳에 물이 닿으면 썩고, 썩은 곳에 벌레가 생겨 끝내는 나무 속까지 썩고 말았다.

곁가지가 많으면 큰 나무가 못 된다. 열매도 적다. 중심이 곧추 서야 나무가 잘 크고 열매가 많다. 곁가지를 잘라내면 속이 썩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제 중심을 세우기 전에 오지랖만 넓히면 이룬 것 없이 까불다가 제풀에 꺾인다. 작은 성취에 기고만장해서 안하무인이 된다. 자리를 못 가리고 말을 함부로 하다가 결실을 맺기 전에 뽑혀 버려진다. 곁눈질 않고 중심의 힘을 키워야 큰 시련에 흔들림 없는 거목이 된다.

이리저리 두리번대기보다 뚜벅뚜벅 목표를 향해 한발 한발 내디뎌, 많은 열매를 맺고 동량재(棟樑材)가 될 노거수(老巨樹)로 발전한다. 잘생긴 나무는 중심이 제대로 선 나무다. 정신 사납게 이리저리 잔 가지를 뻗치면 중심의 힘이 약해져, 농부의 손에 뽑혀 땔감이 되고 만다.

https://youtu.be/p72drSSffX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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