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버저노믹스 - 융합경제, 제4의 물결
이상문 & 데이비드 L. 올슨 지음, 임성배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현재 제 4의 물결, 즉 융합이라는 거대한 흐름속에 있음을 말하는 이상문박사의 경제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는 왜 싸우는가?
김영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는 왜 싸울까? 지구촌 한 곳에 여전히 전쟁중인 나라가 있다면, 중동에 있는 나라중의 하나일 것이다. 중동 지역의 참혹한 실태를 가끔 보는 다큐멘타리를 통해 만나본 적이 있다. 거기서 어린아이들의 장남감이 진짜 총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었다. 그때 얼핏  머릿 속에 스쳤던  생각은 저주받은 민족이 저런 민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굶어 죽더라도 증오심을 안고 사는 사람들, 세계는  빠르게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었고  급변하고 있는 세계 정세속에서 문명의 혜택은 커녕 어릴 때부터 전쟁을 배우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게 저주 받은 민족으로 비춰지기에 충분했다.  저주 받은 땅과 같은 느낌, 현재 자행되는 국제 사회의 분쟁과 테러, 갈등과 번민의 원상지인 그곳을 집중 조명한 <세계는 왜 싸울까?>를 읽으면서 비로소 중동지역에 대한 실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책은 전부터 읽으려고 구매해 놓고는 읽지 못하고 있던 책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이 주는 낯섬과 이질감 때문이었는데 한편으로는  바쁘게 살다보니 전쟁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컷던 탓이었는데  읽는 동안 나의 이런 무사안일한 태도(무심함이)가  중동의 많은 민족들이 여전히 저주 받은 삶을 답습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많은 반성을 하였다.  

 

단 몇시간 전에 시리아와 인접한 레바논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지지 세력과 반대파의 충돌로 사망자가 속출했다는 긴급뉴스가 타전됐다. 게다가 최근 이란의 핵 개발프로그램과 관련, 이스라엘이 미 대선(11월)이전에 이란을 공격할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려는 이란의 위협과 '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중동 민주화 시위가능성에 대응해 군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중동지역은 여전히 분쟁중이고, 며칠 전만해도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부귀와 영화의 땅이었던 레바논은 오랜 세월 동안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왔다. 평화로웠고 아름다운 섬이 순식간에 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으로  중동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이후 이스라엘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을 탈출한 난민들이 레바논 국경을 넘어오게 되면서 시작된다. 팔레스타인 난민을 받아주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의 침공을 받게 되면서  엉뚱하게도 레바논 자국민들의 싸움을 부추기게 되었는데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거의 이슬람을 믿고 있었고 레바논에도 이슬람을 믿는 국민들이 많다보니 이스라엘 침공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기독교인들에게 옮아가게 되면서 레바논은 자국민들끼리의 종교 싸움이 되어 내전으로 격화되고 여기에 미국이 가세하면서 순식간에 평온하였던 레바논은 전쟁의 나라가 되고 만 것이다.

 

중동 지역하면 종교분쟁을 빼 놓을 수 없는데 그 중심에는 이슬람의 두 종파가 있다. 이들의 오랜 증오의 굴레는 수니파와 시아파라는 종파의 후계문제로 발단이 되었는데 수니파는 전체 이슬람 중 80%~85%를 차지한다면 시아파는 10~15 퍼센트이다. 이라크는 시아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란은 시아파 종주국이라 할 수 있다. 이란은 전국민이 시아파이고 레바논의 헤즈볼라 정당은 시아파이다. 이란 , 이라크, 레바논의 시아파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외의 대부분의 아랍국가들은 수니파이다. 시아파와 수니파는 천오백년이 흐른 지금까지 싸우고 있으며,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서로를 증오하는 저주를 배우며 자란다. 그리고 이들의 분쟁의 중심에는 언제나 이 시아파와 수니파가 있다.

 

아름다운 섬나라지만 열강들의 오랜 식민지였던 동티모르가 독립 9일 천하 후 인도네시아의 식민지가 되면서 불행이 다시 시작할 뻔하였으나 용감한 두 기자에 의해 인도네시아의 폭력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고 유엔평화유지군에 의해 독립을 하게 된 것은 전 세계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인류애를 실천하게 된 소중한 경험으로서 저자는 국제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다른 나라의 아픔에 침묵하지 말고 우정과 용기를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인류애라고 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국제 사회가 침묵하여 불행해진 국가도 있다.  바로 체첸인데 , 동티모르와는 반대로 체첸은 오랜 식민 지배를 했던 러시아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내부 분열에 몸살을 앓던 체첸에서 세계적 규모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체첸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 체첸을 도와주는 세력이 바로 이슬람세력이다.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던 체첸을 러시아가 공격하자, 과격 이슬람 단체들은 이슬람 세력의 투쟁이라는 종교전쟁으로 인식하고 이슬람 전사들과 군자금을 지원한다. 그 결과 체첸은 독립과는 더욱 멀어진 길을 가고 있다.이렇듯 국제 사회의 무관심으로  체첸의 독립은 더욱 힘들어지고 오히려 체첸은 국제 사회에서 테러의 중심지가 됨에 따라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어 버렸다. 동티모르처럼 국제 사회가 단결하여 연합하였더라면 체첸이 이렇듯 테러집단의 형태로는 되지 않았을 텐데 러시아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느라 서로 묵인하고  침묵한 결과는 체첸이라는 테러집단의 탄생이었다.

 

중동의 눈물이라 불리는 쿠르드 족은 온갖 박해와 설움을 겪는 민족으로 나라없이 떠돌아다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민족이다. 4,000만명이나 되는 인구가 이라크, 터키,시리아, 이란 등에 모여 살고 시리아나 레바논에도 흩어져 유목생활을 하는 민족이다. 그러나 이 쿠르드족은 오랜 역사와 고유문화를 가지고 있는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메데족이다.

 

풍부한 자원이 부른 재앙으로 분류된 나라는 이라크와 시에라리온을 통해 볼 수 있는데 이라크의 석유만이 아니라 미국의 무기 회사나 군수회사들을 먹고 사는 수단으로 시작된 이라큰 전쟁이 낳은 비극속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이라크 국민들을 보며, 2006년 사담 후세인이 사망하고 2010년 미군이 전투 임무 종료를 선언한 후의 이라크가  과거 화려한 문명의 상징이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지금의 혼란함을 이겨내고 성장해가길 바라는 저자의 바램을 들을 수 있다. 풍부한 자원이 부른 재앙으로 시에라리온을 빼 놓을 수 없는데 가난한 시에라리온에 다이아몬드가 나면서 내전으로 인해 수만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사지를 절단한 참사는 그 어떤 잔혹드라마보다 더 잔인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는 나의 운명을 , 아니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압니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을 한 명이라도 죽이기 위해 태어났어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들이예요. 그래서 죽어도 괜찮아요.' 라고 한다.

 

인간이 만든 살상무기중에 저자가 소개하는 백린탄과 접속탄의 잔인함은 시에라리온의 참상보다 더 하다. 백린탄은  일종의 화학무기로서 공중에 하얀 연기처럼 퍼졌다가 해파리의 촉수처럼 땅으로 떨어지는데 이때 내려앉는 수많은 불똥들이 사람의 몸에 붙으면 절대 떨어지지 않는데다가 몸에 붙는 순간 몸이 타들어가기 시작하여 장기까지 다 타들어간다고 한다. 이라크 전쟁시 미국의 백린탄 사용은 사담 후세인이 화학무기를 사용하다는 이유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미군이 이라크 사람들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한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소말리아) 나라 사람들은 배가 고파서 미친 것뿐이야. 먹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거야. 앉아서 굶어 죽거나, 해적질이라도 해서 입에 무엇인가 넣고 목숨을 부지하거나 둘 중 하나지."

 

AK-47 소총은 사용하기 쉽고 고장이 적으며, 파괴력이 강하여 세계에서 가장 애용하는 총이다. 이 무기를 발명한 칼라시니코프는 이 총이 온갖 내전과 마역밀매에 사용되며 이 총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매년 25만명이 죽는다는 사실에  "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이 총을 개발했는데, 차라리 농기구를 개발했다면 그처럼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았을 텐데" 라며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더욱 큰 폐혜는 아이들이 쉽게 접하는 게임에 자주 등장하는 총이 바로 이 AK-47 소총이라고 한다. 실제 총을 쏘는 기분과 거의 비슷하여 게임 중독에 빠지면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구분 못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에 있다고 한다.

 

 중동 지역에 관한 책들을 보면 이들의 무모한 싸움은 대체 누구를 향해 있는 걸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힌다. 알수 없는 증오심, 이 증오심은 때론 미국으로 때론 자국민들에게로 때론 스스로에게 향해 있다. 천 오백년을 싸우고 있는 이슬람의 시아파나 수니파도 이제는 지칠 때가 된 것도 같은데 증오심은 더해가고 있다. 가난에 굶주려가면서도 빵을 사기보다는 무기를 사는 이들, 이들의 싸움의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꼬여있다. 지구촌의 진정한 평화가 오는 그날은 아마도 중동지역에 평화가 오는 순간이 아닐까 한다. 저자가 이 책을 펴낸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 아이들이 인류애와 인권을 고민하고 세계의 다른 아이들을 생각해보는 계기라고 밝히듯이 이 책으로 진정한 인류애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고민하고 동참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로라 리프먼 지음, 홍현숙 옮김 / 레드박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친근하다면 근사한 말이겠지만, 과거 자신을 납치했던 남자가 “나는 네가 어디 있든지 널 알아볼 수 있어.” 라는 편지를 보내왔다면,  그 불쾌함과 공포를 어떻게 견딜수 있을까. 처음 이 책을 보면서 추리소설이라 생각했는데 굳이 분류하자면 심리 스릴러이다. 사건보다는 주인공의 심리에 치중하여 전개하고 있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액자식 구성이다. 소녀 엘리자베스가 납치 당하던 열 다섯 살의 그 날과 현재  서른 여덞의 나이이며  두 아이를 둔 엄마인 엘리자의 이야기가 과거-현재-과거-현재를 넘나든다.

 

 

 

 이 소설의 모티브는 작가가 수많은 여성을 강간하고 살해했는데 딱 한 사람만을 살려둔 실화가 발단이 되었다. 살아남은 희생자의 삶이란 어떤 삶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은 현 사형제도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져준다. 여전히 사형제도에 존폐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지만, 이 책은 사형제도를 찬성이나 반대가 아닌,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이다. 비유하자면, 포스트모던 비평의 한 지점인 교차모순의 지점처럼 , 이것도 저것도 아니지만 상당히 문제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에 다가가 미학적으로 형상화 하였다.  

 

열 다섯,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납치된 한 여자. 엘리자베스와 잘생겼지만, 키가 작아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월터. 월터가 한 여자를 죽이고 길가에 파묻고 있을 때, 그 장면을 다 봤을 것이라 생각하고 엘리자베스를 태워 다니게 되면서 이 둘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신의 몫으로 나온 달걀을 힘겹게 삼키느라 애쓰고 있는 이 소녀의 어떤 면이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이 여자애는 나 같아.'

월터는 속으로 생각했다. 온순하고 상냥한데다 최선을 다하지만, 사람들은 이 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세월이 흘러, 엘리자베스에서 엘리자로 살아가고 있으며 사랑스런 아들과 딸, 남편 피터와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엘리자에게 월터로부터 도착한 편지는 엘리자를 다시 과거 엘리자베스로 돌려놓는다. 엘리자가 되어도 매일밤 찾아오는 살해당하였던 소녀들과 월터에게 납치되어 함께한 기억으로 엘리자는 다시 고통의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다행히  남편 피터는 단 한 마디로 위로를 하는 재주가 있었다.

 

“우린 왜 번개가 하필이면 그곳을 쳤는지 머리 싸매고 고민하지 않잖아.”

 

 게다가 희생자 중에 유일한 생존자라는 이유로 엘리자는 마지막 희생자의 어머니였던 홀리의 어머니 트루디에게는 따가운 눈총을 받고 ,  

 

‘왜 당신 아이들은 모두 살아 있는 거지? 당신이 이렇게 특별한 이유가 뭐야?“

 

인권 운동가인 바버라 라포투니는 월터가 오랜 종신형 끝에 사형을 선도받자 월터를 구명하기 위해 엘리자를 이용하려 한다.

 

바버라가 분개하는 것은 바로 엘리자의 .......... 평온함이었다.

 

소위 인권운동가라 하는 사람이 성폭행범이자 수많은 소녀들을 살해했는데 단지 '과거'라는 이유로 '현재'의  월터를 구하기 위해서  유리한 증언을 해달라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게 아닌가 싶다. 희생자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엘리자는 이렇듯 여러 사람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이 모습이 바로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으며,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곳이 우리가 매순간을 생활하고 부딪혀야 하는 사회라는 곳이다.

 

사형제도를 두고 갑론을박은 여전하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사형제도에 얽혀있는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 작가의 섬세한 필치는 놀라우리만치 섬세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바버라가 월터를 위해 구명운동을 하지만, 바버라는 월터를 완전히 이해했을까. 그리고 그런 행동이 생존자인 엘리자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사실을 몰랐고,  어여쁜 딸 홀리를 잃은 엄마의 마음을 엘리자는 이해할 수 없었기에 희생자 엄마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제러드라는 작가는 보이는 것이 진실이라는 듯, 엘리자와 월터를 사랑하는 사이로 소설을 쓴다. 결국 그것이 보이지 않는 폭력과 다름없다는 것을 ,  이들 모두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렇듯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누구도 서로를 이해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위해서 이해하는 척 할 뿐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 나가고 있지만, 소설 그 이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 상태까지 유추해볼 수 있도록 생생하게 묘사가 진행된다. 그리고 인간이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이 저지르는 오류가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존재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납치당하여 극적으로 구조되었지만, 엘리자를 기다리는 무수한 가해자들처럼, 우리가 매일 선善이라는 이름으로 아무 생각없이 저지르게 되는 사소한 무례함과 불친절을 떠올려보면 알게 모르게 우리는  모두 피해자이자 가해자인지도 모르겠다. 말그대로 이것도 저것도 아니지만 상당히 문제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을  미학적으로 형상화 시킨 소설이다. 우리는 그  교차모순 지점에 서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랑 신호등 - 포스트모던 비평의 지점
최용호.신정아 지음 / 인간사랑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와 철학, 비평을 교차모순이라는 지점의 토포스로 사유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랑 신호등 - 포스트모던 비평의 지점
최용호.신정아 지음 / 인간사랑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랑신호등은 이 책의 테마라기보다 토포스이다. 운전을 하다보면 노랑 신호등 앞에서 갈등 할 때가 많다. 급한 일이 있으면 그냥 밟아서 가지만, 시간이 촉박하지 않으면 노랑 신호등에서 멈추기도 한다. 이렇듯 노랑 신호등은 갈 수도 설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서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순간은 전적으로 운전자의 결정에 달려있는 순간이다. 이 순간을 어떤 결정 시스템 속에 기입된 결정 불가능성의 지점이다. ‘가다’ 도 ‘서다’도 아닌 결정 불가능한 바로 이 유예의 순간이야말로 . ‘가다’인지 ‘서다’인지 알 수 없는 비식별역이야말로 오늘날 포스트모던, 아니 포스트-포스트모던 비평이 주목해야 할 지점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텍스트에는 해석의 어느 한 순간에 “해석학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위반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해석을 진행시킬 수 없는, “저자와 해석자를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결정 불가능의 지점” , 이른바 비식별역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포스트모던 비평의 지점이란 다름 아니라 바로 이러한 교차모순의 중지효과가 발휘되는 하나의 토포스를 가르킨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산출한 수많은 철학적, 문학적,정치적 , 미학적, 윤리적 담론들은 이를테면 바로 이 토포스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토포스 : 문학에서 몇 개의 모티프들이 자주 반복되어 이루어내는 한 고정형이나 ‘진부한 문구(literally commonplace)’를 지칭하는 개념. )

 

 인터넷과 통신기술의 발달로 더 이상 문자언어와 구술언어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현실 세계와 사이버세계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현대 사회는 ‘문자적이지도 구술적이지도’,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비현실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은 사회라고 할 수 있겠다. 정치영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안철수 현상’을 가르켜 혹자는 “탈정치의 정치” 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과거 ‘보수 대 진보’‘우파 대 좌파’ 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우파적이지도 좌파적이지도 않은 ’ 정치의 양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포스트모던 비평의 실험무대는 앞에서 ‘~도 아니고~도 아닌‘ 으로 정식화한 비식별식역에 자리 잡고 있다. 결정을 유예함으로써 재촉하는, 특별한 의미가 주어지지 않으면서 강제력이 발휘되는 결정 불가능성의 지점 말이다. 이렇게 포스트모던 비평의 지점으로 정의한 ‘~도 아니고 ~도 아닌 ’은 상술한 기호 사각형의 사례가 예시하듯 이른바 교차모순에 기초한 정식이다. 교차모순의 공간이 과연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책에서는 소쉬르와 들뢰즈의 ‘차이’ 라캉의 ‘실재’ 아감벤의 ‘수용소’를 사례로 교차모순의 공간을 예시하고 있다.

 

 

랑시에르가 직접 언급한 바 ‘‘~도 아니고~도 아니다‘라는 이중부정, 즉 교차모순의 운동은 “더 이상 권력의 이전”이 아니라 권력자체를 무력시킴으로써 “새로운 경험양식”에 대한 실험을 위해 마련된 무대를 펼쳐보인다. 이 무대는 달리 말해 미적인 자유로운 놀이“가 행해지는 역량의 무대이기도 한데 최근 영화에서도 이런 교차모순의 토포스를 살펴 볼 수있다. 책의 2부에서는 철학텍스트들을 메타비평하고, 3부로 넘어가 영화와 문학 텍스트를 직접 분석해보는 비평작업을 하는데  <김씨표류기><로드><고지전> <빈집>등 이 네편 모두 교차모순이라 부를  수 있는 포스트모던 비평의 지점을 미학적으로 잘 형상화하고 있는 이유이다.  

 

가장 쉬운 예로 영화 <고지전>의 애록고지는  ‘~도 아니고~도 아닌‘이라는 이중부정으로 정식화한 교차모순의 지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곳에서는 남이 그냥 남으로, 북이 그냥 북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남과 북이 화해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손을 맞잡는 것도 아닌다. 여전히 국군과 인민군은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매순간 한치의 양보도 없이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지만 이제 이 싸움은 더 이상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고지전>의 고지는 기존의 한국전쟁 영화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공간, 즉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닌 상당히 문제적인 지점, 말하자면 전쟁의 실재이다. 고지전에 등장한 애록고지, 즉 외상의 실재이자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토포스를 경계의 공간,비결정의 공간,역량의 공간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차례로 분석함으로써 이 지점이 지닌 포스트모던 비평의 함의를 밝힌다. 고지전이 주목한 생소한 토포스 -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니라는 교차모순의 토포스는 새로운 역량을 실험하는 놀이터가 될 것이다. 고지전의 마지막 장면은 전쟁의 마지막 모습이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미학적으로 완벽하게 형상화해낸다. 여기서 미학은 더 이상 놀이의 미학이 아니다. 애록의 진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이다.

 

랑시에르의  “무질서에 대한 생각으로서의 미학," 달리 말해 미학의 정치는 체계의 작동을 중지시킴으로써 즉각적으로 체계의 체계성을 문제 삼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체계성 자체를 일종의 유희의 대한으로 만듦으로써 새로운 역량에 대한 실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이 고지전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새로운 정체가 아니라 정태, 즉 새로운 감각적 존재방식에 대한 실험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교차모순의 지점, 즉 포스트모던 비평의 지점은 이같은 정치미학적 실험이 행해지는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상당히 혁명적이면 근본적인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 《노랑 신호등》의 부제인 포스트모던의 비평을 보고 무척 부담스러웠던 책이었다. 그러나, 저자의 스토리텔링이 워낙 뛰어난데다가 철학자들의 비평과 영화비평은 무척 흥미롭게 읽힌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종말을 주장하면서 현 시대를 새로운 사유를 시작해야 하는 지점이자 ,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교차모순의 지점 , 즉, 이중부정의 교차모순을 통해 열린 해체적 공간을 정치화함으로써 새로운 것들의 도래를 가속화하는 것과 더불어  포스트트모던을 점검하고 있는 체계적인 사유체계는 앞으로 펼쳐질 포스트-포스트모던 비평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케빈 2015-11-19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에서의 토포스는 영화의 클리셰에 비유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