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 신호등 - 포스트모던 비평의 지점
최용호.신정아 지음 / 인간사랑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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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신호등은 이 책의 테마라기보다 토포스이다. 운전을 하다보면 노랑 신호등 앞에서 갈등 할 때가 많다. 급한 일이 있으면 그냥 밟아서 가지만, 시간이 촉박하지 않으면 노랑 신호등에서 멈추기도 한다. 이렇듯 노랑 신호등은 갈 수도 설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서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순간은 전적으로 운전자의 결정에 달려있는 순간이다. 이 순간을 어떤 결정 시스템 속에 기입된 결정 불가능성의 지점이다. ‘가다’ 도 ‘서다’도 아닌 결정 불가능한 바로 이 유예의 순간이야말로 . ‘가다’인지 ‘서다’인지 알 수 없는 비식별역이야말로 오늘날 포스트모던, 아니 포스트-포스트모던 비평이 주목해야 할 지점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텍스트에는 해석의 어느 한 순간에 “해석학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위반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해석을 진행시킬 수 없는, “저자와 해석자를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결정 불가능의 지점” , 이른바 비식별역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포스트모던 비평의 지점이란 다름 아니라 바로 이러한 교차모순의 중지효과가 발휘되는 하나의 토포스를 가르킨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산출한 수많은 철학적, 문학적,정치적 , 미학적, 윤리적 담론들은 이를테면 바로 이 토포스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토포스 : 문학에서 몇 개의 모티프들이 자주 반복되어 이루어내는 한 고정형이나 ‘진부한 문구(literally commonplace)’를 지칭하는 개념. )

 

 인터넷과 통신기술의 발달로 더 이상 문자언어와 구술언어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현실 세계와 사이버세계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현대 사회는 ‘문자적이지도 구술적이지도’,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비현실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은 사회라고 할 수 있겠다. 정치영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안철수 현상’을 가르켜 혹자는 “탈정치의 정치” 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과거 ‘보수 대 진보’‘우파 대 좌파’ 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우파적이지도 좌파적이지도 않은 ’ 정치의 양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포스트모던 비평의 실험무대는 앞에서 ‘~도 아니고~도 아닌‘ 으로 정식화한 비식별식역에 자리 잡고 있다. 결정을 유예함으로써 재촉하는, 특별한 의미가 주어지지 않으면서 강제력이 발휘되는 결정 불가능성의 지점 말이다. 이렇게 포스트모던 비평의 지점으로 정의한 ‘~도 아니고 ~도 아닌 ’은 상술한 기호 사각형의 사례가 예시하듯 이른바 교차모순에 기초한 정식이다. 교차모순의 공간이 과연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책에서는 소쉬르와 들뢰즈의 ‘차이’ 라캉의 ‘실재’ 아감벤의 ‘수용소’를 사례로 교차모순의 공간을 예시하고 있다.

 

 

랑시에르가 직접 언급한 바 ‘‘~도 아니고~도 아니다‘라는 이중부정, 즉 교차모순의 운동은 “더 이상 권력의 이전”이 아니라 권력자체를 무력시킴으로써 “새로운 경험양식”에 대한 실험을 위해 마련된 무대를 펼쳐보인다. 이 무대는 달리 말해 미적인 자유로운 놀이“가 행해지는 역량의 무대이기도 한데 최근 영화에서도 이런 교차모순의 토포스를 살펴 볼 수있다. 책의 2부에서는 철학텍스트들을 메타비평하고, 3부로 넘어가 영화와 문학 텍스트를 직접 분석해보는 비평작업을 하는데  <김씨표류기><로드><고지전> <빈집>등 이 네편 모두 교차모순이라 부를  수 있는 포스트모던 비평의 지점을 미학적으로 잘 형상화하고 있는 이유이다.  

 

가장 쉬운 예로 영화 <고지전>의 애록고지는  ‘~도 아니고~도 아닌‘이라는 이중부정으로 정식화한 교차모순의 지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곳에서는 남이 그냥 남으로, 북이 그냥 북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남과 북이 화해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손을 맞잡는 것도 아닌다. 여전히 국군과 인민군은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매순간 한치의 양보도 없이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지만 이제 이 싸움은 더 이상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고지전>의 고지는 기존의 한국전쟁 영화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공간, 즉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닌 상당히 문제적인 지점, 말하자면 전쟁의 실재이다. 고지전에 등장한 애록고지, 즉 외상의 실재이자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토포스를 경계의 공간,비결정의 공간,역량의 공간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차례로 분석함으로써 이 지점이 지닌 포스트모던 비평의 함의를 밝힌다. 고지전이 주목한 생소한 토포스 -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니라는 교차모순의 토포스는 새로운 역량을 실험하는 놀이터가 될 것이다. 고지전의 마지막 장면은 전쟁의 마지막 모습이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미학적으로 완벽하게 형상화해낸다. 여기서 미학은 더 이상 놀이의 미학이 아니다. 애록의 진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이다.

 

랑시에르의  “무질서에 대한 생각으로서의 미학," 달리 말해 미학의 정치는 체계의 작동을 중지시킴으로써 즉각적으로 체계의 체계성을 문제 삼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체계성 자체를 일종의 유희의 대한으로 만듦으로써 새로운 역량에 대한 실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이 고지전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새로운 정체가 아니라 정태, 즉 새로운 감각적 존재방식에 대한 실험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교차모순의 지점, 즉 포스트모던 비평의 지점은 이같은 정치미학적 실험이 행해지는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상당히 혁명적이면 근본적인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 《노랑 신호등》의 부제인 포스트모던의 비평을 보고 무척 부담스러웠던 책이었다. 그러나, 저자의 스토리텔링이 워낙 뛰어난데다가 철학자들의 비평과 영화비평은 무척 흥미롭게 읽힌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종말을 주장하면서 현 시대를 새로운 사유를 시작해야 하는 지점이자 ,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교차모순의 지점 , 즉, 이중부정의 교차모순을 통해 열린 해체적 공간을 정치화함으로써 새로운 것들의 도래를 가속화하는 것과 더불어  포스트트모던을 점검하고 있는 체계적인 사유체계는 앞으로 펼쳐질 포스트-포스트모던 비평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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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케빈 2015-11-19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에서의 토포스는 영화의 클리셰에 비유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