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평점 :
한국인인지만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일본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이 두 가지가 갖는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옳고 그름을 논하는 가치명제와는 다르게 타고난 '조국'은 사실명제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인 서경식은 이 두 나라에 속하면서도 두 나라 모두에서 '주변'과 '경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성찰한다. 그 성찰의 도구가 바로 글쓰기이다.
양자 사이의 경계에 서서 주위 사람들에게 ‘타자’인식을 촉구하려는 동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동시에, 이 세계 사이에서 온몸이 찢기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행위를 통한 자기 인식의 시도이기도 했다. -p25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객관하여 바라보는 것, 그것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디아스포라인으로서 최선의 선택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학갔던 두 형들이 정치범으로 체포되자 저자의 정체성은 더욱 혼미해진다. 일본의 마이너리티로 살아가고 있던 저자에게 형들에게 내려진 무기징역과 징역 7년의 의미는 한국의 현대사를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시도를 하게 한 신호탄이었다.
한국의 현대사를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라는 프레임의 역사를 새롭게 그려야 한다. 저자는 '동아시아'란 근현대 역사에서 일본이 침략 전쟁 혹은 식민지 지매를 했던 지역을 의미한다고 한다. 미얀마를 경계로 동쪽에 위치하는 아시아 국가 중 일본의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는 없다. 따라서,일본은 근현대사에서 대외 침략자라는 오명을 씻을 수도 없기에 동아시아와 함께 평화를 구축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다.
저자는 시가 시대와 궤를 같이하여 왔다는 방증으로 시와 현대사를 반추한다. 저자에게 영향을 미친 시들은 김수영의 [고궁을 나오면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와 같은 저항시들이었고 글쟁이로서의 숙명을 깨우쳐 주었던 시인들이었다. 조국의 분단과 민족의 이산이라는 현실에서 저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 그것은 글쓰기였다.
일본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지배층의 이야기에 대한 , 재일조선인이라는 마이너리티 입장의 대항적 이야기를 제시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넓은 강과 호수에 둘러싸여 살던 조선은 식민지배라는 홍수의 시대에 일본이라는 수레바퀴 자국에 고여 있는 물이 되었다. 강호로부터 떨어져 나온 수레바퀴 자국 웅덩이 속에 남겨진 코리안 디아스포라였던 저자는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밝히듯 말라가는 웅덩이 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미는 붕어의 간절함으로 글을 써왔다고 한다. 루쉰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은 일본의 시인 나카노 시게하루의 비평을 통해 저자는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보았다고 한다. 바로 그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시대의 힘이자 '시'가 가진 본질이다.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3부 <조선의 시인들>은 시의 힘이 무엇인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이다.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민중을 무력으로 진압하더라고 결코 평화를 불러올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가 가르쳐주듯이 식민지 탄압에서도 독립운동 선언서를 낭독하고 저항시를 쓴 시인들- 이상화, 윤동주, 김지하-에 이어 2000년대의 정희성까지 시에 담긴 시대의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시인은 침묵해서는 안되는 사명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디아스포라와 연대할 수 있는 감성의 토대이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구축해 줄 수 있는 단초이다.
디아스포라는 말에는 역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재일조선인을 설명하려면 잊혀지지 않는 과거의 한 페이지였던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대가 낳은 민족의 비극은 조국 분단과 민족 이산이라는 디아스포라들의 탄생이었다. 저자는 역사가 낳은 민족 이산에서 등을 돌린다는 것은 동아시아 평화를 지키기 위한 기본적 전제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며 근대사에 대한 성찰적 자세를 권고한다.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자각과 일본인들이 지향해야 할 점등을 문학에서 찾는 시도가 무척 신선했던 비평집이다. 역사와 문학을 외올실로 엮은 서경식만의 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