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훔친 여름 김승옥 소설전집 3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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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소설 <서울 1964, 겨울>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안 형, 파리를 사랑하십니까?"

 

"아니오. 아직까진……" 그가 말했다. "김 형은 파리를 사랑하세요?"

 

"."라고 나는 대답했다. "날 수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날 수 있는 것으로서 동시에 내 손에 붙잡힐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날 수 있는 것으로서 손안에 잡아본 것이 있으세요?"

 

"가만 계셔 보세요." 그는 안경 속에서 나를 멀거니 바라보며 잠시 동안 표정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없어요. 나도 파리밖에는……"

 생면부지의 대학생들이 만나 나눈 대화치고는 싱겁기 짝이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떨쳐지지가 않는다. 인생에서 여름이라 할 수 있는 청춘들이 만나는 대화가 지나치게 무력했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인생의 여름 , 즉 청춘에는 아픔을 통과해야 얻어지는 삶의 결실이 있다. 하지만 이 철학도 없고 깊이도 없는  '파리를 사랑하십니까' 라는 대화는 1960년대 젊은이들이 느꼈던 상실감과 비극감을 엿보게 하는 일종의 허무개그가 고장난 청춘들의 거울인 것만 같아 허탈했다.  

 

  오늘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하나로 , 그런대로 살아지게 되는 청춘이라는 여름을 김연수는 그의 책  <청춘의 문장들>에서 '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인생이란 취하고 또 취해 지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해가지지 않는 여름날 같은 것이라고.

 

  김승옥의 '내가 훔친 여름'은  그런 청춘의 이야기다. 살아 온 생애가 따뜻한 봄날만 있었던 서울대생들이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  일등만 했던 우등생들이 순식간에 열등생이라는 뺏지를 달게 되면서 정신분열증을 앓게 된다. 책의 주인공  '이창수'는 그 가운데에서도 정신분열증 탓인지 대학부적응 탓인지 몰라도 교수님의 심부름 이만원을 삥땅친다. 처음으로 맛본 일탈이후  곧바로 시골집으로 내려와 할머니 방에서 무위도식하며 시간을 죽이던 이창수에게 손님이 찾아오는데.  남루한 옷에 서울법대 뺏지를 달고 찾아온 국민학교 동창생 장영일의 방문은 그야말로 뜻하지 않게 찾아온 인생의 여름처럼 갑작스러웠다.

 

 

암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며 , 사기꾼 냄새를 펄펄 풍기는 장영일의 권유로 여행을 떠나게 된 이창수는 기차를 탄 순간 ' 기차가 속력을 달릴수록 그리움처럼 가슴 한 곳을 두드리기 시작하는' 충동을 느끼며 차표없이 여수까지 다다른다. 기차안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들과 다양한 사연들, 돈 한 푼 없지만 늘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장영일을 따라 들어간 다방에서 우연히 만난 선배들에게 거짓말을 해서 얻은 카바레 인테리어 작업까지, 나른하고 지루한 봄날의 연속이었던 이창수의 인생은 갑지가 스펙터클한 어드벤처로 변한다.  

 

 

장영일은 , 비록 서울대 뺏지를 수십 개를 지니고 다니지만, 비록 돈 한푼 없어 거짓말을 밥 먹듯 하지만, 비록 사기꾼의 그것과 다름없지만 , 장영일이 없었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여름과 대면하게 된다. 이창수는 이후 더이상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어 스스로를 겨울에 유폐시키지 않는다. 아프니까 청춘일 수 있는 괴로운 휴식을 이제 한여름의 태양빛에서 마주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름일까? 그래 이것이 여름이다. 비치파라솔, 눈부신 백사장, 검푸르고 부드러운 파도, 빨간 수영복, 풍만한 아가씨의 웃는 얼굴, 하얗고 가지런한 이빨, 짧기 때문에 유쾌한 자유, 그것들은 나의 여름이 아니다. 나의 여름은, 차표 없어 불안한 기차여행, 신분을 속여 맡은 일거리, 땀내음에 찌든 아가씨, 겁탈같은 유혹, 비린내 나는 여인숙에서의 정사, 그러고 나면 기다리고 있는 괴로운 휴식과의 만남일 뿐이다

 

모든 청춘의 이마 위에는 비극의 꽃무늬가 아로새겨져 있다.(p421) 청춘이 그렇게 빨리 가버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뜨겁고 격정적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보일 듯 보이지 않으며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젊음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문득 아프더라도 선연한 자국을 남긴 여름의 기억을 남겨 놓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청춘의 특권이자, 여름이 안겨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라는 것을 ,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김승옥이 그리는 청춘의 무늬는 그런 찬란한 계절의 푸르름이다.

 

무엇을 일컬어 자유라고 하는지 처음으로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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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5-07-09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림님~~잘 지내시지요~?^^
바뀐 프로필 사진의 드림님 얼굴이, 청초하면서도 아릿답기 그지 없습니다~~
`내가 훔친 여름` 제목부터 확~마음에 들어오네요~ㅎㅎ
시원하고 멋진 여름 되세요!

드림모노로그 2015-07-09 10:3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아고.... 이렇게 ....오랜만에 뵙게 되오니 감개무량입니다 ...ㅎㅎ
잘 지내고 계시지요?
전 2015년도가 너무 바빠서 정신 못 차리게 살았습니다...
알라딘 서재도 간만에 둘러보고 있구요 ㅎㅎㅎ
7월 되어서야 눈팅이란 것도 해보네요 ^^
어찌 지내시는지요. 늘 여전히 멋진 나날 만들고 계시지요? ~~
언제나 감사드리고, 우리 올 여름도 멋지게 보내요 ^^

드림모노로그 2015-07-09 10:39   좋아요 0 | URL
파리를 사랑하면서 ㅋㅋㅋ~~

appletreeje 2015-07-09 10:50   좋아요 0 | URL
예~~파리를 사랑하면서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