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 윌컴퍼니(윌스타일)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20세기 전문 미술사학자인 카롤린 라로슈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연구원으로 재작한 데 이어 출판사의 편집책임자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책의 편집이나 도판이 굉장히 잘 되어 있다. 저자는 작품들 사이의 상호작용, 특히 회화 분야를 중심으로 예술 자산을 풍성하게 만들어준 상호작용을 해독하고자 회화거장들의 작품을 배열하여 재구성하였다. 어떤 작품은 오십년의 시차로 어떤 작품은 오백년 사이의 시차를 보여주며 작품 상호간의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들은 거장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품 속의 문제점을 폭로하며 시대의 '화두'를 읽어내는 예술성을 지닌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어떻게 보면 모두가 베끼고 베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 같은 방식이 예술을 진보하게 해준다면 말이다!

 

 저자는 수 세기의 간격을 두고 세상에 나온 작품들의 혈연관계를 확인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라 밝히고 있다.  인류에게 있어 르네상스는 영혼에 세례를 받는 시기라 할 수 있다. 특히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거장들의 작품은 전 세기를 통틀어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장을 내민다. 그렇기에 르네상스시대를 풍미하였던 화가들의 그림은 모방의 가장 좋은 예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르네상스의 걸작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모사와 패러디의 대상이기도 하다.

20세기 팝 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은 한 가지 혹은 몇 가지 색으로 찍어내거나 광고 로고를 삽입하는 당 다양한 버전의 최후의 만찬을 보여준다. 레오나르도와 앤디 워홀, 두 작품의 시차는 무려 490년이다.  4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 완성된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림의 입체감을 높이기 위해 새로 사용하였던 트룅프외유기법으로 그렸지만 세월이라는 풍화에 안료가 벗져지고 복원이라는 명목으로 가해진 세척과 수정으로 작품이 훼손되었다. 앤디 워홀의 다양한 버전의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보여주고자 했던 입체감을 최대한 살리며 작품인물들의 풍부한 표정과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는 평을 받았다. 전작을 능가할 순 없겠지만 작품의 독창성은 앤디 워홀을 시각주의 예술 운동의 선구자로 만들어 주었다.

 

 

 

 

 

 

 

 

르네상스의 작품들은 '휴머니즘'의 토대를 바탕으로 인간의 육체를 아름답게 그렸을 뿐 아니라 화려함이 절정에 달해있다. 자화상에서도 과하게 미화시키거나 신화적인 묘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십년의 시차로 그려지는 <시스티나의 성모>는 살바도르 달리에 의해 마술적인 '귀'라는 그림으로 재탄생 되는데 라파엘로의 그림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들었던 성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살바도르 달리는 '시스티나 성모'의 그림이 표현하고자 하였던 문제점을 '귀'안에 담음으로써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400백년의 간극사이에 독창적으로 작품을 재해석하는 능력은 살바도르 달리를 초현실주의의 거장으로 만들어주었다.

 

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윌리언 터너의 <생자르역> 이었다. 윌리엄 터너와 클로드 모네, 라이오넬 월든 이 묘사한 생자르역의 기차는 템스 강을 전속력으로 달리거나 정차하려는 모습, 전기 불빛을 받으며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 등 전혀 다른 모습의 기차를 그리고 있다. 생자르 역의 시차는 50년 간격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인류사에 첫 등장을 하였던 기차를 악마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던 당시대에 기차를 좋아하였던 윌리엄 터너는 자신의 열정과 애정을 담아 기차를 찬양하다보니 낭만적인 색채를 지니게 된 것이다. 산업화가 발달해 가면서 기차의 수혜를 많이 받았던 파리 사람들은 기차의 출현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모네는 기차 주위의 열기를 자연에서 발견하였던 서정성을 실어 화폭에 담았던 것이다.  이후 20세기의 기차 모습은 라이오넬 월든에 의해서 새롭게 재생되어 지는데 기차 주변의 복잡한 철로와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생자르역을 가득 메우고 있는 풍경을 통해 모방을 넘어 시대를 창조하고 있는 예술의 변모를 볼 수 있다. 

 

시대의 간극을 채워주는 그림의 배열은 이렇게 저자의 남다른 작품의 해석과 비교 분석이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보다는 모방이 원작이 지녔던 문제의식들을 더 리얼하게 표출하고 있음을 볼 때 모방은 예술의 '각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융합의 시대라 하여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라는 전도서 말씀을 말하지 않아도 새 것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은 이미 새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있는 개별적인 것들의 조합이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이 책은 모방이라 하기보다는 '융합'의 관점으로 보여지기도 했다. 모방과  표절의 기준과 잣대는 여러가지 차이가 있지만 모방과 표절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경계는 작품의 화두, 즉 문제의식을 얼마나 독창적으로 비트는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예술가들의 모방은 창조라 불리워 마땅하다.

 

"창작은 기득권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것이며, 정해진 수명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모리스 메를로퐁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