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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모래 - 2013년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구소은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난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바다에 사는 이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내게 바다는 태곳적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성스러움의 상징으로 느껴지곤 하였다. 그러나, 만약 바다에서 나고 자랐다면, 바다를 한없이 아름답게만 바라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파죽지세로 몰아치는 바다의 무서움은 모르고 그저 아름답고 잔잔한 바다만을 기억하기 때문에 바다를 동경할 수 있는 것이다. 일년중에서도 여름에나 바다를 찾아가기에 바다는 항상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물異物 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전 우연히 보게 된 구글지도의 대한민국은 바다가 이물이 아닌, 너무도 친숙하다는 사실은 은연중에 깨달았다. 위성 상의 한국과 일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너무 가까운 거리였었고, 대한민국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섬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에 다시한번 놀라워 했다. 게다가 일본과 한국사이를 잇는 작은 점인 제주도의 시계視界는 더욱 작게 느껴졌었다. 이 모든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온 이유는 바로 이 책 《검은 모래》를 읽으면서 바다를 떠올리면서 였다.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제주 잠녀들의 억척스러운 삶의 굴레가 한국과 일본에서 어느 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의 삶이, 마치 우리 역사책 한귀퉁이에 쓰여 있었으나 지워졌던 글씨를 복원한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바다가 아무리 험악하고 모질게 굴어도 절대로 원망하지도 말고 탓하지도 말아라. 바다는 말이다. 우리 잠녀들의 목숨 줄을 쥐고 있으니까. 우리네 인생이 바다에 달렸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물질로 하루 벌어 먹고 살고 , 물질로 생명을 이어나가는 잠녀의 운명은 바다에 달려 있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섬속의 섬인 우도에서 태어난 잠녀 구월의 운명도 그러하였다. 제주에서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자체가 바다와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을 천형으로 삼고 살아야 하였지만, 구월의 삶의 추가 더욱 무거운 것은 현대사의 굴곡진 흐름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태어나자마자 나라를 잃은 구월의 운명은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업嶪을 잇는데 개인의 삶이라는 씨줄과 현대사의 날줄이 서로 촘촘하게 엮이며 비운의 삶을 직조해간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어민들의 잦은 침탈로 바다에서 나는 양식이 씨가 마르게 되자, 일본의 침탈로 조각나는 조선을 뒤로 한채, 굶어죽지 않기 위해 타게 된 일본의 기미가요마루 연락선은 구월에게 새 출발을 기대하게 하지만, 일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식민지 국민의 설움과 차별, 고된 노동뿐이었다.
일본의 연이은 침략은 멈출줄 모르고 만주에 이어 중국, 한반도, 나아가 태평양까지 뻗어가면서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그 희생자 가운데에는 구월의 남편 박상지도 있었다. 일본의 패전소식과 더불어 36년만에 광복한 한국의 기쁨은 잠시 남북분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여 생떼 같은예비 사위 한태주를 전쟁터에 떠나보낸 구월은 처녀몸으로 임신한 해금을 오래 전부터 짝사랑하던 청각장애인 후쿠오에게 시집보내는 것으로 아이에게 성姓을 만들어준다. 태평양전쟁의 후유증과 전쟁의 상흔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흘러가 버렸지만, 한태주와 해금의 핏줄인 건일은 이름도 모르는 한국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살뜰한 정으로 키워준 일본인 양아버지 후쿠오만을 핏줄로 인정하며 한국인이라는 것을 부정하면서 해금과 갈등을 빚고, 일본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철저히 일본인이 되고자 하며 딸 미유에게조차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까지 한다. 일본 극우파와의 사랑으로 한국인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 미유는 아버지 건일과는 다르게 오히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다. 한국인 할머니 해금에게서 한국인의 음식과 전통을 배우며 한국어 공부를 새로 시작한 미유의 모습에서 한국과 일본사이에 존재하던 거대한 장벽을 허무는 느낌을 받게 된다. 구월에 이어 해금, 건일, 미유에 이르기까지 잠녀 가족의 장장 4대에 걸친 디아스포라의 삶은 시간이라는 연고로 치유되어 가고 있었다.
하나는 흐르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고이는 시간이다.
제주4.3 사건은 한국전쟁 중에 발생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의 대표적인 사건이다. 제주사건은 단순히 피해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한국인 전체의 역사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디아스포라로서 그리고 있는 재일조선인의 삶은 우리 역사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인권문제나 다름없다. 흐르는 시간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고여있는 시간이란, 시대의 흐름 속에 간직되어 있는 우리의 역사를 말한다. 흐르는 시간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은 거대한 시간의 흐름앞에서는 아주 개인적이고 추상적이지만, 그 시간을 지배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흐르는 시간과 고여있는 시간 사이에 존재하며 '삶'을 꾸려가는 인간의 시간은 한시적이다. 제주도 잠녀의 4대에 걸쳐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은 전쟁의 상흔들조차 아물게 하고 아들 건일의 상처또한 치유하게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희생자들의 인권은 여전히 시간 속에 고여있는 중이다. 그러나, 작가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제주도 잠녀들의 삶에 국한하지 않고, 흐르는 시간과 고여있는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우리의 삶 자체를 '디아스포라'의 삶으로 그리고 있다. 흐르는 시간 안에서는 우리의 삶 자체가 디아스포라가 아닐까. 개인의 굴곡진 삶과 교차하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저자의 역사인식은 대한민국사에 잊혀져간 인권문제를 수면위로 떠오르게 하고 있다. 저자는 《검은 모래》에서 제주도의 굴곡진 현대사 역시도 생생히 살아 숨쉬는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감싸안아야 함을 새삼 일깨워주는 듯했다. 오랜 세월 멀게만 생각했던 바다가 이렇게 지정학적으로 가깝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만들어주듯이 제주와 재일조선인은 우리모두가 끌어안아야 할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안식이 없는 자의 이름, 디아스포라 그것은 우리들의 이름인 것을,,,,
디아스포라는 정착을 꿈꾸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그들의 삶에는 늘 결핍이라는 물이끼가 습진처럼 끼여 있다, 아무리 먹고 살만 해도 그들의 가슴은 허기지고, 두꺼운 옷을 껴입고 있어도 늘 춥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설명한들 알 수 있을까.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