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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에서의 사유 - 청년 문화연구가 최태섭의 삐딱하게 세상 보기
최태섭 지음 / 알마 / 201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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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kbs -기자가 간다에서는 전 안기부장인 장세동의 취재를 다뤘다. 전 안기부장인 동시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자, 5공의 실력자로 불렸었던 그가 수지김 사건으로 국가에 내어야 할 세금은 약 15억원이다. 15년 전 수지 김을 간첩으로 지목하며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한 당사자 장세동은 법원으로부터 15억원의 배상책임을 판결받았다. 그러나, 그는 돈이 없다며 국가 배상금 일부를 내지 않고 있다. 장세동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참 아이러니 한 것은 , 개인의 삶을 조작하여 갈기갈기 찢어 놓은 그가 2002년 대선에 출마한 사람이란 점이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사는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삶이 조작과 은폐로 철저히 부셔질 수도 있지만, 지배계급의 가해자는 언제나 건재할 수 있는 사회. 이와 비슷한 사건은 한국사회에 차고도 넘친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이해해야만 한다. 이와 쌍벽을 이루는 '영남제분 싸모님 사건' 역시도 이러한 정경유착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사건이다. 저자는 <한복과 한국의 부르주아 그리고 근대성>에서 정·재계와 사법계에 걸쳐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명실공히 '지배계급'에 대하여 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국사회가 아닌 선진자본주의의 중심지라는 사실과 <진실대신 욕망만 남은 천안함>에서는 '역사 속에서 존재했던 모든 룰은 그 어느 시대에도 불편부당하지 못했다. 곧게 서 있어랴 할 막대는 현실의 권력관계에 따라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이쪽저쪽으로 구부러지기를 반복했다.' 라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불공정한 부분을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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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청년 문화연구가 최태섭의 《모서리에서의 사유》는 일련의 사회현상들을 하나의 프레임안에 두며 프레임의 사각지대인 '모서리 한 귀퉁이'에서 사회를 바라본다. 그가 이 모서리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스스로가 사회의 프레임 사각지대에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30대의 젊은 문화평론가인 저자는 ‘ 모서리 위의 인간이란 추락에 대한 공포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쓰는 안간힘과, 그 딱딱하고 각진 공간이 제공하는 통증 때문에 그다지 쾌적한 존재를 영위하지 못한다’라며 5년동안의 칼럼을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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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에 한번 열리는 무한도전 가요제는 정말 볼만하다. 열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남아있지 않은 대학가요제를 대신하여 뽕끼 제대로 발산해주시는 무한도전 멤버들의 창작을 위한 순수한 집념과 열정이 참 좋다. 이번 가요제에서 눈에 띈 노래는 단연 장미하관의 ‘오빠라고 불러다오’였다. 아저씨들의 발칙한 반항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더 애절한 발악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고 리드미컬한 박자 사이에 터져나오는 함성은 분명 본심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책을 보면서 아저씨를 대변하여 쓴 저자의 <아저씨> 에 대한 해석은 더욱 나의 생각을 확고히 다져주었다. '현대 사회의 아저씨들은 외롭다. 사리분별 능력을 잃어버리고, 생존과 욕망의 노예가 된 속이 텅 빈 괴물이 우리가 지겹게도 만나고 있는 그 수많은 아저씨들의 정체다. 아저씨가 되지 않으면 패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남자 정글의 법칙이 아직도 세상을 지배하는 룰이기 때문이다.'
오빠라고 좀 불러다오 오빠라고 좀 불러다오 / 배 나온 남자 아저씨라 부르지좀 말아줘요
날씬하진 않지만 깜찍하고 귀엽기만 하잖아/ 숱없는 남자/ 아저씨라 부르지 좀 말아줘요/머리 큰 남자/ 아저씨라 부르지 좀 말아줘요/ 오빠라고 좀 불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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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련의 사태들은 전혀 다른 분야 다른 이야기이지만, 서로 각기 다른 부분에서 사회현상을 대변해주고 있다.
우리사회를 대변하고 있는 수많은 언어들, '된장녀'의 계보에서부터 꾸준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지배계급들의 속내, 공정한 사회라는 슬로건과는 다르게 비리와 부패의 온상으로 빠르게 동화 되어 가고 있는 현 사회의 모습을 저자는 장 보드리야르의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이미지들만이 둥둥 떠다니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사회라 칭한다. 이 부분은 또한 랑시에르가 말한 ~도 아니고 ~ 도 아닌 이중부정의 의미인 교차모순의 사회와도 같다고 본다. 인터넷과 통신기술의 발달은 기존 언어의 대변혁을 가져왔다. 문자언어와 구술언어만 존재하였던 언어가 이제는 문자적이지도 구술적이지도 ,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비현실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 우파적이지도 좌파적이지도 않은 ' 양상을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 된다. 진보와 보수가 , 학교교육이, 문화와 정체성이 , 민주화와 공산주의 이념이 , 잉여세대의 증가와 공허한 메아리인 사이버 세상이 , 랑시에르가 말한 ~도 아니고 ~도 아닌 , 포스트모던 비평의 꼭지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데올로기도 아닌 뭣도 아닌 , 혼란 그 자체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에 종종 빠져들게 한다. 인터넷 발달은 아이러니하게도 신구 세대간의 불통을 가져왔다.나는 이런 극심한 분열과 분리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우리들의 세대를 심히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중의 하나이다. 이 책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냉철함과 저자의 중립적인 시각이 마음에 들었다. 모서리라고 하지만, 저자처럼 우리는 사회를 한 발 떨어져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가능하다면, 가슴은 따뜻하고 머리는 차갑게.
우리는 우리가 이뤄놓았다고 자부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더이상의 논공행상도 연말정산도 집어치우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의 한국 사회를 새로운 영점零點으로 삼아야 한다. 필요한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이고, 새롭게 발명하는 것이다. 아직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들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민주화를 비롯한 모든 해방의 역사는 화석이 아니라 해방의 힘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