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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3 - 법정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무더웠던 여름, 등줄기에 축축하게 젖어가는 땀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며 온 몸을 적실 때 즈음 한줄기 돋아난 소름이 땀을 역행하며 번져 간다. 거꾸로 역류하는 소름 줄기의 공포처럼 푹푹 찌는 폭염에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열대야의 밤조차 무색하게 할 정도로 소설이 주는 반전은 놀라웠다.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성장소설에 더 가깝다.사춘기 성장하는 아이들의 내면을 깊숙히 바라보게 하는 작가의 시선과 교차하여 '교내재판'이라는 전대미문의 설정안에서 사회와 학교, 부모간의 모든 갈등안에서 자신 '스스로를 찾아가는 과정'을 밀도있게 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의식이 과도하고, 끊임없이 주위와 부딪히고, 마음은 우월감과 콤플렉스가 뒤섞여 불안정하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그 시기를 빠져나온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아이가 있었다. 한사람만을 해바라기 하는 습성을 가졌기에 내 중학교 시절 친구는 오로지 그 친구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디 어린 유치함에 웃음이 나지만 그땐 무엇보다 소중하고 사랑하였다고 자부할 정도의 우정이었다. 그 친구의 나이와 어울리지 않았던 조숙함과 철부지 같던 나와는 다른 진지한 눈빛들을 나는 가장 좋아했었다. 그날도 비가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내렸다. 이십 오년이 지난 지금의 내가 여전히 창밖의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그날 내리는 비는 무섭다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 비가 친구의 마음에 용기의 불씨를 지폈는지는 모르지만, 자율학습 시간 , 빗소리만 요란했을 때 받은 편지에는 몇 해전 집으로 가는 길에 성폭행을 당한 일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의 감정들을 검은 글씨로 토해내고 있었다. 그 친구를 괴롭혔던 존재는 아마도 소설속에 겐이치와 다쿠야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존재 ‘얼굴을 달라며 위협하고 탐욕스럽게 매달리는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열 넷의 나이에는 자의식만 강할 뿐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타인의 고통은 짐작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바보같았다. 어설픈 위로는 안하느니만 못하다. 내게 어설픈 위로를 받은 친구는 이후 나를 떠났다. 내 등에는 자신의 비밀을 친구들에게 말할까봐 불안해하는 눈빛이 화살처럼 날아와 박히곤 하였다.
소설은 한 아이의 죽음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지만, 소설의 본질은 한 아이의 죽음의 이면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렸을 때부터 병약하여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타인과 어울리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였던 아이는 ‘남들과 공존하지 못하는, 항상 자신이 특별한 존재여야 한다’는 자의식이 강한 아이로 성장하였다. 아이는 타인과 더욱 더 고립되어 갔고 더욱 고독한 존재가 되며 서서히 비틀어져 갔다. 물론 그런 점이 부모의 눈에는 더 특별한 아이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런 특별한 아이 앞에 나타난 한 아이 ‘ 불행한 사건으로 부모님을 잃고, 양부모에서 자라고, 자신에 비해 여러 가지 평범하지 못할 뿐아니라 괴로운 인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간바라를 만났을 때, 다쿠야는 부모에게 사랑받으며 자라온 자신도 불행하거늘 살인자의 자식인 간바라가 ‘ 어떻게 태연한 나날을 보낼 수 있는지, 그 불행에 어떻게 무릎을 끓지 않을 수 있는지, 어떻게 이 세상의 불합리를 견뎌낼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쿠야는 크리스마스 이브, 간바라에게 ‘자살’이라는 게임을 제안하였고 여전히 세상이 불합리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자살하기로 한다. 다쿠야는 그렇게 스스로를 죽음이라는 사슬에 옭아매었던 것이다.
얼굴도 없이 형체도 없이 새카맣기만 한 불행은 항상 누군가와 함께 한다. 옆에서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죽음을 종용하고 탐욕스럽게 매달려 고통을 주며 통째로 삼키려 하는 '두려움'이라는 존재를 부모를 죽이려 할 때, 겐이치는 만났다. 그 존재를 떨쳐내게 되기까지는 료코의 아이답지 않은 영민함과 친구 고사타의 관심,거기에 스스로 그 존재를 벗어나고자 하는 '용기'가 필요하였다. 스스로를 불행이라는 존재에 자신을 던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즐기는 이들은 절대 그 불행의 존재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닭이 먼저인지 닭알이 먼저인지 따지려드는 어리석은 내기와 같이 불행이 데려온 동반자는 스스로의 본질을 잊게 만드는 두려움이란 녀석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겐이치가 간바라를 본 순간 다른 세계를 보고 온 동질감을 느끼는 그런 기분을 나 역시도 그때 그 친구에게 느꼈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 친구 역시도 그 불행이라는 녀석을 떼어놓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그리고 몇달 전 내가 사는 이곳에서도 중학생이 아파트에서 뛰어 내렸다. 폭염이 나의 모든 감정들을 차단시켜 무감각하게 만들었는지 평상시보다 나는 더 냉소적인 생각들로 가득찼다. 다자이 오사무가 죽음에 대해 천착하다가 수십 번의 자살시도 끝에 끝내는 성공하고만 자살에 대해 그는 ‘인간 실격’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치유할 수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라고 , 겐이치가 느꼈던 그 불행의 그림자, 다쿠야를 따라다녔던 불행, 내 친구를 따라다니던 불행의 그늘, 한 중학생의 자살, 다자이 오사무의 죽음, 모든 불행은 자살을 부른다. 내게 고백한 뒤 꼬박 만 일년 뒤 자살한 친구의 소식으로 인해 내 찬란한 시절은 만신창이로 조각나버렸다.
내가 태어난 의미를 찾는 건 나 자신이다. '시시한 인간'인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을 찾아낼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들 중 나는 겐이치에게서 '나'를 보았다. 무기력하고 평범하다못해 존재감이 없었던 아이 , 그런 겐이치가 '교내재판'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고 스스로의 불행을 극복하며 내면에 잠들어있던 무언의 자아를 깨우는 모습은 마치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한 세계를 깨뜨리는’ 모습과도 같은 강건함이 깃들어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었고 누구나 그 시기를 지난다. 《솔로몬의 위증》이 아름다운 것은 사춘기아이들이 한 세계와 투쟁하여 깨뜨려 얻은 세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남겨져 있던 상흔을 깨뜨려 다시 마주하게 된 죽음의 이면처럼 우리의 세계는 삶의 가면을 깨뜨리면 깨뜨릴수록 그 이면에 더 가까워져 그때야 비로소 내안의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더운 여름, 내 안에 잠들어있던 '나'를 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