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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
황윤 지음, 손광산 그림 / 어드북스(한솜)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김유신 하면 생각나는 구전 설화가 있다. 고려 말 스승인 일연이 민족의 주체성을 일깨우기 위해 저술한 삼국유사에서 읽은 이야기로 김춘추가 왕이 되면서 '태종'이란 칭호를 왕명에 쓰고자 한다고 중국사신들에게 고하자 중국사신들이 노발대발하며 태종은 중국황제나 쓸 수 있는 것이라고 거절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김유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태종'을 써야 한다고 하자, 사신들 모두가 수긍하여 돌아갔다는 일화가 내려온다. 삼국유사의 설화들이 대부분이 그렇듯이 구전설화나 토템신앙을 근거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진정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의아함이 남는 부분이었다. 왕인 김춘추보다 더 위대한 천신 김유신, 그러나 김유신은 역사에서나 현재에서나 이인자의 위치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의 인지도 역시 선덕여왕이나 김춘추이상의 인지도는 아니라 여겨졌다. 《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를 읽으면서 김유신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매우 부족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저자 역시도 김유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전무한 사실을 깨닫고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팩트fact와 픽션ficton을 한 올씩 엮어가며 새로운 김유신 역사의 팩션소설을 선보이고 있다. 저자가 천착해가는 역사기술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생생하며 시대의 흐름을 읽는 새로운 역사읽기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특히, 저자가 바라보는 역사 기술의 좋은 점은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며 역사의 맥락을 짚어나간다는 점이다. 그럼 시대의 흐름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김유신이 태어나 활동한 시대는 6세기이다. 6세기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나라가 가진 고유의 특성, 외교, 문화, 빈번하였던 고대국가의 전쟁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삼국시대는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상황이었고 각 나라마다 특성있게 불교를 숭배했고 그 신앙을 중심으로 예술과 문화를 꽃피웠다. 이 불교문화의 이해도 시대의 흐름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이 가운데 중국과의 외교관계 역시도 삼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러한 거시적인 역사의 흐름 가운데 이 모든 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인물' 이 있다. 역사의 흐름이란 이러한 모든 것이 상호작용하면서 써가는 것이지 문화,종교,인물이 서로 각자 따로 시대를 기록하는 역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치열하였던 삼국의 역사중 신라의 김유신은 그러한 역사의 흐름 가운데 놓여져 있는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고구려의 연개소문, 백제의 계백, 신라의 김유신이 커다란 축이고 김유신과 횡으로 놓여진 인물이 김춘추이다.

6세기 말 신라에는 분명 그 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힘이 솟구치고 있었다. 진흥왕이 전륜성왕의 개념과 의식에 도취되어 가면서 신라왕실은 곧 석가모니의 계열이라는 강한 집단 최면상태에 빠지게 된다. 왕이 곧 석가모니라는 종교철학은 왕들에게 엄청난 자기애를 선사해주었고 이런 종교의 힘 덕택으로 신라왕실은 왕권강화의 구실을 마련하게 된다. 엄격한 신분사회 였던 귀족사회인 신라의 삼국통일의 원천적인 힘을 주었던 것은 이렇게 신격화된 왕실과 귀족자제들로 이루어진 '화랑'제도이다.
길함과 흉함은 정해진 것이 아니옵고 오직 사람이 불러들이는 바에 달려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별자리의 변괴 따위는 두려워하지 마옵소서.
오래 전 드라마로 방영된 <선덕여왕>을 보면서 왜 덕만공주가 유신과 결혼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화랑 중 김유신은 분명 덕만과 가장 마음이 잘 맞는 동료였었고 매 사건때마다 순발력을 발휘하여 덕만을 위기에서 구해주곤 하였는데 왜 작가는 비담과 애정전선을 그린것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덕만과 유신이 꽤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책을 보면서 그때의 궁금증이 다소 해소되는 것 같았다. 덕만과 유신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은 신라가 엄격한 계급이 있는 귀족사회였기 때문이다.
덕만은 귀족 사회 가장 최고계급인 성골이었고 김유신은 가야계 출신으로 가야의 마지막 왕의 가문이었다. 물론, 혁혁한 공을 세운 할아버지, 아버지 덕으로 김유신 역시도 계급은 높았지만 태생이 최고 귀족계급인 성골과는 엄청난 차이라는 사실. 6세기 중엽 신라는 가야를 복속하게 되면서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경주 외지인이 주축이 된 신흥세력과 비담을 중심으로 한 최고의 혈통 가문세력이라는 두 계층의 대립이 있었다. 비담의 난을 계기로 김유신은 최고의 혈통가문을 상대로 싸움에서 승리하였으며 선덕여왕에 이어 진덕여왕을 왕위에 올린다. 이후 진덕여왕의 죽음으로 성골의 대가 끊기자 이어 진골에게 왕위가 돌아가게 된다. 이어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게 되고 이어 문무왕까지 김유신은 정치권력자로서의 최고 자리에 오르게 되고 막강한 군부의 힘이 있었음에도 신하의 예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철저한 고증을 토대로 집필된 김유신의 일대기는 당쟁과 모략으로 얼룩진 역사이야기가 아닌 역사속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충직함과 강인함이 깃든 민족의 기상이 느껴지는 책이다. 《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는 허구가 아닌 실제 역사의 이야기이다.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면서 현재의 우리의 모습과 더불어 생각하는 역사사관을 펼쳐보이며 역사를 거시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매우 인상적인 역사책이다. 또한 이러한 역사사관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지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