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평] 임명묵의 『K-를 생각한다』 





‘20대 담론’은 소위 ‘88만 원 세대’, ‘아프니까 청춘’, ‘N포 세대’ 등 기성세대에 의해 다양한 이름으로 정의되고 재현되곤 했다. 그런데 유독 하필 90년대생 담론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90년대생들이 가정·직장·정치 영역에서 부모인 386세대에 사사건건 도전하고 반발하는 자식 세대로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뒤따르는 것이 물리 세계의 법칙인데, 정치 담론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기성세대는 선거에 질 때마다 ‘역사의식’ 내지는 ‘안보의식’이 모자라다며 ‘20대 철부지론’으로 수렴되는 책임 전가형 프레임을 내세웠다. 이에 대한 청년세대의 반발은 늘 어느 정도 있어 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문재인 정권 탄생에 몰표를 주었던 청년세대의 이탈이 가시화되고, 정권과 386 운동권 세대에 적대적인 ‘이대남’이라는 집단의 출현이 최근 치러진 선거에 유의미한 결과를 몰고 왔다. 이로 인해 산발적이던 ‘90년대생 세대론’은 ‘이대남’으로 응축되며 본격적인 관심의 도마에 올랐다.


  강남역 사건 이후 세대를 초월해 여성들을 결집시키며 풍부한 현상 설명의 틀을 가졌던 페미니즘과 달리, 그동안 ‘이대남 현상’은 일시적 현상이거나 돌연변이 식이라는 피상적 분석만 있었을 뿐, 그것에 합당한 설명 틀을 가지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94년생 청년 작가 임명묵의 『K를 생각한다』가 일약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이 아닐까 한다.


 


■ 386세대의 자아분열을 고발하려고 했으나... 여전히 찜찜한 무언가



  이 책의 부제는 ‘90년대 생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이지만, 이 책은 세대 일반을 다루기보다는 철저히 남성향이다. 여성의 경우는 90년대 생 특유의 ‘커뮤니티 화력전’을 창조하여 전이시킨 아이돌 팬덤 문화를 제외하고, 책에 별다른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영역에서는 독보적으로 페미니즘이 세대를 아우르는 설명력을 갖고 있고, 젠더를 담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저자 스스로 판단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저자 임명묵의 주된 비판 대상은 정치경제 엘리트 지위를 차지한 운동권 출신 386세대이자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의 허점이다. 그는 K-방역을 다루는 제2장에서 386식 세계관에 비판의 포문을 열기 시작한다. 민주화를 추종하는 세력의 소망과는 별개로 한국의 코로나19 방역 성공의 비결은 민주적 이념이나 시민의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권위주의 군사정부가 남겨준 강력한 행정 동원력과 반민주적인 동선 공개 및 추적, 말단 제조업 역량이라는 산업화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아예 책의 제4장은 통째로 386세대 비판에 할애했는데, 그 요는 ‘90년대 생이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세대 불평등 탓이며, 그 변화의 상당수를 기득권이 된 386세대가 주도하거나 이용한 탓’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저자가 더욱 집요하게 비판하는 지점은 386세대의 자아분열(책의 표현으로는 이중사고)이다. 즉, ‘평등의 낙원을 꿈꾸며 혁명운동으로 젊음을 바친 386세대가 이제는 선진국의 상류 중산층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했으면서도, 기득권이 된 본인 세대의 객관적 위치를 부정하며 아직도 청년기 비주류적 마인드로 투쟁적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에 직접 신음하는 90년대생은 386세대의 자아분열을 위선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386세대가 태극기 세대를 ‘시대착오’적으로 보았다면, 90년대생은 386세대를 ‘시대 고착’으로 생각한다고 달리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필자 또한 90년대생의 한 사람으로서, 386세대의 사회 경제적 위상에 대해 두 세대가 각각 내리는 가치평가가 크게 엇갈린다는 점, 386세대가 공동체의 평등을 추구하는 ‘공적 자아’와 개인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사적 자아’ 사이의 혼란이 존재한다는 분석에 충분히 동의한다. 그러나 여전히 전적인 책임을 어느 한 세대 일반에 지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른다.


  사회 양극화와 신자유주의적 흐름은 민주정권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진행되어온 흐름이며, 자본소득이 노동 소득을 뛰어넘어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문제는 토마 피케티가 일찍이『21세기 자본』에서 선진국 자본주의의 병폐로 지적한 바 있다. 이중적 노동시장의 형성 또한 재벌 일가와 대기업, 그리고 부동산이라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이고 오래도록 해묵은 문제를 빠뜨릴 수 없다. 이것을 논외로 두고 특정 세대 일반의 욕망추구를 지나치게 과장했다는 느낌도 든다.


  한때 운동가가 소시민이 되자 (청년기의 이상을 배반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정권을 세워 지대를 추구하는 듯한 위선의 부각은,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애초부터 그런 구조를 의도적으로 설계하고 활용했다는 인상으로 흐르기 쉽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자칫하면 ‘386 원죄론’으로 쉽사리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90년대생 역시 지금은 공정을 부르짖지만 언제든 불공정의 유혹과 특권 활용을 서슴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결국에 이는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이익 추구의 방법이 달라질 뿐이라는 주장으로 귀결될 뿐이라, 세대론의 독특성에서 출발하여 황급히 일반론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인상을 주어, 책이 제시한 분석과 진단 프레임이 갖는 논리적 정합성에 비해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 하층의 세계화에 대한 한국식 포용


  이 책에서 가장 살아있는 부분을 꼽자면, 아마도 한국식 다문화와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룬 제3장일 것이다. 저자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조치원 김밥 가게를 배경으로, 직접 여러 외국인 노동자를 마주하여 얻은 경험이 생생하게 녹아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터넷상에서 난무하는 난민에 대한 혐오 발언의 정도에 비해, 실제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


  추정컨대 이촌향도로 인해 일손이 귀한 시골에서 관념적 혐오보다는 경제적 필요가 크게 작용해 외노자에 대한 차별이 상쇄되고 있다는 측면인 듯하다. 저자의 취재에 따르면 작업에 대한 특별한 교육 없이 고강도로 생산성을 재촉하는 한국적 노동 문화가 힘든 것은 사실이며, 이에 적응하지 못해 상처받고 탈락하는 외노자들도 물론 다수 존재한다.


  그러나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현장의 한국 사람들은 일만 잘하면 국적은 관계없이 ‘쳐주는’ 경향이 일반적이며, 언어장벽을 넘어서고 한국식 눈치 문화에 ‘빠릿하게’ 적응한 외국인들은 현지인만큼 ‘짬 대우’를 받아 작업반장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현장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은 외노자가 현지인을 지휘하는 ‘역전된’ 케이스도 존재한다고 소개한다.


  물론 살아남은 이들의 주관적 경험을 모아 객관적으로 외노자에 대한 차별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의도는 도시 중산층이 외면한 지방 3D 업종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층의 세계화’ 속에서는 나름대로 ‘능력주의의 순기능’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코리안 드림’을 이루는 경우가 상당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능력을 매개로 하는 한국적 다문화는 꽤나 포용적 측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 글쎄, 과연 K-능력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한국적 다문화에서 ‘쓸모있는 외국인은 한국에 포용된다’던 저자의 논리는 교육 파트에 들어서자 ‘쓸모를 찾지 못한 한국인을 그대로 배제된다’라는 전도 논리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저자는 외노자에 대해서는 온라인상의 혐오에 비해 현실이 덜하다고 말하면서도, 오히려 자국민인 90년대생은 유독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이 대상에 따라 각각 다르게 적용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것이 나와 있지 않다는 것도 책을 읽을 때 상기할만한 지점이다.



  1장의 ‘90년대생은 누구인가’에 따르면 90년대생은 전반적으로 ‘탈 가치화’된 정보화 세대다. SNS를 통한 끊임없는 비교에 노출되는 인정투쟁 속에서 극심한 피로를 느끼는 상태다. 90년대생은 주로 익숙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불만을 분출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세계화로 인해 노동시장이 극단적으로 분화되자 양질의 취업 문이 급격히 좁아진 반면, 대학은 취업에 필요한 적절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구직으로 인한 좌절의 기간이 대폭 늘어난 것은 물론, 격렬한 경쟁 끝에 얻은 학벌이 취업시장에서 능력을 보여주는 주요한 수단으로서 지위를 잃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위와 같은 진단은 결국 원활하게 능력주의를 펼칠 공간은 ‘표준화된 시험’ 영역밖에 남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즉, 정보화 시대에 발맞춰 독창적 콘텐츠를 생산할 창의력이 없는 다수에게는 계층 상승을 위해서 유일하게 주어진 길은 오직 ‘공직 시험’만이 남는다. 따라서 ‘공정’이라는 가치는 90년대생에게 그 자체로 생존과 취업에 필수적인 토대이자, 건드려서는 안 되는 정치적 ‘뇌관’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해법이 ‘능력주의의 제대로 된 작동’임이 은근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마지막 장은 논리적으로 계층 상승의 기초 사다리인 입시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단호한 어조로 한국 교육은 능력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그 작동을 방해하는 자기 기만적이고 분열적 시스템이라 진단한다.


  즉, 386세대가 주도한 공교육이 표방하는 ‘겉의 가치’는 ‘좋은 말의 향연’에 불과하며, 명문대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부모·학생들의 ‘속의 욕망’과 어긋나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제도가 들어선들 본질적으로 제대로 된 효험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속의 욕망’을 겉으로 드러내 인정하는 쪽으로 유도하여, 제대로 된 능력주의를 구현한다면 학벌과 세대의 지대추구를 막을 수 있다는 쪽으로 귀결하는 듯 보인다.


  공교육의 표리부동이 낳은 저효율에 관한 문제의식에는 동의할 수 있더라도, 능력주의를 그대로 드러내 서열화를 양성화했을 때의 경각심은 부족한 듯 보인다. 학벌의 좁은 사다리마저도 특정 계층과 좋은 학군의 학생들이 독식하고 있으며, 사다리 바깥에는 ‘지잡대’로 추락한 이들이 영영 저자가 말한 하층의 노동시장에 그대로 갇혀서 나오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사회에서 능력주의는 필연적으로 학벌주의와 연동되어 작동될 수밖에 없다. 욕망을 무차별적으로 내버려둘 경우 학벌을 통한 지대추구는 오히려 공고해질 것이다.


  또한 사회 양극화와 대물림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그 속도를 늦추는 작업도 꽤나 의미 있는 일이다. 극단적으로 벌어지는 사회의 간극을 줄이려는 모든 노력은 다 무의미하고 무용한가. 저자는 위선마저 포기했을 때 벌어질 일들을 예상하지 못하는 듯하다. 무비판적으로 시장에 모든 걸 맡기면 알아서 잘 된다는 자유방임 논리의 아류로 흐르는 듯하다. 무의미와 무용의 레토릭에 90년대 청년의 시각이 녹아있느니 다소 어울리지 않은 부분도 느껴진다.




■ 90년대생의 초라한 자화상



 동 세대 청년작가의 혜안과 탁견에 감탄하면서도 위선에 대한 반감과 역설의 지나친 강조로 한 세대의 자기기만에 너무 천착한 나머지, 결론에서 급격히 무게중심을 잃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안에서 90년대생은 쪼그라든 자화상만을 갖기 때문이다.


  임명묵 작가가 그린 청년의 모습에는 공동체를 고민하는 공적 자아가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보다 주로 온라인에 서식하며 능력에 따른 서열화를 좋아하면서도 거기서 좌절된 욕구를 분출하는 청년 남성의 얼굴이 보인다. 이것은 현재 우리 세대의 상태에 대한 어느 정도 객관적인 묘사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머물러있어도 되는지에 대한 고민을 낳는다.


  청년 세대의 자아 축소는 심각한 문제다. 공적자아를 형성할 기회가 부족한 청년의 삶에 대해 세상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청년의 불만을 정치권의 양지로 수렴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공적 자아 없는 청년의 욕망은 결국에 냉소로 흐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만큼 중요한 작업은 미래에 우리가 풍부한 표정을 갖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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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기억
류주연 지음 / 채륜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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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한 사람의 인생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내 안의 상처를 치유 받는 때가 있다. 나에게는 이 책은 치유의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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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실망스럽다. 문장은 공허하고 묘사는 듬성듬성하며 세계관은 엉성하다. 문명도 유목도 아닌 것들 사이의 골격이 얼기설기 허술하게 짜여있다. 특히 여기저기 고대사들을 짜깁어 지어낸 가상의 문명수준과 거기에 호응하는 사회적 배경이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잡탕인데, 묘사가 귀찮아서였는지 묘사가 필요한 부분은 적당히 나레이션으로 ‘이러이러하다고 전해져 내린다‘ 정도로 떼우고, 불필요한 교접 묘사는 쓸데없이 자세한데 그 묘사가 너무 옛스러워 거북하다. 과거 글 잘쓰는 김훈, 그 압축된 문장의 진수와 세상과 역사를 읽는 탁월한 눈은 어디로 간것인가. 뭉뚝한 연필의 푸념만 적혀있어 아쉬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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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1.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떠나는 순간을 상상한다. 눈 앞에 닥칠 캄캄한 어둠, 미지의 세계. 나는 다시는 나를 낳아준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감도는 어떤 충동. 보이저 1호는 뒤를 돌아 지구를 바라본다. 앞으로 평생을 고독할 우주비행체는 엄마를 사진으로 남기고자 한다. 그것은 인공위성이 부모에게 올리는 '전 상서'이자 외로운 항해에 나서는 자식이 간직할 최후의 유품이 될 것이었다  


  비행체가 남기고간 사진 한 장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우주를 밝히며 나아가는 인공위성의 역주에 자부심을 느꼈다, '창백한 푸른 점'을 두고 천문학자 칼 셰이건은 우주의 광대함에 대비되는 인간의 초라함을 느끼며 상념에 잠겼다. 지독한 쓸쓸함도 있었다. 자신의 모체를 떠나는 그 어떤 존재건  단지 그리워 할 수 밖에 없다면, 보이저 1호는 떠나면서 자신을 낳아준 엄마, 지구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김초엽의 SF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과학기술이 새로 빚어낸 눈부신 미래의 세상에 대한 재기발랄한 묘사면서도, 그 세상에서 살아갈 인간들의 쓸쓸함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보이저 1호의 첨단 항해에서 외로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처럼 이 책에 굉장한 애착을 갖게될 것이 분명하다.  



2.


<과학의 날>이면 어린이들은  대개 우주의 모습을 그렸다. 유년기 아이들은 누구보다 우주에 관심을 갖고 누구보다 신속하게 그것을 잊어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것일테니까, 아마도 현실 밖에 펼쳐진 것들에 관심을 줄 상상력이 모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SF라는 장르를 잊고 소설이라는 문자매체를 멀리하며 살아온 우리와 달리, 김초엽은 첨단기술의 시대상을 담은 일곱가지 수록작품을 통해 어른스럽게 또 꽤나 정교하게 미래를 상상해냈다. 


김초엽의 주제의식은 '완전함을 추구하는 기술 진보와 그럼에도 전혀 진보할 수 없는 불완전한 인간세상의 대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들'로 함축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작가의 시선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먼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는 장애와 추함없는 세상을 위해 개조 인간을 만든 결과가 천국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빈부격차는 인류를 개조인간과 장애인으로 양분시켰고 이들은 공간적으로 격리되었다. 그 반대로 결함있는 이들만 모여사는 평등의 마을도 따분한 종교인들의 세상과 닮아 있었다. 천국은 없었다. 오직 단절된 이 두 세계를 넘나들다 사랑에 빠져 불시착해버린 돌아오지 못한 순례자들만이 인간다웠을 뿐이었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는 우주 탐사를 위해 인간을 사이보그로 만드는 역대급 프로젝트를 소재로 했다. 하필이면 지구대표 선수가 '왜소한' , '동양인', '여성'으로 선출되어 벌어진 일을 계기로, 사이보그 개조기술이 인간의 몸은 고쳐도 인간의 편견은 전혀 고치지 못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이보그의 강한 육신을 얻게된 여성이 자유를 위해 나아간 곳은 어디였을지는 직접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에서는 경제논리 앞에 무력한 개인을 재현한다. 타 행성으로 이주한 가족을 간발의 차로 놓친 여인은 우주 항법의 변화로 인해 170세가 될 때 까지 이주한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가족이 떠난 곳은 지구에서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광년에 놓인  행성이었으나, 정류장을 지을 경제성이 떨어지는 관계로 워프를 제외한 기존 운송수단을 정부에서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노인은 이 하염없는 생이별을 마무리 짓기위해 무모한 출발을 감행한다. 노인은 뻔히 실패를 알면서도 갈 수 밖에 없었다. 고집과 의지 사이의 묘한 지점, 어쩌면 이런 게 인간성이 아닐까 싶다.


그 밖에도 색체언어를 사용하는 외계인 '루이'와 소통의 벽을 넘어 교감하는 이야기를 담은 「스펙트럼」, 감정을 직접 손 안에 쥐고 소유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을 다룬 「감정의 물성」, 인간의 선함과 도덕감정이 사실은 외계로부터 건너왔다는, '인간성'이 사실은 '외계성'이 아니었을까 제시하는 독특한 작품 「공생가설」 또한 시간을 투자하기에 충분히 흥미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나의 마음을 울렸던 작품은 바로 「관내분실」이다.



3.


   「관내분실」은 미래 도서관의 모습을 배경으로 한다. 더 이상 미래 도서관은 책을 보관하지 않는다.그 대신 죽은 이의 인격을 보관하고 재현하는 일종의 가상 영화관으로 변모한다. 도서관에서는 '마인드 업로딩' 이라는 작업을 통해 죽은 망자의 기억, 유품, 일대기를 조합하여 살아 생전의 캐릭터를 재현해내는 '영혼재생' 작업을 한다. 물론 망자를 재현한 홀로그램 분신일 뿐이지만 실제와 꼭 같이 대화도 나눌 수 있어,망자를 떠나보낸 유가족들이 고인을 만나기 위해 도서관을 방문한다. 


  주인공 지민은 아이를 갖자 죽은 엄마 은하가 떠올랐다. 딸은 자신의 삶을 옥죄고 간섭하는 엄마가 미웠고 질렸고 지겨워서 또 외면했다. 자기 삶을 살지 못한 채 딸의 인생에 사사건건 자신을 투영하는 엄마의 답답한 삶에 자신마저 질식할 듯 잡아먹힐 것만 같아서 딸은 엄마에게서 자꾸만 도망쳤고, 엄마 은하는 고독하게 메마른 삶을 살다 건조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렇게 싫어했던 엄마인데, 막상 자신이 엄마가 되자 한 번은 봐야겠단 순간이 지민에게 덜컥하고 찾아왔다. 그러나 어렵게 발을 디딘 도서관에서 엄마의 기억이 분실되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사서는 난처한 표정으로 누군가 의도적으로 엄마 '김은하' 씨의 검색 연결을 끊었다고 알렸다. 분명 존재하지만 접근할 수 없는 '관내 분실' 상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심스레 도서관 측에서 새로운 검색 방법을 통해 연결을 복원할 수 있다 알렸왔다. 그 조건으로 검색의 용이성을 위해 최대한 다량의 '김은하씨의 정보'가 필요하다 알렸다. 지민은 엄마의 분신을 되찾기 위해, 그녀의 삶을 추적하면서 자신이 엄마의 인생에 무지했음을 깨달았다. 말만 혈연이었을 뿐이지, 사실상 관내분실 이전부터 그녀와 관계가 끊겨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세계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인덱스가 지워지기 전에도." p.252 


 


  그뿐만 아니었다. 은하는 지민을 갖자마자 직장을 잃었고, 엄마가 되자마자 양육에 온 시간을 쏟느라 자기자신을 잊었다. 엄마의 굴레에 갇혀서 자아실현을 하기란 그 종류도 터무니없이 적고, 기회도 부족했다. 그렇게 딸이 자라는 것에 온 정신을 쏟다보니, 자꾸만 작아지는 자신이 답답했다. 유일한 해방구인 딸과 소원해지자 마지막 연결인 혈연마저 끊겼다. 은하는 단지 엄마로서만 존재했을 뿐, 사회와 그리고 딸과도 연결이 끊기고 만  '존재분실' 상태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단 한마디를 전하고 싶어서 그녀를 만나러 왔다.

"엄마를 이해해요."  p.271


4.


  우리 엄마, 그러니까 그녀는 겨울에 태어난 섬마을 딸이다. 8남매의 맏딸로 '여덟에 일번'을 맡고 있다. 식구, '먹을 입'이 많아 부득이하게 첫째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그녀의 지나온 삶보다, 그녀가 분실했을 많은 나날들에 연민이 생긴다.  


  철없던 때, 나에게도 독립된 어른이 되겠다며 엄마의 모든 것에 반발하고 또 부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엄마에게서떠나간 부천과 떠나온 부산 사이 거리만큼이나 뜸한 연락에 치기어린 원망의 나날들.  


  그녀는 내가 살아온 날만큼이나 나를 지켜봤으나, 나는 이제 그녀의 절반이 조금 넘게 그녀를 보았을 뿐이다. 우리 사이에 있는 그 공백의 시간만큼이나, 나는 엄마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삶의 풍파와 출생의 제비뽑기로 인해 무수히 분실해야 했던 그녀가 이루지 못한 꿈과 기회들. 많이도 잃어버리고 산 그녀의 인생.  


  오랜만에 만난 엄마의 핸드폰을 바꿔드렸다. 엄마는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론 시무룩해했다. "스마트 폰이 주인보다 더 똑똑해서 성질나 죽겠다!" 한때는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을 자식들에게 물어물어 새로 익혀야 한다고 투정이다.  


  새 핸드폰을 여기저기 눌러보는 엄마를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세상이 변한만큼 엄마도 많이 변했구나. 조금씩 가시고 있는 눈의 탱기, 핏발이 하도 서서 마치 붉은 그물을 친듯한 흰자, 요즘들어 부쩍 잔고장이 많아 앙상해진 팔뚝. 그 모습이 눈에 밟혀 무척이나 측은하고 애달픈 마음이 들었다. 


  나는 눈치채고 있는 중이다. 시간이 조금씩 엄마를 데려가고 있다. 그리고 엄마와 조금씩 이 세계에서 멀어지는 중이다. 언젠간 엄마와 나 사이의 연결도 그 감도가 희미해지다 결국은 끊어지고 말 것이다. 마치 보이저 1호와 지구 사이의 멀어지는 거리처럼, 언젠가 나는 엄마를 잃어버린 빈 세상에서 오래오래 외로운 길을 뚜벅걸음을 하고 걸어갈 것이다. 그것이 모체와 자식이 갖는 숙명이다. 


  앞으로는 엄마 사진을 많이 찍어야겠다. 기왕이면  목소리도 한가득  남겨놓고 싶다. 나에게는 엄마를 기록해줄 <미래 도서관> 같은 건 없으므로. 시간이 데려가는 만큼 나는 엄마라는 사람의 인생 장면을  하나하나 붙들어 남겨 놓을 생각이다. 그리고 간절히 그 기록들이 분실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비로소 나는 보이저 1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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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후기>



논산 훈련소 입영 직전입니다. 연무대 앞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 출간후기를 오마이뉴스 측에서 네이버 및 자체 메인기사로 실어주셨습니다. 입대 날 새벽까지 글을 쓴 보람이 있네요.
무사히 다녀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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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3-09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냥 좋아요만 누르고 가려고 했는데, 훈남이시군요.ㅋ
모쪼록 건강히 잘 다녀오십시오.^^

북다이제스터 2020-03-09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건강하게 군 잘 다녀오세요. ^^

북프리쿠키 2020-03-09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있습니다. 군생활 건강하게~책도 많이 읽으시고 제대하시길^^

베터라이프 2020-03-10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심히 다녀오세요. 모쪼록 건강 잘 챙기시고요.

연짱 2020-03-15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밤톨이시네요..입대하셨군요ㅠㅠ건강하게 수료하시기를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