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자 무리와 유한계급
사자는 힘의 상징이다. 특히 사람들은 수컷의 화려한 갈기와 날카로운 발톱을 숭상한다. 위엄 있는 몸짓은 보고 있기만 해도 기운차다. 사자는 강하기에 초원에서 배를 내밀고 원 없이 잘 수 있다. 초원에서의 여가는 오직 사자에게만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사자를 ‘백수의 왕’이라 부른다. 야구팀에서 부터 군대의 깃발과 여러 집단의 상징물로서 사자를 새겨 넣는다. 용맹한 인물 앞에 ‘사자왕’ 이라는 칭호를 영광스레 붙여준다. 사자는 화려하고 강하다. 강해서 화려하다.
그러나, 사실 실용적인 관점에서 수컷 사자는 쓸모가 없다. 백수(百獸)의 왕이 아니라 백수(白手)다. 하는 일이 없다. 과시용 갈기는 매복에 불리하다. 갈기로 장식하기 위해 크고 무거워진 머리로 인해 굉장히 느리다. 도주하는 사냥감을 도저히 잡을 수 없다. 단지 날렵한 암사자 뒤에 서서, 하이에나들 못 오도록 어슬렁거리는 게 사냥에서 하는 일의 전부다. 사자 수컷은 겉모습만 그럴 듯 할뿐, 철저히 비실용적이다.
수컷 사자들이 하는 거라곤 빈둥거리거나 자는 게 대부분이다. 배고프면 암컷이 사냥해온 것들 뺏어 먹는다. 다른 사자들과 쓸데없이 서열대결을 벌인다. 안 그래도 밉상인데 발정기엔 암사자 주변에서 자꾸 귀찮게 치근덕거린다. 살림을 하느라 항상 바삐 뛰는 암컷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래서 종종 수컷은 암컷의 구박과 발길질 세례를 받는다. 화려함 이면엔 비생산성이 숨어있다.
인간의 세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야생의 법칙은 인류 문명에서도 통한다. 사자 수컷의 습성은 그대로 수컷 호모 사피엔스에게도 전래되었다. 이들은 인간무리 생존투쟁에서 승리하여 막대한 부를 독점했다. 이제는 생산 활동을 면제 받고 전문적으로 돈 자랑만하는 세련된 한량들로 재탄생했다. 스스로 노동능력을 물적으로 정신적으로 거세한 후, 온갖 분야에 과시용 ‘갈기’를 달았다.
이들 집단에 베블런은 유한계급(The Leisure Class)[1]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줬다. “이제까지의 철학이 세상을 다양하게 해석해온 것이라면, 앞으로의 철학은 세계를 변혁 시키는 것이다” [2] 라며, 참여를 강조한 마르크스 달리, 베블런은 그저 지켜보고 있는 그대로를 담담히 기록할 뿐이었다. 차분한 어조로 또 조용하고 치밀하게 이들의 행태를 기술했다. 이점에서 마르크스가 피 끓는 혁명가라면 베블런은 3인칭 관찰가였다. 물론 그 타겟은 ‘부자’였다.
[1]유한계급이라는 번역은 딱히 와 닿지 않는다. ‘유한’이라는 단어는 보통 한자가 위세를 상실한 작금, 한계가 있다는 통상적인 뜻으로 직감되기 때문이다. ‘한가한 무리들’ 이라는 번역도 있지만, 이 역시 성에 차지 않는다. 여가라는 것도 사전적으로 노동하고 남는 시간이라는 의미이므로, 노동을 면제받는 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사치 계급’ (문맥에 따라 유흥계급)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2]엥겔스의 책 『포이에르 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의 부록으로 실린,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나온 말이다. 워낙 유명하여 이곳저곳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2.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
(1) 생존본능과 과시본능간의 관계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살아남기 위해 투쟁한다. 이른바 적자생존의 원리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 하는 개체만이 살아남음으로써 우월함을 증명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환경이 요구하는 특정조건에 알맞게 강해야 한다. 이 자연의 원리는 인간 문명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3] 이른바 사회에서도 특정 ‘제도’와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는 자가 승자요 지배자에 위치에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원시사회에서의 승리의 필수요소는 ‘완력’이다. 사회 발달이 미미한 만큼 강함을 증명하는 수단은 눈에 바로 보이는 근육과 덩치, 즉 힘이다. 야생과 다를 바 없는 초기조건에서, 자기보존 및 경쟁자와의 서열싸움에서 생존하려면 힘이 세야한다. 문제는 강함에서 멈추면 안 된다. 생존투쟁 당시만큼, 투쟁 이후가 중요하다. 승자가 승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독점하려면, 강함을 ‘과시’하고 ‘증명’하여 잠재적 경쟁자들의 도전을 사전에 틀어막는 예방조치를 취해놔야 한다.
과시는 승자의 전유물이다. 승리한자만이 과시 할 수 있다. 과시의 본래 기능이 도취감에서 비롯되었건 복종유도 차원에서 유래했건 간에 과시는 승자만이 할 수 있다. 원시시대 이래 권력자의 화려한 치장구, 수많은 미모의 부인들, 장대한 건축물, 수많은 종교적 의식 행위 등은 승자의 강함을 증명한다. 이것들은 후대에 세습되어, 나중에는 강함과 과시의 인과관계가 뒤섞여 ‘본능화’ 된다. 즉, 강한과 과시가 혼연 일체되어, 근거 없는 과시와 허세라도 은연중 강함을 떠올리게끔 각인된다.
[3]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인간사회에 적용된 것이다.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이 ㄷ프로이트와 마르크스, 그리고 다윈은 인류 지성사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중 다윈의 이론만이 2015년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곳곳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베블런 역시 이 책에서 진화론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2) 제작본능과 과시본능간의 관계
베블런은 노동이 인간의 본능임을 누누이 밝혔다. 그러나 스미스와 리카르도,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설’ 같이 이윤의 원천을 다루는 본질적 차원의 접근은 아니었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했으며, 누구나 제작본능을 가지고 생존해왔다는 정도의 기본 입장일 뿐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제작본능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격하와 전가였다. 즉, 태초에 모두가 가졌던 제작본능이 멸시받고 하층의 전유물이 된 과정과 근원에 있었다.
시간을 다시 미개사회로 돌려보자. 이 부분의 설명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더 직관적이고 이해에 용이하다고 판단하여, 그의 설명을 빌리기로 한다. 자연의 괴롭힘 및 짐승과의 대결에서, 열악한 신체를 타고난 인간에게 제작본능은 불가피했다. 기초적인 생계유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본능이었다. 원시 공산사회에서는 모두가 노동을 하며 평등한 관계로 협력했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생산력이 일정정도 증대하였고, 사유재산 제도와 소유개념이 등장하였다. 이를 비롯해 권력관계가 형성되었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형성되었다.
다시 베블런의 설명으로 돌아오자. 여기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 제도와 환경에 빨리 적응한 자들은 지배계급이 된다. 힘을 통해 정치-경제적인 자원을 독점 소유한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노동을 착취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생산에 나설 필요가 없게 된다. 기초생활은 물론 부귀영화를 누릴 조건까지 완비된다. 이제 생산 활동을 면제 받고 누리기만 하는 전사, 성직자등의 계급이 탄생한다. 이렇게 지배계급은 유한계급으로 탈바꿈 한다.
계속해서 유한계급은 우월함을 증명하고 또 과시하기 위해 유리한 제도를 명문화하고 만들어낸다. 이른바 유한계급 제도다. 제도에 덧붙여 생산은 비천한자들의 몫, 소비는 유한계급의 몫이라는 이분법적 정신태도를 줄기차게 주입한다.[4] 새롭게 태어난 이 제도에 상층부 하층부 할 것 없이 적응 경쟁이 분다. 제도와 결합한 유한계급 이데올로기는 사회 곳곳에 확대 재생산되며,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뇌리에 알게 모르게 뿌리를 내린다.
한번 확립된 유한계급제도와 유한계급적 태도는, 인간의 적응과정 및 보수적 습성[5]과 맞물려 대를 이어 갈수록 강화된다. 최초의 유한계급과 달리 세습한 2세대의 유한계급들은 제작본능 자체를 사용해본 경험이 없다. 제작본능을 잊고 살며, 노동이 하층에게 전가되는 상황을 태생부터 당연시 여긴다. 2세대 유한계급은 제작본능 대신 철저히 과시본능만 발현하며, 노동하는 자를 천대하고 혐오하는 지경에 이른다. [6]
[4] “없는 것들”, “없는 집안”, “때려치우고 공장에서 일이나해라”, “막노동(노가다)” 같은 표현이 비속어로 쓰이는 것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 “공장에서 미싱할래? 대학에서 미팅할래?” 류의 수험생 다짐으로 쓰이는 표어들이 특히 더 그렇다.
[5] 인간의 보수적 습성과 적응에 관해서는 3장에서 다룰 것이다.
[6] 맨손으로 시작해 대기업을 일군 한국의 재벌 창업주들이 근면, 성실, 절약, 검소의 이미지를 주로 갖는 반면, 재벌 2-3세들이 오만한 태도로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현상도 이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조현아의 땅콩회항’ 사건을 들 수 있겠다.
(3) 완력에서 금력으로 : 공격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낭비하라
권력과 명성을 획득하는 원시적인 방법은 완력을 통한 결투였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 경제양식이 확립됨에 따라, 완력결투방식은 더 이상 통용 될 수 없었다. 이제 겨룸의 양태는 금전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완력에서 금력으로의 진화다. 유한계급들은 금력과시 경쟁을 벌인다. 승리하는 자는 후한 평판과 높은 명성을 거머쥘 것이다.
베블런이 주로 연구한 유한계급들은 미국의 부자였다. 미국의 부자들은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거부(巨富)였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은 좁은 영토에 그마저도 여러 국민국가의 경계로 쪼개진, 속칭 케인즈-베스트팔렌 체제였다. 또한 전통과 역사가 얽혀 대자본이 완전히 발현하기 힘든 제약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토착 인디언들에게는 송구한 말이지만, 서구 제국주의자들 입장에서는 그 땅이 주인도 없고 규제도 없는, 잠재력이 살아 숨 쉬는 기회의 땅이었다. 공백상황을 이용하여 자유경쟁을 통해 미국의 시장경제는 무한대로 팽창했다. 유럽보다 넓은 땅을 단일 경제권으로 묶을 수 있었다. 소위 ‘규모의 경제’에 의해 독점 대자본가들이 출현했다. 이들이 세계에 유래가 없는 갑부, 미국의 유한계급이었다.
특히나 미국의 유한계급들의 금력과시 경쟁은 그 사이즈나 규모 역시 미국다웠다. 이들은 혼자서 아무리 낭비하고 자랑하고 허비해도, 한명의 사치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기존의 단순 낭비방식으로는 자신의 흘러넘치는 금력에 걸 맞는 과시본능을 충족치 못함을 자각 한다. 이제 이 유한계급들 자신의 금력을 증명할 방편으로, 자신 대신에 과시해줄 ‘대리 유한계급’을 창조한다. 이들이 돈을 대신 허비 할수록, 본 주인의 명성이 상승한다.
초조해진 유한계급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부를 소비하고 낭비하고 과시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재벌 총수가 세우는 대학들, 지식인과 예술가에 대한 후원(식객), 막대한 종교 기부금등이 있다. 이들은 존재 자체가 후원자의 금력을 만방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의 홍보 대행사의 자연형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스포츠 구단에 대한 후원[7]이 가장 전형적인 과시소비인데, 스포츠 자체가 인간의 경쟁본능을 충족시킬뿐더러, 영웅 심리를 조장하여 구단주에게 귀속시켜 줄 뿐만 아니라, 생산성이 전혀 없기에 귀한, 가장 파급력이 큰 낭비 법이기 때문이었다.
[7] 영국 프로축구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맨체스터 시티의 구단주 억만장자 만수르나 첼시의 구단주 로만을 그 실례로 들 수 있다. 이들의 천문학적이고 공격적인 투자는 대중을 열광시키고 있다. 여기저기서 유한계급들이 스포츠에 투자해 유명세를 타는 현상을 우리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3. 유한계급제도와 보수주의
(1) 생산 계급의 과시본능
제작 본능을 활용하여 하루하루를 힘겹게 영위하는 일반 대중 들은 부에 관한 모순감정을 갖게 된다. 집중된 부를 혐오하면서도 동경한다. 마르크스가 전자에 초점을 맞추어 세상이 뒤집힐 것을 예견했다면, 베블런은 후자를 보고 세상은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유지될 것을 암시했다. 생전 경험하지 못한 유한계급의 화려한 삶은 대중의 박탈감을 자극하면서, 종국에는 선망으로 승화되었다.[8] 제작본능과 과시본능간의 철저한 계급적 분리는 ‘부’ 자체가 신성시 [9] 되도록 만들었다.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는 전 계급에 모방 열풍을 일으킨다. 모든 계급은 자신의 형편껏 체면과 겉치레에 낭비하기 시작한다. 사회전체의 복리를 더욱 증진 시키는데 그 자원을 사용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한계급의 생활양식을 일정 부분 따라한다. 생활필수 활동을 줄여서라도 체면치레를 위해 과소비한다. 유한계급은 과시를 통해 사회의 유행 창조권을 쥐고, 문화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사회전체를 온전히 지배한다. 그람시 적으로 보면 유한계급은 문화 헤게모니를 쥔 지배계급이다.
유한계급들은 독특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 일부러 비싼 것들만 골라 사다보니, 비싸야 아름답다고 혼동하는 지경에 이른다. 즉, 가격이 가치를 정한다.[10] 문제는 생산계급이 이 법칙을 선망하며, 더욱 추종한다는데 있다. 생활 여력이 모자라는 이들도 사회생활을 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산다.
생산계급의 소비는 개성과 자기만족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기보다, 없어 보인다는 멸시를 받기 싫어 무리하게 소비한다. 노력하여 유한계급에 오르고 싶지만 번번이 좌절당한다. 심적으로 방어하며 살지만, 무시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내 자식만은 나와 같은 삶 물려주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희생하기로 결의한다.
위와 같은 생산계급 부모의 희생적 태도는 인구변화에도 영향을 준다. 맬서스는 그의 저서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로 증가하기 때문에 벌어질 재앙들을 걱정했다. 그러나 베블런은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한다. 생산계급은 유한계급의 생활기준을 따라잡기 위해, 하나만 낳아 모든 부모의 희생을 몰아주기 때문에[11], 오히려 인구는 감소할 것이라고 말한다. 개도국의 경우 맬서스의 이론이 타당한 것 같지만, 이미 선진국들에서 벌어지는 출산율 저하현상은 베블런의 이론을 뒷받침 한다.
[8] 드라마의 단골 소재는 재벌2세남과 평범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이다.일종의 대중 판타지로 자리매김했다.
[9]10년 전 한국의 유행어는 모 카드사의 광고 멘트 “여러분 부자 되세요!”였다.
[10] 시장 가치가 가격을 정한다고 말하는 주류 경제학에서는 이 현상을 설명 할 수가 없다. 베블런의 조용한 한방에 벙어리가 된 주류 경제학은 ‘베블런 재’라는 예외를 두었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묘한 통쾌함을 느꼈다.
[11] 한국에 신조어 중, ‘등골 브레이커’ 라는 말이 있다. 대개 저소득–비정규직 서민집안의 과시적 소비행태를 비꼬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부모는 먹고 싶은 것 참아가며, 후줄근한 옷을 입으면서 희생을 담당한다. 반면 자식에게는 고가의 패딩점퍼와 같은 사치품 및 고액의 사교육 제공을 마다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소비행태를 보인다.
(2) 만인의 만인에 대한 보수성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생존을 위해 적응하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적응한다. 한번 접한 환경에 온 힘을 다해 적응하고 나면, 어제 살던 대로 오늘을 살고, 오늘 살던 대로 내일을 살 것이다. 삶에 대해 한번 형성된 인간의 인식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과거의 경험은 그럭저럭 여태껏 나를 생존하게 만든 꽤 확실한 방법이며,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제도와 환경에 적응한 정신적 태도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진보는 정말 어려운 조건하에서만 이루어진다. 진보는 첫째로, 기존의 제도가 새로운 환경에 부적합하며, 둘째로 불편함이 계속 누적되어야하고, 셋째로 불편함을 감수할 인내심이 모두 소멸되어, 변화가 불가피할 경우에만 이루어진다. 진보는 계단함수다. 문제는 결국 이루어질 진보도 계층별로 다른 속도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늦게 받아들인 계급의 강한 저항에 추가적으로 부딪혀야 한다.[12]진보하기 정말 어렵다.
유한계급의 보수성에 관해서는 ‘잃을 것이 많기에 보수적’이라는 통상적 설명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베블런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유한계급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기 때문에 변화하는 환경의 압박에 최대한 적게 노출된다. 그래서 변화를 뒤늦게 알아차리기에 기존제도대로 별 탈 없이 살아간다. 따라서, 풍요로움이 변화의 노출을 차단하여, 문제의식이 생기지 못하므로 보수적이다.
문제는 이 유한계급제도 하에서 가장 고통을 받는 생산 계급이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은 칼 마르크스가 예기치 못한 부분이다.[13] 유한계급은 그렇다 쳐도,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들은 제작본능을 제대로 대접해주는 변혁을 꿈꿔야 한다. 사회의 생산성과 혜택을 모두에게 고루 돌아가도록 요구해야한다. 그러나, 착취당하고 무시당하면서도 생산계급은 보통 보수적이다. 분명 이는 쉽게 납득 할 수 없는 사안임이 분명하다.
베블런은 간단하게 설명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피곤해서 보수적이며, 진보는 피곤함과의 투쟁이다. 생산 계급은 고된 노동에 지쳐, 변화에 대응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 힘겹게 적응한 기존제도가 수명이 다 할 때 까지 어떻게든 버틸 만큼 버틸 수밖에 없다. 변화에 굴복하는 순간 불가피 하게 새로 적응한다. 생산계급은 가혹한 착취로 피곤하기 때문에, 문제를 의식할 여력이 없어서 변화를 기피한다.
결국, 유한계급제도는 유한계급과 생산계급의 보수 동맹으로 굳건히 유지되는 보수적 체제다. 가난한 사람은 먹고 살기 바빠 바꿀 여력이 없기에 보수적이고, 부자는 바꿀 필요를 못 느껴 보수적이다.[14] 이 사이에서 중산층이 고통 받는다. 결국 진보의 주도세력은 중산층이 될 수밖에 없다. 중산층이 가장 진보적이며 변혁을 주도하는 계층임은 여러 경험 연구에서 실증되고 있다.[15]
[12] 또한, 사회 한 부분의 변화가 전체의 변화로 이어지기 어려움도 감안해야 한다. 제도의 각 부분은 진화와 적응의 과정을 거쳐 최적화된 상태로, 유기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13] 부의 불평등 분배가 혁명의 트리거 아니라 오히려 봉쇄장벽으로 기능함을 뜻한다.
[14] 2012년 한국의 대선은 이를 가장 여실히 보여준다. 서울대학교 강원택 교수에 따르면 , 저소득층의 66%가 보수당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또한 상위계층의 57.4%가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 참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1230943421&code=910110
[15] 최근 한국에서는 소위 ‘강남좌파’ 현상이라고 통칭되고 있다.
4. 과시의 나라 한국
(1) 랜드마크에 대한 집착과 타워 열풍
과시는 행정의 영역에서도 유효하다. 특별히 내세울 자연경관이나 아이템이 없는 지자체는 너도 나도 대규모 랜드 마크를 건설한다. 대형 랜드 마크로 무특색을 감출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각 지자체 마다 천편일률적인 랜드 마크 건설의 목적은, 첫째 정치인이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함이며, 두 번째는 다른 도시보다 발전했음을 과시하는 목적이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빈곤한 한국의 관료들은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타워를 짓기 시작했다.[16] 전시 졸속 행정의 문제는 세금이 정말 돌아가야 할 복지나 경제발전에 들어가지 않고 전시용으로 낭비된다는 차원에 있다. 유한계급의 낭비가 공공복리에 돌아가지 못함을 밝힌 베블런의 지적이 또 다시 들어맞는 부분이다.
(2) 완장 문화, 완장 페이
완장 문화는 권력을 남용하는 행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소설가 윤흥길 「완장」이라는 작품에서 유래했다. [17] 이 단어는 권력과 권한의 관점에서도 유용한 말이지만, 그 사람의 높은 지위와 특별함을 과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베블런 적이다. 우리는 어제까지 순진하고 선했던 사람이, 완장을 찬 이후 권위적으로 급변하는 현상을 종종 목격한다. 지위를 과시함으로써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는 행태라 할 수 있다.
또한, 노동의 영역에서도 완장 문화가 판을 치고 있다. 일반 노동현장에서 같은 돈을 주지만, ‘매니저’, ‘부점장’ 등의 완장을 채워주고 더욱 가혹하게 착취하는 행태를 종종 목격 할 수 있다. 부족한 임금에 명예를 부여해서 정당화 하는 지급행태를 필자는 완장 페이(Pay)라고 부른다.
문제는 돈이 적고 업무가 과함에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있다. 일가친지 및 친구들과의 사적인 자리에서, 자신이 높은 직급에 있음을 과시하면 무시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완장 페이를 받는 노동자는, 당장의 임금이 부족한 것보다 과시를 할 수 있는 상황에 만족한다. 노동착취의 내면적 정당화 기제로서 과시가 충분히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
[16] 전국에는 양산타워, 대구타워, 남산타워, 구리타워, 부산타워, 경주타워, 청주명암타워, 속초타워, 완도타워 등 수많은 타워들이 각지에 생겨나고 있는 추세다. 모든 타워가 다 낭비용이고 나쁜 타워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왜 꼭 도시에 타워가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에 거액의 돈을 써야만 하는 가?
[17]설명은 유시민 선생의 『국가란 무엇인가』의 292페이지에서 빌려왔다. 더 정확한 각주는 유시민 선생이 다음과 같이 별첨한 것을 그대로 인용한다. 윤흥길, 「완장」, 현대문학, 2002
5. 소회(所怀)
(1) 불편한 독서의 적나라함
마르크스, 다윈, 프로이트 그리고 베블런의 공통점은 이들이 쓴 책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대개 인정하기 싫지만 그럴 수 없는 적나라함에서 온다. 다윈은 인간이 원숭이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변태성과 악마성을 밝혔다. 마르크스는 당신이 바보같이 착취당하고 있다 말한다. 그리고 베블런은 부자들의 허세와 이를 부러워하는 우리를 적나라하게 기록한다.
과시본능이라는 대목에서 학창시절을 떠올렸다. 그 시절 나는 비싼 패딩이 없었다. 꽤 의연한 척 했지만, 속으론 내심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돈 없어도 괜찮다 스스로를 달래며 넘겼었지만, 머릿속으로 그 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었고, 또 그 기억을 부정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베블런의 글에서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음을 확인하고 말이다.
불편함을 통해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한다. 평소라면 덮어두고 부정했을 것들을 진지하게 때론 치열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불편한 독서와 적나라한 서술을 즐기기로 했다. 그리고 사람을 고민에 빠지게 하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기준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은 곧 나를 더욱 존중해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힘겹고 지겨운 독서에서 꽤 벅찬 기분을 느꼈다.
(2) 진화론의 진보적 재해석
한국의 진보주의자에게는 나쁜 습성이 있다. 안보와 같은 불리한 영역의 담론은 아예 피해버린다. 또 애국과 같이 보수 세력이 지배하는 단어는 애초부터 사용하기를 기피한다. 유한계급론의 기저에 깔린 사회진화론도 마찬가지다. 다윈이라는 말만 꺼내도 인상을 찡그리거나 기겁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태도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지적하고 싶다. 보수의 담론일수록 보수의 언어일수록 진보적으로 재해석해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회진화론은 주류경제학으로 무장한 보수우파의 전유물로 인식된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은 피할 수 없다. 경쟁은 제1의 원리이며, 경쟁 끝에 존재하는 것은 이미 승리한 것이다.(보수주의) 진보주의자가 진화론을 보기만 해도 혐오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냉혹한 자연의 법칙 이상의 약자를 존중하는 문명을 이룩하는 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진화론을 보수의 전유물로 방치 할 수는 없다. 나는 베블런을 읽으며 진화론의 진보적 해석의 가능성을 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진보적 진화론은 다음과 같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틀렸다(보수주의 전제 부정). 현존하는 것은 단지 불완전한 적응일 뿐이다. 우리는 항상 더 완전한 적응을 위해 투쟁한다. 구제도 보다 더 적합한 제도로 진보한다면, 우린 새 제도에 맞춰 언제든 적응하고 진화할 것이다.(진보의 당위) 꽤 그럴듯하지 않은가?
보수의 정서적 기반은 ‘공포’다. 반면, 진보의 정서적 근간은 ‘용기’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주의자는 보수우세 지형에 주눅 들어 정당한 반론조차 펼치기를 포기하고 있는 추세다. 이 과정에서 보수파는 진보가 우위에 있던 단어들을 마음껏 빼앗는다. 이를테면 ‘경제민주화’, ‘복지’ 등이 그렇다. 이들은 ‘애국’, ‘성장’과 같은 민중이 사랑하는 단어는 지키고, 반대진영의 단어는 빼앗는 담론공세를 펼친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용기를 잃고 방관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경계한다. 나는 베블런이 자신의 담담하지만 적나라한 기술법을 통해, 체제를 비판하고 진화론이라는 강력한 법칙에 새로이 진보성을 부여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땅의 진보주의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용기를 냅시다. 겁먹지 맙시다. 당당히 공론장에 나가 모든 것을 새롭게 재해석 합시다! 새가 좌우 두 날개로 날 듯 생각도 양팔로 나는 것임을 다시 되새겨봅시다.”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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