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칼럼은 글쓴이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것입니다.

알라딘 서재 블로그에 한 섹션을 만들어 

앞으로도 동시 연재할 예정입니다.

다양한 의견 및 관점의 하나로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치가 모두의 언어가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원문출처: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66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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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17-11-05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 pc버전과 북플이 서로 연동되지 않아 불가피하게 이미지 파일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sprenown 2017-11-05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해요..현재의 북핵위기,국제정치질서속에서 우리나라 외교안보의 나아갈 길을 제대로 짚어낸 것 같아요..

프리즘메이커 2017-11-05 14:05   좋아요 1 | URL
외교라는 게 워낙 시시각각이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들이 너무도 많죠. 저 분석도 곧 낡아버릴겁니다ㅠㅜ

sprenown 2017-11-05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외교라는게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거고 그러다보니 보수적 시각으로 접근할수 밖에 없어요 이상만을 생각하는 입진보들은 싫어하겠지만.기득권을 버리고, 행동하지도 못하면서...정치와 외교를 이상만으로 할수없는데..갑갑할 때가 있지요.
 





1. 공백의 일주일, 그리고 근황


 라식 15개월차 시력검사를 했는데 좌안 1.2/우안 1.0이 나오더군요.

저는 생물학적으로 좌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선생님이 활자중독으로 일시적으로 근시가 왔다네요.

그래서 적힌 시력만큼 안보이고 어두침침 한거라고.. 

꽤나 명예로운 진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눈 좀 쉬고 돌릴겸,

부산에 일주일간 요양을 갖다 왔습니다.




2. <자유론> 삼형제

 

밀의 <자유론>은 원래 쓰고 있는 책의 한 챕터를 담당하는 고전인데, 

글이 안 써지길래 그냥 세 종류를 비교하는 포스팅을 한번..(쿨럭)


글쓴이는 맨 오른 쪽 펭귄 클래식 문고판을 예쁘다는 이유로 샀는 데, 

번역이 영.. 

그래서 다른 번역판을 급하게 부산의 지인들에게 찡찡거려 얻어왔습니다.

그렇게 받아온 게 가운데 책세상 문고판과 좌측 문예출판사 단행본입니다.





3. 본격 비교



펭귄클래식의 자유론(권기돈 선생 번역)


장점 : 예쁩니다. 심플하게 예쁩니다. 포켓북이라 예뻐요.

가격이 쌉니다.(7,700원->6,930원 -10%)


단점: 번역에 한자투가 심합니다.

대표적으로 오류가 없다를 '무류' 혹은 '무류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고전 번역은 평준화 되어있어 해설판과 역자후기도 중요합니다만,

역자후기도 너무 볼게 없고, 해설판은 외국 학자의 평을 그대로 번역해왔습니다. 

가뜩이나 딱딱한 번역에, 외국학자 해설판을 재번역한 것이 더해지니

너무 학술적이고 고루한 느낌을 줍니다.내용을 파악하기 힘들었습니다.


추천도: 추천하지 않습니다. 

저같이 펭귄클래식의 문고판을 시리즈로 모으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읽고 활용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권하지 않습니다. 





② 문예출판사의 자유론(박홍규 선생 번역)


장점 : 문고판이 아니라 큽니다. 

그래서 편집상의 가독성이 좋습니다.

단행본치고 저렴합니다. (10,000원->9,000원 -10%)

한자투지만 비교적 깔끔합니다.

 흐름에 따라 적절한 소제목을 달아두어

내용 파악이 쉽습니다.


단점: 그러나 역시 한자를 세련되게 잘 이용했다고 한들,

법학자 특유의 현학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루합니다.

가끔 멋있는 번역이 있어 인용을 하고 싶은 욕구가 종종 생깁니다만,

그와 맞먹는 정도로 딱딱한 번역이 많습니다.

해설도 2009년에 근거한 해설이라 시의성이 좀 떨어집니다.

(국가보안법이니 반공정서니 하는 그런 시대배경을 담고 있는 해설입니다.) 

물론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도 있지만 좀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입니다.

디자인도 영..  


추천도: 포켓북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면 추천해봅니다. 책이 크거든요.




③ 책세상의 자유론(서병훈 선생 번역)



장점 : 번역이 평이합니다. 셋중에 가장 쉬운 번역입니다. 

포켓북이라 가격이 저렴합니다. (7,900원-> 7,110원 -10%)

해설이 튼실합니다. 셋중에 가장 가성비가 좋은 듯 합니다. 

(그래서 가장 많이 팔렸겠지요?)


단점: 쉽게 읽히나 번역이 밋밋합니다. 

이해에 쉬운 번역이나, 인용에 불리한 번역인 셈이지요.

(박홍규 선생의 번역과 반대)



추천도: 셋중에서는 가장 무난히 만족스럽습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해제도 튼실하고 잘 읽히는 편입니다. 추천합니다.







4. 앞으로는?


써야할 글이 너무 많은데 밀렸습니다. 

투고기사도 몇개 써내야 하고, 공모전 서평도 써야하는 데..

왜 제 게으름은 여전한지요...

자유가 방종으로 빠져서...

최저의 글 생산량을 보이고 있습니다..

분발하겠습니다.


-2017.11.3 늦장 포스팅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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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7-11-04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본 비교는 독자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전 주로 서병훈 고수님 번역과 저서로 스튜어트 밀을 배웠는데, 박홍규 교수님 번역도 궁금해 지네요.

프리즘메이커 2017-11-04 13:35   좋아요 1 | URL
제가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었을 때, 홍신문화사 번역이 정말 좋았었는데요..밀의 자유론도 있더군요.. 저는 이걸 한번 구해봐야겠습니다 ㅎㅎ

cyrus 2017-11-04 1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번역체가 밋밋해도 저는 책세상 판본을 선택할 것입니다. 밀 전공자의 번역을 선호해요. 해설이 충실해서 좋고요. ^^

프리즘메이커 2017-11-04 20:0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해설이 특히 월등합니다.
 


 1. 사자 무리와 유한계급

 



 사자는 힘의 상징이다. 특히 사람들은 수컷의 화려한 갈기와 날카로운 발톱을 숭상한다. 위엄 있는 몸짓은 보고 있기만 해도 기운차다. 사자는 강하기에 초원에서 배를 내밀고 원 없이 잘 수 있다. 초원에서의 여가는 오직 사자에게만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사자를 ‘백수의 왕’이라 부른다. 야구팀에서 부터 군대의 깃발과 여러 집단의 상징물로서 사자를 새겨 넣는다. 용맹한 인물 앞에 ‘사자왕’ 이라는 칭호를 영광스레 붙여준다. 사자는 화려하고 강하다. 강해서 화려하다.






 그러나, 사실 실용적인 관점에서 수컷 사자는 쓸모가 없다. 백수(百獸)의 왕이 아니라 백수(白手)다. 하는 일이 없다. 과시용 갈기는 매복에 불리하다. 갈기로 장식하기 위해 크고 무거워진 머리로 인해 굉장히 느리다. 도주하는 사냥감을 도저히 잡을 수 없다. 단지 날렵한 암사자 뒤에 서서, 하이에나들 못 오도록 어슬렁거리는 게 사냥에서 하는 일의 전부다. 사자 수컷은 겉모습만 그럴 듯 할뿐, 철저히 비실용적이다.


 수컷 사자들이 하는 거라곤 빈둥거리거나 자는 게 대부분이다. 배고프면 암컷이 사냥해온 것들 뺏어 먹는다. 다른 사자들과 쓸데없이 서열대결을 벌인다. 안 그래도 밉상인데 발정기엔 암사자 주변에서 자꾸 귀찮게 치근덕거린다. 살림을 하느라 항상 바삐 뛰는 암컷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래서 종종 수컷은 암컷의 구박과 발길질 세례를 받는다. 화려함 이면엔 비생산성이 숨어있다. 


 인간의 세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야생의 법칙은 인류 문명에서도 통한다. 사자 수컷의 습성은 그대로 수컷 호모 사피엔스에게도 전래되었다. 이들은 인간무리 생존투쟁에서 승리하여 막대한 부를 독점했다. 이제는 생산 활동을 면제 받고 전문적으로 돈 자랑만하는 세련된 한량들로 재탄생했다. 스스로 노동능력을 물적으로 정신적으로 거세한 후, 온갖 분야에 과시용 ‘갈기’를 달았다. 


 이들 집단에 베블런은 유한계급(The Leisure Class)[1]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줬다. “이제까지의 철학이 세상을 다양하게 해석해온 것이라면, 앞으로의 철학은 세계를 변혁 시키는 것이다” [2] 라며, 참여를 강조한 마르크스 달리, 베블런은 그저 지켜보고 있는 그대로를 담담히 기록할 뿐이었다. 차분한 어조로 또 조용하고 치밀하게 이들의 행태를 기술했다. 이점에서 마르크스가 피 끓는 혁명가라면 베블런은 3인칭 관찰가였다. 물론 그 타겟은 ‘부자’였다.



[1]유한계급이라는 번역은 딱히 와 닿지 않는다. ‘유한’이라는 단어는 보통 한자가 위세를 상실한 작금, 한계가 있다는 통상적인 뜻으로 직감되기 때문이다. ‘한가한 무리들’ 이라는 번역도 있지만, 이 역시 성에 차지 않는다. 여가라는 것도 사전적으로 노동하고 남는 시간이라는 의미이므로, 노동을 면제받는 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사치 계급’ (문맥에 따라 유흥계급)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2]엥겔스의 책 『포이에르 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의 부록으로 실린,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나온 말이다. 워낙 유명하여 이곳저곳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2.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

(1) 생존본능과 과시본능간의 관계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살아남기 위해 투쟁한다. 이른바 적자생존의 원리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 하는 개체만이 살아남음으로써 우월함을 증명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환경이 요구하는 특정조건에 알맞게 강해야 한다. 이 자연의 원리는 인간 문명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3] 이른바 사회에서도 특정 ‘제도’와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는 자가 승자요 지배자에 위치에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원시사회에서의 승리의 필수요소는 ‘완력’이다. 사회 발달이 미미한 만큼 강함을 증명하는 수단은 눈에 바로 보이는 근육과 덩치, 즉 힘이다. 야생과 다를 바 없는 초기조건에서, 자기보존 및 경쟁자와의 서열싸움에서 생존하려면 힘이 세야한다. 문제는 강함에서 멈추면 안 된다. 생존투쟁 당시만큼, 투쟁 이후가 중요하다. 승자가 승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독점하려면, 강함을 ‘과시’하고 ‘증명’하여 잠재적 경쟁자들의 도전을 사전에 틀어막는 예방조치를 취해놔야 한다. 


 과시는 승자의 전유물이다. 승리한자만이 과시 할 수 있다. 과시의 본래 기능이 도취감에서 비롯되었건 복종유도 차원에서 유래했건 간에 과시는 승자만이 할 수 있다. 원시시대 이래 권력자의 화려한 치장구, 수많은 미모의 부인들, 장대한 건축물, 수많은 종교적 의식 행위 등은 승자의 강함을 증명한다. 이것들은 후대에 세습되어, 나중에는 강함과 과시의 인과관계가 뒤섞여 ‘본능화’ 된다. 즉, 강한과 과시가 혼연 일체되어, 근거 없는 과시와 허세라도 은연중 강함을 떠올리게끔 각인된다.




[3]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인간사회에 적용된 것이다.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이 ㄷ프로이트와 마르크스, 그리고 다윈은 인류 지성사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중 다윈의 이론만이 2015년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곳곳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베블런 역시 이 책에서 진화론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2) 제작본능과 과시본능간의 관계


 베블런은 노동이 인간의 본능임을 누누이 밝혔다. 그러나 스미스와 리카르도,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설’ 같이 이윤의 원천을 다루는 본질적 차원의 접근은 아니었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했으며, 누구나 제작본능을 가지고 생존해왔다는 정도의 기본 입장일 뿐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제작본능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격하와 전가였다. 즉, 태초에 모두가 가졌던 제작본능이 멸시받고 하층의 전유물이 된 과정과 근원에 있었다.


  시간을 다시 미개사회로 돌려보자. 이 부분의 설명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더 직관적이고 이해에 용이하다고 판단하여, 그의 설명을 빌리기로 한다. 자연의 괴롭힘 및 짐승과의 대결에서, 열악한 신체를 타고난 인간에게 제작본능은 불가피했다. 기초적인 생계유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본능이었다. 원시 공산사회에서는 모두가 노동을 하며 평등한 관계로  협력했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생산력이 일정정도 증대하였고, 사유재산 제도와 소유개념이 등장하였다. 이를 비롯해 권력관계가 형성되었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형성되었다. 


 다시 베블런의 설명으로 돌아오자. 여기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 제도와 환경에 빨리 적응한 자들은 지배계급이 된다. 힘을 통해 정치-경제적인 자원을 독점 소유한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노동을 착취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생산에 나설 필요가 없게 된다. 기초생활은 물론 부귀영화를 누릴 조건까지 완비된다. 이제 생산 활동을 면제 받고 누리기만 하는 전사, 성직자등의 계급이 탄생한다. 이렇게 지배계급은 유한계급으로 탈바꿈 한다.


 계속해서 유한계급은 우월함을 증명하고 또 과시하기 위해 유리한 제도를 명문화하고 만들어낸다. 이른바 유한계급 제도다. 제도에 덧붙여 생산은 비천한자들의 몫, 소비는 유한계급의 몫이라는 이분법적 정신태도를 줄기차게 주입한다.[4] 새롭게 태어난 이 제도에 상층부 하층부 할 것 없이 적응 경쟁이 분다. 제도와 결합한 유한계급 이데올로기는 사회 곳곳에 확대 재생산되며,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뇌리에 알게 모르게 뿌리를 내린다. 

 

 한번 확립된 유한계급제도와 유한계급적 태도는, 인간의 적응과정 및 보수적 습성[5]과 맞물려 대를 이어 갈수록 강화된다. 최초의 유한계급과 달리 세습한 2세대의 유한계급들은 제작본능 자체를 사용해본 경험이 없다. 제작본능을 잊고 살며, 노동이 하층에게 전가되는 상황을 태생부터 당연시 여긴다. 2세대 유한계급은 제작본능 대신 철저히 과시본능만 발현하며, 노동하는 자를 천대하고 혐오하는 지경에 이른다. [6]

 



[4] “없는 것들”, “없는 집안”, “때려치우고 공장에서 일이나해라”, “막노동(노가다)” 같은 표현이 비속어로 쓰이는 것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 “공장에서 미싱할래? 대학에서 미팅할래?” 류의 수험생 다짐으로 쓰이는 표어들이 특히 더 그렇다. 

[5] 인간의 보수적 습성과 적응에 관해서는 3장에서 다룰 것이다.

[6] 맨손으로 시작해 대기업을 일군 한국의 재벌 창업주들이 근면, 성실, 절약, 검소의 이미지를 주로 갖는 반면, 재벌 2-3세들이 오만한 태도로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현상도 이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조현아의 땅콩회항’ 사건을 들 수 있겠다. 



(3) 완력에서 금력으로 : 공격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낭비하라


 권력과 명성을 획득하는 원시적인 방법은 완력을 통한 결투였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 경제양식이 확립됨에 따라, 완력결투방식은 더 이상 통용 될 수 없었다. 이제 겨룸의 양태는 금전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완력에서 금력으로의 진화다. 유한계급들은 금력과시 경쟁을 벌인다. 승리하는 자는 후한 평판과 높은 명성을 거머쥘 것이다.


 베블런이 주로 연구한 유한계급들은 미국의 부자였다. 미국의 부자들은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거부(巨富)였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은 좁은 영토에 그마저도 여러 국민국가의 경계로 쪼개진, 속칭 케인즈-베스트팔렌 체제였다. 또한 전통과 역사가 얽혀 대자본이 완전히 발현하기 힘든 제약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토착 인디언들에게는 송구한 말이지만, 서구 제국주의자들 입장에서는 그 땅이 주인도 없고 규제도 없는, 잠재력이 살아 숨 쉬는 기회의 땅이었다. 공백상황을 이용하여 자유경쟁을 통해 미국의 시장경제는 무한대로 팽창했다. 유럽보다 넓은 땅을 단일 경제권으로 묶을 수 있었다. 소위 ‘규모의 경제’에 의해 독점 대자본가들이 출현했다. 이들이 세계에 유래가 없는 갑부, 미국의 유한계급이었다. 


 

특히나 미국의 유한계급들의 금력과시 경쟁은 그 사이즈나 규모 역시 미국다웠다. 이들은 혼자서 아무리 낭비하고 자랑하고 허비해도, 한명의 사치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기존의 단순 낭비방식으로는 자신의 흘러넘치는 금력에 걸 맞는 과시본능을 충족치 못함을 자각 한다. 이제 이 유한계급들 자신의 금력을 증명할 방편으로, 자신 대신에 과시해줄 ‘대리 유한계급’을 창조한다. 이들이 돈을 대신 허비 할수록, 본 주인의 명성이 상승한다. 


 초조해진 유한계급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부를 소비하고 낭비하고 과시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재벌 총수가 세우는 대학들, 지식인과 예술가에 대한 후원(식객), 막대한 종교 기부금등이 있다. 이들은 존재 자체가 후원자의 금력을 만방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의 홍보 대행사의 자연형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스포츠 구단에 대한 후원[7]이 가장 전형적인 과시소비인데, 스포츠 자체가 인간의 경쟁본능을 충족시킬뿐더러, 영웅 심리를 조장하여 구단주에게 귀속시켜 줄 뿐만 아니라, 생산성이 전혀 없기에 귀한, 가장 파급력이 큰 낭비 법이기 때문이었다.



[7] 영국 프로축구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맨체스터 시티의 구단주 억만장자 만수르나 첼시의 구단주 로만을 그 실례로 들 수 있다. 이들의 천문학적이고 공격적인 투자는 대중을 열광시키고 있다. 여기저기서 유한계급들이 스포츠에 투자해 유명세를 타는 현상을 우리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3. 유한계급제도와 보수주의

 (1) 생산 계급의 과시본능 

  

 제작 본능을 활용하여 하루하루를 힘겹게 영위하는 일반 대중 들은 부에 관한 모순감정을 갖게 된다. 집중된 부를 혐오하면서도 동경한다. 마르크스가 전자에 초점을 맞추어 세상이 뒤집힐 것을 예견했다면, 베블런은 후자를 보고 세상은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유지될 것을 암시했다. 생전 경험하지 못한 유한계급의 화려한 삶은 대중의 박탈감을 자극하면서, 종국에는 선망으로 승화되었다.[8] 제작본능과 과시본능간의 철저한 계급적 분리는 ‘부’ 자체가 신성시 [9] 되도록 만들었다.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는 전 계급에 모방 열풍을 일으킨다. 모든 계급은 자신의 형편껏 체면과 겉치레에 낭비하기 시작한다. 사회전체의 복리를 더욱 증진 시키는데 그 자원을 사용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한계급의 생활양식을 일정 부분 따라한다. 생활필수 활동을 줄여서라도 체면치레를 위해 과소비한다. 유한계급은 과시를 통해 사회의 유행 창조권을 쥐고, 문화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사회전체를 온전히 지배한다. 그람시 적으로 보면 유한계급은 문화 헤게모니를 쥔 지배계급이다. 


 유한계급들은 독특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 일부러 비싼 것들만 골라 사다보니, 비싸야 아름답다고 혼동하는 지경에 이른다. 즉, 가격이 가치를 정한다.[10] 문제는 생산계급이 이 법칙을 선망하며, 더욱 추종한다는데 있다. 생활 여력이 모자라는 이들도 사회생활을 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산다. 

 

 생산계급의 소비는 개성과 자기만족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기보다, 없어 보인다는 멸시를 받기 싫어 무리하게 소비한다. 노력하여 유한계급에 오르고 싶지만 번번이 좌절당한다. 심적으로 방어하며 살지만, 무시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내 자식만은 나와 같은 삶 물려주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희생하기로 결의한다. 

 

 위와 같은 생산계급 부모의 희생적 태도는 인구변화에도 영향을 준다. 맬서스는 그의 저서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로 증가하기 때문에 벌어질 재앙들을 걱정했다. 그러나 베블런은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한다. 생산계급은 유한계급의 생활기준을 따라잡기 위해, 하나만 낳아 모든 부모의 희생을 몰아주기 때문에[11], 오히려 인구는 감소할 것이라고 말한다. 개도국의 경우 맬서스의 이론이 타당한 것 같지만, 이미 선진국들에서 벌어지는 출산율 저하현상은 베블런의 이론을 뒷받침 한다. 




[8] 드라마의 단골 소재는 재벌2세남과 평범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이다.일종의 대중 판타지로 자리매김했다.

[9]10년 전 한국의 유행어는 모 카드사의 광고 멘트 “여러분 부자 되세요!”였다.

[10] 시장 가치가 가격을 정한다고 말하는 주류 경제학에서는 이 현상을 설명 할 수가 없다. 베블런의 조용한 한방에 벙어리가 된 주류 경제학은 ‘베블런 재’라는 예외를 두었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묘한 통쾌함을 느꼈다.

[11] 한국에 신조어 중, ‘등골 브레이커’ 라는 말이 있다. 대개 저소득–비정규직 서민집안의 과시적 소비행태를 비꼬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부모는 먹고 싶은 것 참아가며, 후줄근한 옷을 입으면서 희생을 담당한다. 반면 자식에게는 고가의 패딩점퍼와 같은 사치품 및 고액의 사교육 제공을 마다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소비행태를 보인다.



(2) 만인의 만인에 대한 보수성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생존을 위해 적응하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적응한다. 한번 접한 환경에 온 힘을 다해 적응하고 나면, 어제 살던 대로 오늘을 살고, 오늘 살던 대로 내일을 살 것이다. 삶에 대해 한번 형성된 인간의 인식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과거의 경험은 그럭저럭 여태껏 나를 생존하게 만든 꽤 확실한 방법이며,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제도와 환경에 적응한 정신적 태도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진보는 정말 어려운 조건하에서만 이루어진다. 진보는  첫째로, 기존의 제도가 새로운 환경에 부적합하며, 둘째로 불편함이 계속 누적되어야하고, 셋째로 불편함을 감수할 인내심이 모두 소멸되어, 변화가 불가피할 경우에만 이루어진다. 진보는 계단함수다. 문제는 결국 이루어질 진보도 계층별로 다른 속도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늦게 받아들인 계급의 강한 저항에 추가적으로 부딪혀야 한다.[12]진보하기 정말 어렵다.

 

 유한계급의 보수성에 관해서는 ‘잃을 것이 많기에 보수적’이라는 통상적 설명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베블런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유한계급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기 때문에 변화하는 환경의 압박에 최대한 적게 노출된다. 그래서 변화를 뒤늦게 알아차리기에 기존제도대로 별 탈 없이 살아간다. 따라서, 풍요로움이 변화의 노출을 차단하여, 문제의식이 생기지 못하므로 보수적이다.

 

 문제는 이 유한계급제도 하에서 가장 고통을 받는 생산 계급이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은 칼 마르크스가 예기치 못한 부분이다.[13] 유한계급은 그렇다 쳐도,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들은 제작본능을 제대로 대접해주는 변혁을 꿈꿔야 한다. 사회의 생산성과 혜택을 모두에게 고루 돌아가도록 요구해야한다. 그러나, 착취당하고 무시당하면서도 생산계급은 보통 보수적이다. 분명 이는 쉽게 납득 할 수 없는 사안임이 분명하다. 


  베블런은 간단하게 설명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피곤해서 보수적이며, 진보는 피곤함과의 투쟁이다. 생산 계급은 고된 노동에 지쳐, 변화에 대응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 힘겹게 적응한 기존제도가 수명이 다 할 때 까지 어떻게든 버틸 만큼 버틸 수밖에 없다. 변화에 굴복하는 순간 불가피 하게 새로 적응한다. 생산계급은 가혹한 착취로 피곤하기 때문에, 문제를 의식할 여력이 없어서 변화를 기피한다.


 결국, 유한계급제도는 유한계급과 생산계급의 보수 동맹으로 굳건히 유지되는 보수적 체제다. 가난한 사람은 먹고 살기 바빠 바꿀 여력이 없기에 보수적이고, 부자는 바꿀 필요를 못 느껴 보수적이다.[14] 이 사이에서 중산층이 고통 받는다. 결국 진보의 주도세력은 중산층이 될 수밖에 없다. 중산층이 가장 진보적이며 변혁을 주도하는 계층임은 여러 경험 연구에서 실증되고 있다.[15]




[12] 또한, 사회 한 부분의 변화가 전체의 변화로 이어지기 어려움도 감안해야 한다. 제도의 각 부분은 진화와 적응의 과정을 거쳐 최적화된 상태로, 유기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13] 부의 불평등 분배가 혁명의 트리거 아니라 오히려 봉쇄장벽으로 기능함을 뜻한다.

[14] 2012년 한국의 대선은 이를 가장 여실히 보여준다. 서울대학교 강원택 교수에 따르면 , 저소득층의 66%가 보수당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또한 상위계층의 57.4%가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 참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1230943421&code=910110

[15] 최근 한국에서는 소위 ‘강남좌파’ 현상이라고 통칭되고 있다. 


4. 과시의 나라 한국

 


(1) 랜드마크에 대한 집착과 타워 열풍


 과시는 행정의 영역에서도 유효하다. 특별히 내세울 자연경관이나 아이템이 없는 지자체는 너도 나도 대규모 랜드 마크를 건설한다. 대형 랜드 마크로 무특색을 감출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각 지자체 마다 천편일률적인 랜드 마크 건설의 목적은, 첫째 정치인이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함이며, 두 번째는 다른 도시보다 발전했음을 과시하는 목적이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빈곤한 한국의 관료들은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타워를 짓기 시작했다.[16] 전시 졸속 행정의 문제는 세금이 정말 돌아가야 할 복지나 경제발전에 들어가지 않고 전시용으로 낭비된다는 차원에 있다. 유한계급의 낭비가 공공복리에 돌아가지 못함을 밝힌 베블런의 지적이 또 다시 들어맞는 부분이다.


(2) 완장 문화, 완장 페이

 

 완장 문화는 권력을 남용하는 행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소설가 윤흥길 「완장」이라는 작품에서 유래했다. [17] 이 단어는 권력과 권한의 관점에서도 유용한 말이지만, 그 사람의 높은 지위와 특별함을 과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베블런 적이다. 우리는 어제까지 순진하고 선했던 사람이, 완장을 찬 이후 권위적으로 급변하는 현상을 종종 목격한다. 지위를 과시함으로써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는 행태라 할 수 있다.


 또한, 노동의 영역에서도 완장 문화가 판을 치고 있다. 일반 노동현장에서 같은 돈을 주지만, ‘매니저’, ‘부점장’ 등의 완장을 채워주고 더욱 가혹하게 착취하는 행태를 종종 목격 할 수 있다. 부족한 임금에 명예를 부여해서 정당화 하는 지급행태를 필자는 완장 페이(Pay)라고 부른다.


  문제는 돈이 적고 업무가 과함에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있다. 일가친지 및 친구들과의 사적인 자리에서, 자신이 높은 직급에 있음을 과시하면 무시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완장 페이를 받는 노동자는, 당장의 임금이 부족한 것보다 과시를 할 수 있는 상황에 만족한다. 노동착취의 내면적 정당화 기제로서 과시가 충분히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




[16] 전국에는 양산타워, 대구타워, 남산타워, 구리타워, 부산타워, 경주타워, 청주명암타워, 속초타워, 완도타워 등 수많은 타워들이 각지에 생겨나고 있는 추세다. 모든 타워가 다 낭비용이고 나쁜 타워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왜 꼭 도시에 타워가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에 거액의 돈을 써야만 하는 가?

[17]설명은 유시민 선생의 『국가란 무엇인가』의 292페이지에서 빌려왔다. 더 정확한 각주는 유시민 선생이 다음과 같이 별첨한 것을 그대로 인용한다. 윤흥길, 「완장」, 현대문학, 2002



5. 소회(所怀)

(1) 불편한 독서의 적나라함

 

 마르크스, 다윈, 프로이트 그리고 베블런의 공통점은 이들이 쓴 책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대개 인정하기 싫지만 그럴 수 없는 적나라함에서 온다. 다윈은 인간이 원숭이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변태성과 악마성을 밝혔다. 마르크스는 당신이 바보같이 착취당하고 있다 말한다. 그리고 베블런은 부자들의 허세와 이를 부러워하는 우리를 적나라하게 기록한다.


 과시본능이라는 대목에서 학창시절을 떠올렸다. 그 시절 나는 비싼 패딩이 없었다. 꽤 의연한 척 했지만, 속으론 내심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돈 없어도 괜찮다 스스로를 달래며 넘겼었지만, 머릿속으로 그 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었고, 또 그 기억을 부정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베블런의 글에서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음을 확인하고 말이다.


 불편함을 통해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한다. 평소라면 덮어두고 부정했을 것들을 진지하게 때론 치열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불편한 독서와 적나라한 서술을 즐기기로 했다. 그리고 사람을 고민에 빠지게 하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기준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은 곧 나를 더욱 존중해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힘겹고 지겨운 독서에서 꽤 벅찬 기분을 느꼈다.



(2) 진화론의 진보적 재해석


 한국의 진보주의자에게는 나쁜 습성이 있다. 안보와 같은 불리한 영역의 담론은 아예 피해버린다. 또 애국과 같이 보수 세력이 지배하는 단어는 애초부터 사용하기를 기피한다. 유한계급론의 기저에 깔린 사회진화론도 마찬가지다. 다윈이라는 말만 꺼내도 인상을 찡그리거나 기겁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태도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지적하고 싶다. 보수의 담론일수록 보수의 언어일수록 진보적으로 재해석해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회진화론은 주류경제학으로 무장한 보수우파의 전유물로 인식된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은 피할 수 없다. 경쟁은 제1의 원리이며, 경쟁 끝에 존재하는 것은 이미 승리한 것이다.(보수주의) 진보주의자가 진화론을 보기만 해도 혐오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냉혹한 자연의 법칙 이상의 약자를 존중하는 문명을 이룩하는 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진화론을 보수의 전유물로 방치 할 수는 없다. 나는 베블런을 읽으며 진화론의 진보적 해석의 가능성을 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진보적 진화론은 다음과 같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틀렸다(보수주의 전제 부정). 현존하는 것은 단지 불완전한 적응일 뿐이다. 우리는 항상 더 완전한 적응을 위해 투쟁한다. 구제도 보다 더 적합한 제도로 진보한다면, 우린 새 제도에 맞춰 언제든 적응하고 진화할 것이다.(진보의 당위) 꽤 그럴듯하지 않은가? 


 보수의 정서적 기반은 ‘공포’다. 반면, 진보의 정서적 근간은 ‘용기’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주의자는 보수우세 지형에 주눅 들어 정당한 반론조차 펼치기를 포기하고 있는 추세다. 이 과정에서 보수파는 진보가 우위에 있던 단어들을 마음껏 빼앗는다. 이를테면 ‘경제민주화’, ‘복지’ 등이 그렇다. 이들은 ‘애국’, ‘성장’과 같은 민중이 사랑하는 단어는 지키고, 반대진영의 단어는 빼앗는 담론공세를 펼친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용기를 잃고 방관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경계한다. 나는 베블런이 자신의 담담하지만 적나라한 기술법을 통해, 체제를 비판하고 진화론이라는 강력한 법칙에 새로이 진보성을 부여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땅의 진보주의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용기를 냅시다. 겁먹지 맙시다. 당당히 공론장에 나가 모든 것을 새롭게 재해석 합시다! 새가 좌우 두 날개로 날 듯 생각도 양팔로 나는 것임을 다시 되새겨봅시다.” 라고 말이다.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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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8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0-29 02:18   좋아요 0 | URL
저도 동의합니다. 물론 베블런은 사회변화에 새로 적응할 여력이없어서라고 보겠지만요 ㅋㅋㅋ
 




나는 글을 왜 쓰지?

이 원고 뭉치가 책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책을 펴낼 실력이 있나?

받아주는 출판사는 있고?

찍어내면 팔리긴 할까?

뭐 아무튼 일단 쓰자


2017.10.25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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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0-25 19: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됨.

프리즘메이커 2017-10-26 01:05   좋아요 1 | URL
크흑..단호박!
 

▲ 자크 데리다의 파이프 담배를 문 사진은 비흡연자인 나도 한 번쯤 

담배를 피워볼까 하는 생각이 나게 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사진출처: https://twitter.com/derrida_bot)




I. 해체된 근대와 이성       

 

이성이 너희를 진리로 인도하리라.’  합리성으로 무장한 근대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이성이 선물한 기술의 발전과 이를 주관하는 합리적 시스템이 인간을 풍요로운 천국으로 안내하리라 낙관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근대가 낳은 희대의 괴물, 나치의 탄생과 만행으로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긍정은 이성의 실패요, 근대인의 오만이었음이 드러났다. 인간의 안녕과 복리를 가져다 주던 이성이 돌변한 것이다.

 

물리학과 화학은 인간 종을 절멸시킬 만한 위력을 가진 핵무기와 생화학 가스로 변질되었다. 생리학과 유전학은 인종주의와 결합하여, 아리안 족의 유전적 우수성을 알리는 선전도구열등한유대인을 학살시킬 명분으로 둔갑되었다. 철학의 합리적 체계는 나치즘의 토대를 세웠고, 칼 슈미트 류의 법학자와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들은 나치에 부역하며 추악한 권력의 시녀가 되었다. 도구적 합리성을 앞세워 탄생한 관료제는 아이히만과 같은 생각 없는살인 기계를 탄생시켰다. 전혀 비정치적일 것 같던 근대의 영화와 미술 또한 히틀러를 신격화하고 나치를 미화하는데 동원되었다. 이성과 합리성에 관한 신화가 붕괴한 것 이다.

 

이렇듯 이성은 풍요를 가져다 줌과 동시에 파괴를 가져다 주었다. 이성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고 곳곳에서 한계에 부닥쳤다. 무엇이든 명쾌하게 구분 해내는 이성으로 수많은 것을 설명해왔지만, 더 이상 이성이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 역시 반대급부로 증가하였다. , 이성은 합리적 이면서도 비합리적이었고, 그 이면에는 편견과 권력이 늘 이성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하며 이성의 결함들을 은폐해온 것이다. 이에 수십 년간 침묵을 지켜오던 한 철학자가 애매성과 모호성의 폭력 위에 세워진 근대성의 양면성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이를 내부로부터 해체한다. 그가 바로 자크 데리다이다.

 

이 책은 데리다의 저작 중에서도 법과 폭력, 정의를 다룬 각별한 저작이다. 그러나, 심오한 내용을 짧은 분량과 익숙하지 못한 (그러나 데리다 식으로 장래에 익숙 했던 게 될) 해체주의적 필법으로 기입하여, 본인은 이 책을 읽고 소화하는데 적잖이 애를 먹었다. 본인은 한국의 대학원생이다. 12년에 달하는 의무교육 기간 동안에는 한국식 암기와 주입이라는 전 근대적방식으로 길러져 왔고, 이제 대학원에 진학하여 겨우 막 틀에 박힌 암기에서 벗어나 근대적논증에 진입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근대적인 논리적 구분에 갓 익숙해진 터라, 변명 아닌 변명으로 치열하게 읽고 공부했음에도, 감히 데리다 식 탈 근대적해체독법에 온전히 범접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미리 알린다.

 

본 서평을 다음과 같이 구성하였다. 먼저 데리다의 철학 전반에 대해서 개괄 할 것이다. 다음으로 법의 힘 의 핵심 논지를 간략하게 살펴 보겠다. 마지막으로 이 둘을 종합해 민주주의와 정의, 해체에 관한 필자의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또한, 난해하기로 유명한 데리다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욕심에, 본 책과 더불어 추가적으로 5권의 해설서를 참고하여 본 서평을 작성하였음을 알린다. 서평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하였다




II. 데리다 철학의 개괄

 

1. 음성과 대화의 독재를 해체하라

 

상에서 해체란 흔히 파괴와 비슷한 용법으로 쓰인다. 가정의 해체나 가정의 파괴가 주는 함의는 비슷하게 인식된다.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겠다는 전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파괴적이건 해체적이건 한 조직의 존재가 소멸로 인지되는 것은 매한가지니 말이다. 그러나, 파괴와 해체 사이엔 미묘한 차이가 있다. , 파괴란 외적에서 특정 집합체를 해체시키는 사동의 표현이며, 해체란 집합체 내부에서 각각의 구성체들이 분리되어 나감을 표현하는 능동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성이 호령하던 세계는 내재되고 은폐된 폭력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 폭력의 중심에는 우열, 선악 따위의 이분법적 인식론이 대차게 들어서 있다. 여기서 데리다가 포착한 가장 극성스러운 이분법은 음성과 문자의 우열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이래로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화와 음성이었다. 서양 철학사에서 음성과 대화는 이성을 구현해내는 우월한 특권매체로 군림해왔고, 문자와 기록은 온전히 내용을 담지 못하고 혼동을 주는 열등한 매체로 단지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엔 오히려 이성의 체계를 생생하게 구현하는 매체는 텍스트, 즉 문자였다.[1] 글자는 일종의 기호고, 기호는 누구에게나 같은 대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2] 물론, 문자기록이 군림하고 음성대화가 추락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질서의 재 반복이며, 또 다른 우열세계의 폭력이다. 데리다 에게는 문자나 음성이나 같은 언어매체이고, 문자기록의 텍스트 역시 일정부분 불필요함을 갖고 있는 해체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시니피앙(기표로 번역)과 시니피에(기의로 번역)의 불일치를 우리는 해체해야 한다. 특히. 하나의 시니피앙에 여러 가지 시니피에가 산출 되는 경우[3]가 우리의 의사소통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어떤 단어를 보고 드는 의미란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다시 이 생각은 우리의 경험에서 출발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직접 체험치 않은 간접경험에 있다. 간접경험은 말 그대로 자신의 상상으로써, 짐작과 편견을 산출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왜곡과정을 통해 텍스트를 오해하고 또 폭력적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해체 되어야 할 대상이며, 시니피앙의 본 모습을 가로막는 시니피에는 생각지 말아야 한다. , 텍스트는 텍스트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하며, 우리는 글의 해체 통해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

 


2. 해체야 말로 정의다

 

이성의 목적을 갖고 있다. 그 자체가 진리의 세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성은 낙원으로 이끌어줄 메시아이자, 타락한 현실을 최초의 순수했던 기원으로의 회복을 위한 특급열차로 추앙 받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근대의 이성은 끊임없이 이분법적 대립항을 통해 세상을 파괴적으로 또 폭력적으로, 하지만 원래부터 그랬었던 것인 냥, ‘조작하고 재구성해왔다. 이성과 감성을 대립시켰고, 남성과 여성을 대립시켰고, 백인과 흑인을 대립시켰고 그 안에 우열과 선악과 같은 속성을 부여하면서 합리화 해왔다.


이렇게 이성이 단언하며 정립한 이분법 구도는 세상의 여러 차이를 가진 다원성을 억압하고 파괴하며, 강제적으로 이분법 구도에 편입시켜온 폭력의 산물이다. 보고 싶은 것만 단순한 대립항으로 취사선택 해온 폭력적인 인식론 속에서, ‘장래에 없는 것으로 되게 될다양한 소수는 있는 듯 없는 듯 유령과 같이 주류를 배회하며 음지에서 존재를 부정당하며 살아야 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남성과 여성의 대립에 LGBT[4]의 존재 자체가 은폐되고 부정되었다. 선택지는 둘 중에 하나였다. 남자 아니면 여자. 백인과 흑인이라는 논리적 구분 역시 세상의 반절인 수 많은 아시아인, 인디언과 같은 황인종이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왔다. 좌파와 우파의 대립도 사실 이 이분법 구도를 넘어서지 못한 채 상대적 강약과 우열의 한쪽 편 에 기생한 것이었다. 이들은 이성감성의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안주하며, 인간사회에 내재적으로 숨어있던 폭력 어린 광기를 부정하거나 인지하지도 못한 채 살아왔다. 결국, 봇물처럼 터져 나온 광기어린 유령들을 제어하지 못하고 나치의 출현과 만행을 지켜만 봐야 했다.

 


이에 데리다는 해체야 말로 정의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이 텍스트의 참 뜻은 무엇일까? 왜 해체는 본질을 찾는 방도이며, 정의일까? 필자는 이렇게 이해했다. 이분법의 파괴에 맞서, 이성의 구분 짓기를 해체하여 그 안에 은폐되어있고 배제된 개별자들의 차이를 복원하고 숨겨져 있던 다원성회복하는 것. ‘남녀여남이 되는 게 아니라 구분 자체가 해체되어 한 사람의 개성 있는 인격체로 존중 받는 것. 흑백의 대립이 아닌 개개인의 인격체로 해체되고 분리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누리는 것. 억압되어있던 개별자들이 개성을 발현하며 숨쉴 공간시간을 내어주는 것[5] 것이 정의가 머무는 공간이며, ‘해체그 자체이다.




[1] 요즘과 같은 영상과 이미지 시대에 살고 있는 필자는 데리다의 주장에 약간의 의심을 품는다음성만큼 문자 역시 중요하지만음성과 영상과 시간적 동시성과 감각적 생생함이 모두 결합되어 있는 영상매체의 등장에 2d적인 문자가 여전히 이성체계에 더 부합할 것인가. 4d가 더 정교화되고 상상까지 재현해내는 가상공간이 등장하게 되는 근 미래에이러한 기술의 발전과 증폭과 결합이 온존하게 될 장래에도 인간의 사유를 글보다 더 생생하고 정확하고 구체화해서 표현해낼 매체가 등장한다면, (예를 들어 영화 해리포터에서 기억을 추출하고 담아두었다가 부으면 그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직접 체험하게 되는 펜시브와 같은 것들그때에도 여전히 문자일까?

[2] 기호는 전달자의 생각전달한 내용수용자의 인식과 이해라는 3항의 일치를 가능하게 해준다.

[3] 필자는 언어의 다의성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하였다.

[4] 레즈게이바이 섹슈얼트랜스 젠더의 알파벳 첫글자를 따서 만든 신조어이다.

[5] 데리다는 공간내기’  시간 내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III. 자크 데리다의 법의 힘

 

1. 법에서 정의로


 

데리다는 책에 앞장에서 이라는 용어를 찬찬히 뜯어보며 논의를 시작한다. , 법은 그 정의상 폭력을 자연히 함축한다. 더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법 안에는 폭력이 항구적으로 기입되어있다. 법에 힘이 없다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또한, 법은 정의와도 연관이 크다. 정의가 없다면 법은 광기 어린 폭력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법과 폭력의 차이를 벌려주는 것이 바로 정의. 하지만 우리는 법이 정의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법은 폭력이면서도 폭력이 아니고, 정의이면서도 정의가 아니다. 애매하고 정체 불분명한 것이다.[1]

 

이를 데리다는 크게 정의의 계산 ()가능성 정의의 결정 불가능성 정의의 긴급성 의 3가지 논리적 난관을 통해, 법과 정의의 연관성에 대해 조심스레 해체적으로 읽어나간다. 먼저, 정의는 계산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해체 불가능 한 것이고, 계산 가능한 지평과 범위를 넘어선 곳에 위치해 있다. , 정의와 법은 놓여있는 층위와 세계가 다르다. 따라서. 법은 정의를 닮으려 하지만, 절대로 닮을 수 없다. 계산 가능하고 또 계산 가능한 법은 계산 불가능한 정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법 조항을 근거로 위법과 적법을 구분할 수는 있지만, 정의와 부정의로 나아갈 수 없다. 만약 법적 판결을 맹목적으로 정의와 결부시킨다면, 그것은 기계적 판결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정의의 결정 불가능성이다. 우리는 정의의 이름을 빌려 선악에 대한 구분,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고, 사건의 본질과 현상을 재단한다. 하지만, 정의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정의는 결정을 항상 지연시킨다. 결정은 스스로 결정 될 수 없다. 누군가의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무언가를 단절 시키는 행위는 계산가능하고 규정되는 것이 가능한 영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다. 정의는 계산불가능하고 결정불가능하고 해체 불가능한 지평너머, 즉 법 너머에 있을 뿐이다.

 

마지막 난관은 '정의의 긴급성'이다. 정의는 주로 긴급할 때 출현한다. 무고한 목숨이 사그라들기 직전에, 즉시 정의는 소환되어 부정의를 바로잡을 것을 끊임없이 명령한다. 그러나 정의는 구체적인 행동을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며, 우리 역시 정의가 요구하는 바를 정확히 계산해내지 못한다. 다만 정의는 있는 듯 없는 듯 유령처럼 배회 할 뿐이다. 따라서, 이를 구원할 메시아의 역할에 부득이하게 기대야 한다. 정의는 최악의 부정의를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법을 끌어 안는다. 그리고 부족한 법에게 끊임 없이 정의자신을 계산 하여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법은 무한한 정의의 요구에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창조된다.          

 


2. 벤야민의 이름으로

 

모든 법은 자신이 정의를 독점하려고 한다. 모든 법은 자신이 정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승인한 것인가? ‘정의가 눈앞에 대화 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면, 정의에게 직접 부여했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법이 세워지는 최초의 순간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특정 법은 폭력을 기반으로 하여, 혹은 주변폭력을 제압하여 수립된다. 그 당시에는 그 폭력과 법은 어떠한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진공의 상태에서 법은 폭력으로써 스스로를 세웠다. 이 때 이 법에 대해 가부를 말해줄 그 어떤 판단도 존재 하지 않는다. 정의상 말 그대로 최초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워진 법은 나중에 정의의 이름을 갖다 붙일(명명 할) 뿐이다.

 

이렇게 모든 법은 스스로를 정당화 하기 때문에, 사실 그 기원은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며, 자의적이고 폭력적인 것이다. 법은 끊임없이 정의를 사칭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그 자신을 보존한다. 하지만, 벤야민의 지적처럼, 법 체계내부에서 혁명을 시도하는 자들 역시 폭력을 정의의 이름으로 이용할 수 있다. 법을 정립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했던 주체들은, 다시 힘들게 정립한 법을 지키기 위해 도전세력으로부터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 투쟁과 폭력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따라서 법은 법 자신이 세상의 모든 폭력을 독점하려는 이해관계가 발생하며, 법 정립적 폭력은 그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법 보존적 폭력과 혼연일체가 된다[2].

 

대표적인 타락과 오염사례는 유령처럼 배회하는 경찰이다. 서로 하나인양 뒤섞여 있던 법 정립적 폭력은 법 보존적 폭력의 관계는 경찰에 의해 역전된다. 민주주의 시대의 경찰은, 절대군주시절과 같이 전면에 나설 수 없는, 나서서는 안 되는 음지의 유령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경찰은 어디에도 없지만 언제 어디서나 개입할 준비를 이미 마치고 또 개입하고 있는 중이다. 법 정립적 폭력은 경찰 없이는 법질서에 대한 도전에 맞서고 보호 할 수 없다. 따라서 경찰은 질서를 보존한다는 명분하에 스스로 입법자에 등극하여 자의적으로 법을 좌지우지한다.[3] 하지만 민주주의가 항상 존재하는 폭력을 부정하고 은폐하고 잊고 사는데, 이 틈을 타 합법을 가장한 폭력주체이자 자신을 보존하려 고용한 경찰은 합법을 빙자하여 폭력을 휘두르며 나아가 민주주의 자신의 법 정립적 폭력, 즉 입법권까지 찬탈하고 권위를 실추시키게 된다.[4]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 앞에서 우리는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 그리고 이 둘의 뒤섞임과 타락을 목도했다. 벤야민은 위를 두 폭력간의 수단과 목적의 관계 맺기가 위와 같은 참극을 불러 왔기 때문에, 이 관계를 해체(거부)하는 순수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결국 그 권위의 신성한 토대로서 벤야민은 신을 호출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이 발상의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신에게 부여 받는다는 발상이 나치에게 매혹적으로 이용당한 것은 아닌지. , 나치는 스스로 부여한 법의 정당성을 넘어서 다른 차원에 있는 정의 그 자체를 박살내려 한 것은 아닌지 말이다.



[1] 이러한 양면성에 입각 할 때, 폭력과 법, 그리고 정의에 관한 피상적 구분의 시도 역시 해체되어야 한다.

[2] 이는 이 두 가지 폭력 사이의 차이가 불분명해지고 명확한 구분이 지연되는 것을 뜻한다. , 벤야민이 시도한 구분은 이와 같은 과정으로 서로 오염되고 불분명해지기 때문에, 이 역시 해체 되어야 한다.

[3]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시위나 집회 같은 경우에서 폭력성에 관한 판단을 일선 현장에 나가있는 경찰책임자에게 맡기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경찰이 시위대를 불법이라고 간주하면 불법이 되고 합법이라고 간주하면 합법이 된다. 막강한 권한을 손에 넣은 경찰은 항상 도전을 불용하고 불법으로 간주한다. , 경찰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법을 창설하고 운영하는 특권적 지위에 놓이게 된다.

[4] 법을 세우는 위대한 과정에서 나타난 폭력이 시간이 지나자 오염되어 법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파괴를 일삼는 추악한 타락으로 되풀이 되는 것을 보고 필자는 마르크스의 말이 뒤집혀 떠올랐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 





IV. 민주주의와 자기면역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돌입했지만, 여전히 근대성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다. 근대성에 의존하는 우리는 여전히 구분 할 수 없는 무언가를 구분 하려 하며, 차이를 은폐하고, 존재를 부정하며, 인정을 지연하고, 공동체에서 배제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신에 의존해야 할까? 신의 신성한 폭력을 상정하고 이를 믿어야 할까? 이렇게 까지나 머리를 싸매고 파헤쳐보았는데 이런 결론에서 만족 해야 한다면 너무 허무하다.

 

동물원의 비버의 예를 들고 싶다. 우리[1] 안 비버는 항상 해체와 창조의 변증법에 놓여있다. 힘을 써 집을 지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육사가 집을 부수기 때문이다. 집을 허물지 않으면 비버는 운동부족과 나태로 인해 건강이 나빠지고 질병에 취약해 지기 때문이다. 비버는 끊임없이 집을 짓고 해체하고 다시 짓게 되는 것을 명 받는다. 비버는 완성된 집을 가질 수 없지만, 해체를 겪으며 더욱 견고하고 발전된 집을 지어내고 더 건강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법 또한 마찬가지라고 본다.

 

우리는 먼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유령과 같은 폭력을 직시 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폭력이 다스리는 세계다. 위에서 경찰의 사례가 말해주듯 민주주의는 자신에 내재된, 인정하기 싫지만 존재하는 폭력을 망각하였기 때문에 타락했다. 우리도 비슷한 역사를 걸어왔다. 우리 헌정은 두 차례의 쿠데타를 맞았으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할 수 없다는 궤변을 안보를 위해 받아들여야 했다. 주권자가 제대로 된 주인 이 되는 것을 포기하며 살아야 했고, 어쩔 수 없이 타협해왔으며 합법적 폭력의 횡포를 감내하고 살아왔다. 피로 빚어낸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민간인을 사찰하고 메신저를 검열하는 등, 법의 타락한 형태는 우리 삶 곳곳에서 실체를 감추고 살아 숨쉬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해체가 필요하다. 데리다는 한 강연에서 면역세포가 외부 침입 병균이 아닌, 자기 주인세포를 공격해 발생하는 특정 질병의 예를 들었다. 이는 외부침입과 질서수호라는 명분하에 민주주의를 지연시키며 결국 자기 주인세포인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는 많은 국가들을 비판한 것이며, 본래 의미의 진정한 자기 면역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차이를 인정하는 체제다. 해체는 차이가 자리잡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타자를 불용하여 타자에 대항한다는 폭력의 빌미를 제공하기 보다는, 해체를 통해 서로 사이의 끊임없는 시공간적 틈을 내 다양한 이질적인 타자를 품어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해체란 끊임없고 무제한적인 자기 비판이다. 정의는 법에게 무한히 요구하고, 무한히 명령하여 해체하고 정립하고 정초하고 보존하고 다시 해체하기를 반복시킨다. 정의가 이름뿐인 공허한 구호가 되거나, 정의의 요구를 거스르려는 법의 타락을 끊임없이 폭로하고, 기존 법체계에 세찬 비판을 항상 거세게 가해 정의를 사칭하는 법을 감시하며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무제한적인 비판을 가해, 무한정한 초과 복원과 초과 개선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민주주의의 제대로 된 자기면역이라고 필자는 판단했다. 이상으로 난해하고 고생하였던 서평을 마친다. 정의로운 해체를 위하여.


[1] 여기서의 우리가 ‘we’에  해당하는 우리일지 ‘cage’에 해당하는 우리일지 판단하는 것도 데리다 식의 묘미 아니겠는가읽는 이의 자유로 해석의 공간을 내어주려 한다.



참고문헌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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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17-10-24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글쓰기 환경은 정말이지 최악이군요...

syo 2017-10-24 06:54   좋아요 1 | URL
알라딘이 유명합니다!! 그걸루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0-24 11:26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당황스럽죠 ? 저도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글쓰기 툴이 엉망이어서..
많은 분들이 아마도 다른 곳에서 글을 쓰고 알라딘 창에 옮깁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0-24 13:47   좋아요 0 | URL
원문이랑 다르게 알라딘에 옮겼더니 띄어쓰기 엉망으로 뭉개져 있는데 도대체 고칠 수가 없어요...

sprenown 2017-10-24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결국, 데리다가 말하는 ‘민주주의‘ 란 정의를 향해 끊임없이 해체와 창조를 되풀이하는 변증법적 과정에 있는 것이네요. 의심과 비판을 통해 정의에 수렴해가는 과정...

프리즘메이커 2017-10-24 13:45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