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크 데리다의 파이프 담배를 문 사진은 비흡연자인 나도 한 번쯤 

담배를 피워볼까 하는 생각이 나게 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사진출처: https://twitter.com/derrida_bot)




I. 해체된 근대와 이성       

 

이성이 너희를 진리로 인도하리라.’  합리성으로 무장한 근대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이성이 선물한 기술의 발전과 이를 주관하는 합리적 시스템이 인간을 풍요로운 천국으로 안내하리라 낙관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근대가 낳은 희대의 괴물, 나치의 탄생과 만행으로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긍정은 이성의 실패요, 근대인의 오만이었음이 드러났다. 인간의 안녕과 복리를 가져다 주던 이성이 돌변한 것이다.

 

물리학과 화학은 인간 종을 절멸시킬 만한 위력을 가진 핵무기와 생화학 가스로 변질되었다. 생리학과 유전학은 인종주의와 결합하여, 아리안 족의 유전적 우수성을 알리는 선전도구열등한유대인을 학살시킬 명분으로 둔갑되었다. 철학의 합리적 체계는 나치즘의 토대를 세웠고, 칼 슈미트 류의 법학자와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들은 나치에 부역하며 추악한 권력의 시녀가 되었다. 도구적 합리성을 앞세워 탄생한 관료제는 아이히만과 같은 생각 없는살인 기계를 탄생시켰다. 전혀 비정치적일 것 같던 근대의 영화와 미술 또한 히틀러를 신격화하고 나치를 미화하는데 동원되었다. 이성과 합리성에 관한 신화가 붕괴한 것 이다.

 

이렇듯 이성은 풍요를 가져다 줌과 동시에 파괴를 가져다 주었다. 이성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고 곳곳에서 한계에 부닥쳤다. 무엇이든 명쾌하게 구분 해내는 이성으로 수많은 것을 설명해왔지만, 더 이상 이성이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 역시 반대급부로 증가하였다. , 이성은 합리적 이면서도 비합리적이었고, 그 이면에는 편견과 권력이 늘 이성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하며 이성의 결함들을 은폐해온 것이다. 이에 수십 년간 침묵을 지켜오던 한 철학자가 애매성과 모호성의 폭력 위에 세워진 근대성의 양면성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이를 내부로부터 해체한다. 그가 바로 자크 데리다이다.

 

이 책은 데리다의 저작 중에서도 법과 폭력, 정의를 다룬 각별한 저작이다. 그러나, 심오한 내용을 짧은 분량과 익숙하지 못한 (그러나 데리다 식으로 장래에 익숙 했던 게 될) 해체주의적 필법으로 기입하여, 본인은 이 책을 읽고 소화하는데 적잖이 애를 먹었다. 본인은 한국의 대학원생이다. 12년에 달하는 의무교육 기간 동안에는 한국식 암기와 주입이라는 전 근대적방식으로 길러져 왔고, 이제 대학원에 진학하여 겨우 막 틀에 박힌 암기에서 벗어나 근대적논증에 진입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근대적인 논리적 구분에 갓 익숙해진 터라, 변명 아닌 변명으로 치열하게 읽고 공부했음에도, 감히 데리다 식 탈 근대적해체독법에 온전히 범접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미리 알린다.

 

본 서평을 다음과 같이 구성하였다. 먼저 데리다의 철학 전반에 대해서 개괄 할 것이다. 다음으로 법의 힘 의 핵심 논지를 간략하게 살펴 보겠다. 마지막으로 이 둘을 종합해 민주주의와 정의, 해체에 관한 필자의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또한, 난해하기로 유명한 데리다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욕심에, 본 책과 더불어 추가적으로 5권의 해설서를 참고하여 본 서평을 작성하였음을 알린다. 서평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하였다




II. 데리다 철학의 개괄

 

1. 음성과 대화의 독재를 해체하라

 

상에서 해체란 흔히 파괴와 비슷한 용법으로 쓰인다. 가정의 해체나 가정의 파괴가 주는 함의는 비슷하게 인식된다.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겠다는 전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파괴적이건 해체적이건 한 조직의 존재가 소멸로 인지되는 것은 매한가지니 말이다. 그러나, 파괴와 해체 사이엔 미묘한 차이가 있다. , 파괴란 외적에서 특정 집합체를 해체시키는 사동의 표현이며, 해체란 집합체 내부에서 각각의 구성체들이 분리되어 나감을 표현하는 능동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성이 호령하던 세계는 내재되고 은폐된 폭력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 폭력의 중심에는 우열, 선악 따위의 이분법적 인식론이 대차게 들어서 있다. 여기서 데리다가 포착한 가장 극성스러운 이분법은 음성과 문자의 우열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이래로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화와 음성이었다. 서양 철학사에서 음성과 대화는 이성을 구현해내는 우월한 특권매체로 군림해왔고, 문자와 기록은 온전히 내용을 담지 못하고 혼동을 주는 열등한 매체로 단지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엔 오히려 이성의 체계를 생생하게 구현하는 매체는 텍스트, 즉 문자였다.[1] 글자는 일종의 기호고, 기호는 누구에게나 같은 대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2] 물론, 문자기록이 군림하고 음성대화가 추락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질서의 재 반복이며, 또 다른 우열세계의 폭력이다. 데리다 에게는 문자나 음성이나 같은 언어매체이고, 문자기록의 텍스트 역시 일정부분 불필요함을 갖고 있는 해체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시니피앙(기표로 번역)과 시니피에(기의로 번역)의 불일치를 우리는 해체해야 한다. 특히. 하나의 시니피앙에 여러 가지 시니피에가 산출 되는 경우[3]가 우리의 의사소통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어떤 단어를 보고 드는 의미란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다시 이 생각은 우리의 경험에서 출발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직접 체험치 않은 간접경험에 있다. 간접경험은 말 그대로 자신의 상상으로써, 짐작과 편견을 산출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왜곡과정을 통해 텍스트를 오해하고 또 폭력적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해체 되어야 할 대상이며, 시니피앙의 본 모습을 가로막는 시니피에는 생각지 말아야 한다. , 텍스트는 텍스트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하며, 우리는 글의 해체 통해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

 


2. 해체야 말로 정의다

 

이성의 목적을 갖고 있다. 그 자체가 진리의 세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성은 낙원으로 이끌어줄 메시아이자, 타락한 현실을 최초의 순수했던 기원으로의 회복을 위한 특급열차로 추앙 받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근대의 이성은 끊임없이 이분법적 대립항을 통해 세상을 파괴적으로 또 폭력적으로, 하지만 원래부터 그랬었던 것인 냥, ‘조작하고 재구성해왔다. 이성과 감성을 대립시켰고, 남성과 여성을 대립시켰고, 백인과 흑인을 대립시켰고 그 안에 우열과 선악과 같은 속성을 부여하면서 합리화 해왔다.


이렇게 이성이 단언하며 정립한 이분법 구도는 세상의 여러 차이를 가진 다원성을 억압하고 파괴하며, 강제적으로 이분법 구도에 편입시켜온 폭력의 산물이다. 보고 싶은 것만 단순한 대립항으로 취사선택 해온 폭력적인 인식론 속에서, ‘장래에 없는 것으로 되게 될다양한 소수는 있는 듯 없는 듯 유령과 같이 주류를 배회하며 음지에서 존재를 부정당하며 살아야 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남성과 여성의 대립에 LGBT[4]의 존재 자체가 은폐되고 부정되었다. 선택지는 둘 중에 하나였다. 남자 아니면 여자. 백인과 흑인이라는 논리적 구분 역시 세상의 반절인 수 많은 아시아인, 인디언과 같은 황인종이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왔다. 좌파와 우파의 대립도 사실 이 이분법 구도를 넘어서지 못한 채 상대적 강약과 우열의 한쪽 편 에 기생한 것이었다. 이들은 이성감성의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안주하며, 인간사회에 내재적으로 숨어있던 폭력 어린 광기를 부정하거나 인지하지도 못한 채 살아왔다. 결국, 봇물처럼 터져 나온 광기어린 유령들을 제어하지 못하고 나치의 출현과 만행을 지켜만 봐야 했다.

 


이에 데리다는 해체야 말로 정의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이 텍스트의 참 뜻은 무엇일까? 왜 해체는 본질을 찾는 방도이며, 정의일까? 필자는 이렇게 이해했다. 이분법의 파괴에 맞서, 이성의 구분 짓기를 해체하여 그 안에 은폐되어있고 배제된 개별자들의 차이를 복원하고 숨겨져 있던 다원성회복하는 것. ‘남녀여남이 되는 게 아니라 구분 자체가 해체되어 한 사람의 개성 있는 인격체로 존중 받는 것. 흑백의 대립이 아닌 개개인의 인격체로 해체되고 분리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누리는 것. 억압되어있던 개별자들이 개성을 발현하며 숨쉴 공간시간을 내어주는 것[5] 것이 정의가 머무는 공간이며, ‘해체그 자체이다.




[1] 요즘과 같은 영상과 이미지 시대에 살고 있는 필자는 데리다의 주장에 약간의 의심을 품는다음성만큼 문자 역시 중요하지만음성과 영상과 시간적 동시성과 감각적 생생함이 모두 결합되어 있는 영상매체의 등장에 2d적인 문자가 여전히 이성체계에 더 부합할 것인가. 4d가 더 정교화되고 상상까지 재현해내는 가상공간이 등장하게 되는 근 미래에이러한 기술의 발전과 증폭과 결합이 온존하게 될 장래에도 인간의 사유를 글보다 더 생생하고 정확하고 구체화해서 표현해낼 매체가 등장한다면, (예를 들어 영화 해리포터에서 기억을 추출하고 담아두었다가 부으면 그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직접 체험하게 되는 펜시브와 같은 것들그때에도 여전히 문자일까?

[2] 기호는 전달자의 생각전달한 내용수용자의 인식과 이해라는 3항의 일치를 가능하게 해준다.

[3] 필자는 언어의 다의성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하였다.

[4] 레즈게이바이 섹슈얼트랜스 젠더의 알파벳 첫글자를 따서 만든 신조어이다.

[5] 데리다는 공간내기’  시간 내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III. 자크 데리다의 법의 힘

 

1. 법에서 정의로


 

데리다는 책에 앞장에서 이라는 용어를 찬찬히 뜯어보며 논의를 시작한다. , 법은 그 정의상 폭력을 자연히 함축한다. 더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법 안에는 폭력이 항구적으로 기입되어있다. 법에 힘이 없다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또한, 법은 정의와도 연관이 크다. 정의가 없다면 법은 광기 어린 폭력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법과 폭력의 차이를 벌려주는 것이 바로 정의. 하지만 우리는 법이 정의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법은 폭력이면서도 폭력이 아니고, 정의이면서도 정의가 아니다. 애매하고 정체 불분명한 것이다.[1]

 

이를 데리다는 크게 정의의 계산 ()가능성 정의의 결정 불가능성 정의의 긴급성 의 3가지 논리적 난관을 통해, 법과 정의의 연관성에 대해 조심스레 해체적으로 읽어나간다. 먼저, 정의는 계산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해체 불가능 한 것이고, 계산 가능한 지평과 범위를 넘어선 곳에 위치해 있다. , 정의와 법은 놓여있는 층위와 세계가 다르다. 따라서. 법은 정의를 닮으려 하지만, 절대로 닮을 수 없다. 계산 가능하고 또 계산 가능한 법은 계산 불가능한 정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법 조항을 근거로 위법과 적법을 구분할 수는 있지만, 정의와 부정의로 나아갈 수 없다. 만약 법적 판결을 맹목적으로 정의와 결부시킨다면, 그것은 기계적 판결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정의의 결정 불가능성이다. 우리는 정의의 이름을 빌려 선악에 대한 구분,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고, 사건의 본질과 현상을 재단한다. 하지만, 정의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정의는 결정을 항상 지연시킨다. 결정은 스스로 결정 될 수 없다. 누군가의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무언가를 단절 시키는 행위는 계산가능하고 규정되는 것이 가능한 영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다. 정의는 계산불가능하고 결정불가능하고 해체 불가능한 지평너머, 즉 법 너머에 있을 뿐이다.

 

마지막 난관은 '정의의 긴급성'이다. 정의는 주로 긴급할 때 출현한다. 무고한 목숨이 사그라들기 직전에, 즉시 정의는 소환되어 부정의를 바로잡을 것을 끊임없이 명령한다. 그러나 정의는 구체적인 행동을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며, 우리 역시 정의가 요구하는 바를 정확히 계산해내지 못한다. 다만 정의는 있는 듯 없는 듯 유령처럼 배회 할 뿐이다. 따라서, 이를 구원할 메시아의 역할에 부득이하게 기대야 한다. 정의는 최악의 부정의를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법을 끌어 안는다. 그리고 부족한 법에게 끊임 없이 정의자신을 계산 하여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법은 무한한 정의의 요구에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창조된다.          

 


2. 벤야민의 이름으로

 

모든 법은 자신이 정의를 독점하려고 한다. 모든 법은 자신이 정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승인한 것인가? ‘정의가 눈앞에 대화 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면, 정의에게 직접 부여했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법이 세워지는 최초의 순간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특정 법은 폭력을 기반으로 하여, 혹은 주변폭력을 제압하여 수립된다. 그 당시에는 그 폭력과 법은 어떠한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진공의 상태에서 법은 폭력으로써 스스로를 세웠다. 이 때 이 법에 대해 가부를 말해줄 그 어떤 판단도 존재 하지 않는다. 정의상 말 그대로 최초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워진 법은 나중에 정의의 이름을 갖다 붙일(명명 할) 뿐이다.

 

이렇게 모든 법은 스스로를 정당화 하기 때문에, 사실 그 기원은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며, 자의적이고 폭력적인 것이다. 법은 끊임없이 정의를 사칭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그 자신을 보존한다. 하지만, 벤야민의 지적처럼, 법 체계내부에서 혁명을 시도하는 자들 역시 폭력을 정의의 이름으로 이용할 수 있다. 법을 정립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했던 주체들은, 다시 힘들게 정립한 법을 지키기 위해 도전세력으로부터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 투쟁과 폭력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따라서 법은 법 자신이 세상의 모든 폭력을 독점하려는 이해관계가 발생하며, 법 정립적 폭력은 그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법 보존적 폭력과 혼연일체가 된다[2].

 

대표적인 타락과 오염사례는 유령처럼 배회하는 경찰이다. 서로 하나인양 뒤섞여 있던 법 정립적 폭력은 법 보존적 폭력의 관계는 경찰에 의해 역전된다. 민주주의 시대의 경찰은, 절대군주시절과 같이 전면에 나설 수 없는, 나서서는 안 되는 음지의 유령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경찰은 어디에도 없지만 언제 어디서나 개입할 준비를 이미 마치고 또 개입하고 있는 중이다. 법 정립적 폭력은 경찰 없이는 법질서에 대한 도전에 맞서고 보호 할 수 없다. 따라서 경찰은 질서를 보존한다는 명분하에 스스로 입법자에 등극하여 자의적으로 법을 좌지우지한다.[3] 하지만 민주주의가 항상 존재하는 폭력을 부정하고 은폐하고 잊고 사는데, 이 틈을 타 합법을 가장한 폭력주체이자 자신을 보존하려 고용한 경찰은 합법을 빙자하여 폭력을 휘두르며 나아가 민주주의 자신의 법 정립적 폭력, 즉 입법권까지 찬탈하고 권위를 실추시키게 된다.[4]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 앞에서 우리는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 그리고 이 둘의 뒤섞임과 타락을 목도했다. 벤야민은 위를 두 폭력간의 수단과 목적의 관계 맺기가 위와 같은 참극을 불러 왔기 때문에, 이 관계를 해체(거부)하는 순수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결국 그 권위의 신성한 토대로서 벤야민은 신을 호출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이 발상의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신에게 부여 받는다는 발상이 나치에게 매혹적으로 이용당한 것은 아닌지. , 나치는 스스로 부여한 법의 정당성을 넘어서 다른 차원에 있는 정의 그 자체를 박살내려 한 것은 아닌지 말이다.



[1] 이러한 양면성에 입각 할 때, 폭력과 법, 그리고 정의에 관한 피상적 구분의 시도 역시 해체되어야 한다.

[2] 이는 이 두 가지 폭력 사이의 차이가 불분명해지고 명확한 구분이 지연되는 것을 뜻한다. , 벤야민이 시도한 구분은 이와 같은 과정으로 서로 오염되고 불분명해지기 때문에, 이 역시 해체 되어야 한다.

[3]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시위나 집회 같은 경우에서 폭력성에 관한 판단을 일선 현장에 나가있는 경찰책임자에게 맡기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경찰이 시위대를 불법이라고 간주하면 불법이 되고 합법이라고 간주하면 합법이 된다. 막강한 권한을 손에 넣은 경찰은 항상 도전을 불용하고 불법으로 간주한다. , 경찰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법을 창설하고 운영하는 특권적 지위에 놓이게 된다.

[4] 법을 세우는 위대한 과정에서 나타난 폭력이 시간이 지나자 오염되어 법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파괴를 일삼는 추악한 타락으로 되풀이 되는 것을 보고 필자는 마르크스의 말이 뒤집혀 떠올랐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 





IV. 민주주의와 자기면역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돌입했지만, 여전히 근대성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다. 근대성에 의존하는 우리는 여전히 구분 할 수 없는 무언가를 구분 하려 하며, 차이를 은폐하고, 존재를 부정하며, 인정을 지연하고, 공동체에서 배제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신에 의존해야 할까? 신의 신성한 폭력을 상정하고 이를 믿어야 할까? 이렇게 까지나 머리를 싸매고 파헤쳐보았는데 이런 결론에서 만족 해야 한다면 너무 허무하다.

 

동물원의 비버의 예를 들고 싶다. 우리[1] 안 비버는 항상 해체와 창조의 변증법에 놓여있다. 힘을 써 집을 지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육사가 집을 부수기 때문이다. 집을 허물지 않으면 비버는 운동부족과 나태로 인해 건강이 나빠지고 질병에 취약해 지기 때문이다. 비버는 끊임없이 집을 짓고 해체하고 다시 짓게 되는 것을 명 받는다. 비버는 완성된 집을 가질 수 없지만, 해체를 겪으며 더욱 견고하고 발전된 집을 지어내고 더 건강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법 또한 마찬가지라고 본다.

 

우리는 먼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유령과 같은 폭력을 직시 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폭력이 다스리는 세계다. 위에서 경찰의 사례가 말해주듯 민주주의는 자신에 내재된, 인정하기 싫지만 존재하는 폭력을 망각하였기 때문에 타락했다. 우리도 비슷한 역사를 걸어왔다. 우리 헌정은 두 차례의 쿠데타를 맞았으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할 수 없다는 궤변을 안보를 위해 받아들여야 했다. 주권자가 제대로 된 주인 이 되는 것을 포기하며 살아야 했고, 어쩔 수 없이 타협해왔으며 합법적 폭력의 횡포를 감내하고 살아왔다. 피로 빚어낸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민간인을 사찰하고 메신저를 검열하는 등, 법의 타락한 형태는 우리 삶 곳곳에서 실체를 감추고 살아 숨쉬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해체가 필요하다. 데리다는 한 강연에서 면역세포가 외부 침입 병균이 아닌, 자기 주인세포를 공격해 발생하는 특정 질병의 예를 들었다. 이는 외부침입과 질서수호라는 명분하에 민주주의를 지연시키며 결국 자기 주인세포인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는 많은 국가들을 비판한 것이며, 본래 의미의 진정한 자기 면역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차이를 인정하는 체제다. 해체는 차이가 자리잡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타자를 불용하여 타자에 대항한다는 폭력의 빌미를 제공하기 보다는, 해체를 통해 서로 사이의 끊임없는 시공간적 틈을 내 다양한 이질적인 타자를 품어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해체란 끊임없고 무제한적인 자기 비판이다. 정의는 법에게 무한히 요구하고, 무한히 명령하여 해체하고 정립하고 정초하고 보존하고 다시 해체하기를 반복시킨다. 정의가 이름뿐인 공허한 구호가 되거나, 정의의 요구를 거스르려는 법의 타락을 끊임없이 폭로하고, 기존 법체계에 세찬 비판을 항상 거세게 가해 정의를 사칭하는 법을 감시하며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무제한적인 비판을 가해, 무한정한 초과 복원과 초과 개선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민주주의의 제대로 된 자기면역이라고 필자는 판단했다. 이상으로 난해하고 고생하였던 서평을 마친다. 정의로운 해체를 위하여.


[1] 여기서의 우리가 ‘we’에  해당하는 우리일지 ‘cage’에 해당하는 우리일지 판단하는 것도 데리다 식의 묘미 아니겠는가읽는 이의 자유로 해석의 공간을 내어주려 한다.



참고문헌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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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17-10-24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글쓰기 환경은 정말이지 최악이군요...

syo 2017-10-24 06:54   좋아요 1 | URL
알라딘이 유명합니다!! 그걸루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0-24 11:26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당황스럽죠 ? 저도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글쓰기 툴이 엉망이어서..
많은 분들이 아마도 다른 곳에서 글을 쓰고 알라딘 창에 옮깁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0-24 13:47   좋아요 0 | URL
원문이랑 다르게 알라딘에 옮겼더니 띄어쓰기 엉망으로 뭉개져 있는데 도대체 고칠 수가 없어요...

sprenown 2017-10-24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결국, 데리다가 말하는 ‘민주주의‘ 란 정의를 향해 끊임없이 해체와 창조를 되풀이하는 변증법적 과정에 있는 것이네요. 의심과 비판을 통해 정의에 수렴해가는 과정...

프리즘메이커 2017-10-24 13:45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