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전의 한반도는 유라시아 동부라는 거대한 무대의 주변부였으며, 21세기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지정학적 요충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해양 세력인 일본은 대륙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반도의 완전한 정복을 꾀했으며, 대륙의 한인 세력은 해양의 일본 세력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로서 한반도를 이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한반도가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서 대륙과 해양 세력 간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대두한 사건이었다. p.9
2013년 말에 헤리티지 재단의 브루스 클링너(Bruce klingner)선임연구원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남한은 종종 21세기의 중국과 북한보다 1930년대의 일본을 더욱 두려워하는 것 같다"라고 비꼰 것이 미국의 입장을 상징한다. p.13
현재 한반도의 독립과 번영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는 국가를 굳이 들자면, 일본이 아닌 중국이다. p.13
이런 의미에서 2015년 현재 유라시아 동해안의 상황과 구한말과는 전혀 다르며,120년 전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한국 일각의 해석은 역사의 전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결과다. (…) 그러나 각 시대와 지역은 서로 다른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어떤 특정 시기의 역사가 후대에 반복된다는 발상은 학문이 아닌 종교에 속한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이든 중국이든 어느 한 나라에 군사-정치-경제 등 모든 부문을 전적으로 의존하고자 하는 사고방식이다. p.13
또한 한반도 북부에 진입한 일본군은 개전 때 경험하지 못한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임진왜란 이전에 한반도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세력은 언제나 해양이 아닌 대륙 쪽에서 왔다. 따라서 조선을 비롯해 한반도에 자리했던 국가는 영토 북쪽에 주력부대를 배치하고, 남쪽에는 소규모의 왜구 세력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병력만을 배치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무력하게 무너진 이유가 이것이다. (…) 여기에다 날씨도 조선군을 도왔으니, 따뜻한 기후의 일본열도 서부 출신이 주축을 이룬 일본군 장병은 한반도 북부의 혹독한 겨울에 견디지 못한 것이다. p.59
그러나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빠른 속도로 여진 집단을 합병해나갔고,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의 관심이 유라시아의 해양 세력인 일본으로 가 있는 사이에 그 과정을 거의 완성했다. 말하자면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끝낸 뒤 통일 일본 세력이 한반도를 공격하고, 그 파장으로 만주지역의 전국시대가 끝나는 연쇄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p. 62
유럽의 해부도를 입수했으니 실물과 대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막부의 허가를 받아 사형수의 몸을 해부해보니, 과연 인간의 몸은 한의학서의 설명과는 다르고 유럽 해부학서의 도판과 같았다. 중국책과 유럽책에 그려진 인체 구조가 그토록 다르니, 저자가 "중국인과 중국인 아닌 사람 간에는 (몸에) 차이가 있는 것인가?"라고 고민한 것도 이해가 가는 바다. p.155
네르친스크조약은 역대 중국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외국과 평등하게 맺은 조약이었다. 이는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인이 준가르 세력을 절멸시키고자, 러시아에 중화질서에 입각한 상하 관계를 요구하지 않고 실리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p.166
조선은 러시아군과 무력충돌하면서도 끝끝내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으며, 이들이 향후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리라고는 더더욱 예견하지 못했다. p.167
어떤 한국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거나 미국과 중국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현대 한국의 역사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존재를 과소평가하고 미국과 중국의 존재를 과도하게 평가하는 바람에 중요한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를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p.167
"너는 양반집 자식이니 저 무식한 백성하고는 다르지 않느냐. 거기다가 너같이 잘생긴 사람이 어찌 그 고약한 교를 믿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가 있단 말이냐"라며 회유하는 심문자의 말에 "의리에 있어서는 상하의 구별도, 반상(班常,양반과 상민)도, 잘나고 못난 얼굴의 구별도 없고 다만 영혼만이 구별될 수 있"다고 답했다. 이처럼 18-19세기 조선의 가톨릭교도들은 지금도 '양반', '명문가'를 늘 입에 올리는 현대 한국의 시민보다도 더욱더 인간의 평등함을 믿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평등주의가 조선의 지배계급에는 체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정치적 사태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p.230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 후 제시된 민족자결주의가 패전국만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적 계산의 결과로 나온 편파적인 사상이었음에도 조선 사람들은 이 사상의 보편성을 믿고 봉기했다. 마찬가지로 서구 국가들의 현실과는 무관하게 18-19세기의 전환기에 크리스트교는 조선에서 계급 타파와 개인의 발견이라는 새로운 사상으로서 기능했다. p.231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주민이 버린 차가 미국의 독립을 이끌었다면, 청나라 사람들이 버린 아편은 중국의 반(半) 식민지화를 이끈 셈이다. p.244
이러한 충돌을 통해 서구 세력의 압도적인 힘을 실감한 웅번들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 세력에 급속히 접근했다. 이들 전쟁으로부터 3년 뒤인 1866년에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친 조선이 쇄국정책을 강화한 결과 국제 정세 변화에 더욱 둔감해진 것을 생각하면, '잘 진 것은 잘못 이긴 것보다 낫다'는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p.256
수-당이 고구려 및 신라와 충돌했던 경험을 통해, 중원 세력은 한반도를 완전히 병합한다는 야망을 포기하고, 한반도 세력은 중원의 국가를 상국(上國)으로서 존중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도출하여 이를 천 년 이상 유지해왔다. (…)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중원 세력이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자, 한반도 세력은 이에 반발하여 일본 세력을 끌어들임으로써 중원 세력을 축출하고자 했다. 이것이 1884년 12월 4일에 김옥균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3일간 정권을 차지한 갑신정변이다. p.279
하나는 "갑신정변 세력은 친일파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친일파라면 연구할 필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한국 학계가 친일파 문제를 냉철한 학문적 관점에 입각하여 정면에서 다루지 않은 결과, 한쪽에서는 아무에게나 친일파라는 낙인을 찍어대는 이들이, 또 한쪽에서는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모두 친일했다"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탄생했다. pp. 280-281
이를 위해서는 유럽 문명의 결정체인 국제법, 현대적 군대, 입헌정체가 크리스트교 백인 이외에는 실현할 수 없다는 당시 유럽인의 편견을 깰 필요가 있었다. 무쓰 무네미쓰는 황해 해전의 "결과는 비로소 그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크리스트교 국가 이외의 국가에서는 유럽식 문명이 생식될 수 없다는 비몽사몽에서 깨어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으며, 나아가 우리 군대의 혁혁한 무공을 표명함과 동시에, 우리 국민 모두가 유럽 문명을 채용했고 이것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고 주장한다. p.293
여행자들은 조선 사람들이 게으르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으나 러시아와 만주에 이주한 조선 사람들의 활력과 인내를 보고, 그들이 집을 치장하거나 그들의 번영한 모습을 보고 난 후에 나는 조선 사람의 게으름을 기질의 문제로 여기는 것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조선에 있는 모든 남자들은 가난이 최고의 보신책이며 가족과 자신을 위한 음식과 옷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탐욕적이고 타락한 관리에게 노출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pp.327-328
한국인이라면 근대 제국주의 일본에 대해 19세기 말에서 1910년에 걸친 병합 과정에 큰 분노를 느낄 터다. 그러나 극동재판의 대상이 된 시기는 1928-1945년이다. 이 시기에 이미 일본의 일부였던 조선인은, 타의적이라고는 하지만 만주국의 건국에 '애매모호한' 일본인으로서 참가했고 동남아시아의 전선에는 일본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이는 비단 조선인뿐 아니라 조선보다 이른 시기에 일본의 일부가 된 타이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극동재판에서는 조선인과 타이완인 일본군도 전범으로 처벌받았고, 한반도 남부에 들어온 미군은 식민지 조선의 해방자라기보다는 적국 영토에 대한 점령자로서 행동했다. pp. 355-356
그래서 한반도 역사가 시작된 이래 900여 차례의 침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되고는 한다. 그러나 한반도 국가가 바깥을 침략한 사례 역시 적잖이 확인된다. 고구려인이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사라져간 주변 민족, 여진인을 철저히 탄압했던 조선 전기, 만주인-몽골인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어 베이징으로 진입한 소현세자의 조선군, '일본인'의 일원으로 참전한 태평양전쟁, 미군과 연합군으로 참전한 베트남전쟁 등등. 이러한 후자의 경험을 제쳐둔 채 '피해자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수립하려 한 결과,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수많은 희생자가 의도적으로 잊혀졌다. 현재와 가장 가까운 베트남전쟁을 예로 들면, 한국인 '고엽제의 피해와 전쟁의 트라우마에 고통 받는 참전군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미 연합군에 살해된 베트남 주민을 잊고 있다. pp.364-365
이런 주장을 접할 때마다 필자는 미국 경제는 기존의 모든 경제학 이론을 무시하고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신경제(New Economy)'의 환상을 떠올린다. 금융위기와 함께 미국의 신경제라는 환상이 붕괴했듯이,중국이 지난 수십 년 사이에 달성한 성과가 민주주읮거 질서의 뒷받침없이도 확고한 것이 되리라는 주장 역시 결국은 기각 될 것이다. 더 강하게 말하자면 중국의 부상을 기뻐하는 한국 사회 일부의 모습을 보며, 중국과 한국을 동일시하려는 전통적인 오류에, 일본이나 미국에 대한 증오가 결합된 것 같은 느낌마저 받는다. 한국 사회는 언제쯤이나 중국이라는 프리즘 없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될까? pp.368-369
이러한 상황에서 여전히 한국 사람들은 서로를 '북한인(빨갱이)'과 '일본인(친일파,매국노)'라고 비난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할 뿐, 그 배후의 국제적인 상황을 간파하거나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현명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p.370
문장 발굴단
본 코너에서는 제가 읽은 책에서 발견한 좋은 문장들을 기록합니다.
왜 선정했는지 뭐가 좋았는지에 관한 제 의견이나 코멘트를 따로 덧붙이지 않고,
단순하게 기록에만 집중합니다. 제가 추려낸 부분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