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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러 두 기



 

- 박홍규 씨가 번역한  상식인권은 상식인권이 수록된 필맥 출판사의 단행본이다.

- 남경태 씨가 번역한 상식상식토지분배의 정의가 수록된 효형 출판사의 단행본이다


※ PC버전을 권장합니다.



1. 촛불혁명의 배후세력은 상식이었다.



헌법은 국가의 소산이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인민의 소산이다. 따라서 헌법 없는 국가는 권리 없는 권력에 불과하 다. 국민에게 행사되는 모든 권력은 어떤 기원을 가짐에 틀림없다. 그것은 위임된 것이 아니면 횡령된 것이다. 그 밖의 다른 기원은 없다. 모든 위임된 권력은 신탁이지만, 모든 횡령된 권력은 찬탈이다. - 「인권 2부」, p.269 


국가가 수립돼야 하고 인류가 그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이지 특정 개인의 이익이나 세력의 확장을 위해서가 아니다.  - 「인권 2부」, p.226


국가란 국민의 일을 처리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특수한 개인이나 가족의 소유물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럴 수도 없으며, 다만 그 부담으로 유지되는 전 공동체의 소유물이다. (…) 주권이란 오직 국민에 속하는 것이지 어느 개인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국민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국가형태를 언제라도 폐지하고 자신의 이익, 의향, 행복에 적합한 국가를 수립할 불멸의 생득권을 가진다. (…) 모든 시민은 주권자 중 하나이므로 누구도 개인적으로 그들을 예속할 수 없다. 그는 오직 법률에만 복종할 수 있다. - 「인권 1부」, pp.212-213




 

대한민국 헌법

1장 총강

1

1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중략)


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10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11

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2항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2016년 겨울, 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의 헌법이 유린당한 국정 농단 사태가 발생하였다. 박근혜 前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무시했다. 주권자 국민에게 5년간 위임받은 국가권력을 사유화하였으며, 특히 국민에게 양도받은 주권을 자신의 친구 최순실에게 넘겨주어 선출되지 않은 무자격한 그녀를 사실상의 사적인 특수계급으로 만들었다. 당시 대통령 박근혜의 비호아래 최순실과 그의 딸 정유라는 국가 권력을 사적인 부를 탐하는 데 동원하여 각종 특권 및 특혜를 누렸으며 뇌물을 통한 부당이득을 취하였다. 


박 前 대통령의 재임 4년간, 대한민국은 국가권력의 민주적 정당성과 법치주의의 원리가 크게 훼손되었다. 이 여파로 주권자인 국민들은 전국 각지에서 촛불을들고 광장에 나와 헌정질서 회복과 주권 회수를 요구하였고, 민의를 받은 대의기구 국회는 2016년 12월 9일 234명의 찬성으로 탄핵소추안을 가결하였으며, 마침내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명 전원 일치로 탄핵인용 결정을 내리면서 그녀를 대통령직에서 파면하였다. 





헌법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자 주권자 국민의 보편적인 상식이 담긴 성문화된 최고의 권위를 갖는 문서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보통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적인 동기에서 아닌 철저히 상식적인 견지에서 거리와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섰다. 그렇게나 많은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질서 있고 평화롭게 대규모의 전국적 시위를 지속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철저히 상식에 호소하고 상식으로 하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상식의 회복을 바라는 시민들의 국정농단 촛불집회는 한국판 ‘시민혁명’ 이었다. 





일반적으로 혁명은 상식과 무관하다. 상식은 일상적인 의미를 가지는 데 비해 혁명은 대규모의 변화가 급격히 일어나는 비일상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자”는 말이 가장 강력한 혁명의 구호가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있다. 토머스 페인이 이 책을 쓸 무렵 아메리카의 상황이 바로 그랬다. 


- 남경태. 2012. “상식이 통하는 사회와 상식이 이상인 사회”. 토머스 페인. 『상식』, 126. 파주: 효형출판 




상식의 사전적 의미는 ‘일반적인 사람이 다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이나 판단력’이다. 여기서 상식은 일반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규범적이다. 그렇기에 상식이 진보성을 띠는 상황은 극히 예외적이고 역설적인 상황인 것이다. 혁명이 진보의 기관차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혁명은 시민의 전반적인 삶의 존엄을 침해고 주권을 공적으로 대리하지 않고 사유화하는 국가권력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브레이크인 것이다. 그래서 『상식』의 의미는 몰상식과 상식의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내세운 정부를 굴복시킨 것도 바로 ‘상식의 단죄’였다.



‘상식’의 목표와 구체적으로 전개된 역사의 상황은 다를지라도, 1776년 식민지 아메리카와 2016년 촛불정국의 한국에서 상식은 분명 시민들의 강력한 행동 동기가 되었다. 상식이 진보성을 대표하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 있던 당시의 나는 피가 당기듯, 토머스 페인과 그의 대표작「상식」의 부름심을 들었다. 그러나 막상 책을 펼친 나는「상식」의 내용상 다수를 차지하며, 아메리카 독립의 당위를 설명하는 국제정치적 맥락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함께 실려 있는 「인권」과 토지분배의 정의」가 훨씬 중요한 저작임을 발견했다. 「인권」에는 세계 각국 헌법의 모태가 된 인권선언이 담겨있으며, 「토지분배의 정의」에는 현재 활발하게 진행 중인 기본소득에 관한 원형적 형태가 담겨 있었다. 페인에게는 대영'제국'으로부터 공화국 미국의 독립못지 않게 인권과 토지분배의 정의역시 상식이었던 게다.





2. 인간은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




창조에 대한 모세의 견해는, 신적인 근거로 보든 단순한 역사적 근거로 보든 인간은 단일성과 평등성을 가진다는 말과 완전히 일치한다.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여기에 양성의 구분을 밝혀져 있으나, 그 밖의 다른 구분은 암시조차 없다. 설령 이것이 신적인 근거는 아니라 해도 최소한 역사적인 근거는 되며, 그것은 인간의 평등이 현대의 이론이 아니라, 기록된 이론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임을 보여준다. - 인권 1, p.135



세계에 알려진 모든 종교는 인간이란 모두 다 ‘하나의 지위’에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단일성’에 입각하고 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앞으로 인간이 처하게 될 상황이 어떠한 것이든 선과 악만이 유일한 구별점이다. 아니, 국가의 법령도 범죄로 인한 지위는 만들되 인격에 따른 지위는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원리에 부합돼야 한다. (…) 이것은 인간이 바로 그 같은 관점에서 타인을 바라보고, 그 같은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인간을 그의 창조주나 그가 일부를 구성하는 피조물에 대한 그의 모든 의무와 밀접하게 관련시킨다. (…) 그것은(인간의 의무) 두 가지, 즉 사람이면 누구나 느껴야 할 신에 대한 의무와,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스스로 남에게 해주는 이웃에 대한 존경으로 이루어진다. - 「인권 1부」, pp.135-137, 괄호 글쓴이 




페인은 인간의 보편적 평등과 자연권 논거를 신의 존재와 창조의 개념을 통해 정당화하고 있다. 창조주인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여 창조했으니, 그 피조물인 인간끼리는 신의 허락 없이 함부로 위계를 나눌 수 없다. 즉 지배-피지배 관계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므로, 인간은 인간을 지배할 수 없으며, 신의 피조물인 인간은 모두 동등한 지위를 누린다. 이 때문에 신이 인간에게 내린 소유권을 비롯한 자연권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개념이 아니라 신과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제도는 신과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는 악한제도로 간주해야한다. 사회계약은 동등한 인간끼리 맺는 것이고, 계약의 보증은 거스를 수 없는 창조주의 뜻이며, 동등한 개인끼리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공화국만이 정의롭고 신의 뜻에 알맞는 상식적인 체제인 것이다. 




3. 기본 소득은 상식이 될 것이다.



인간은 땅을 만들지 않았으며, 설령 땅을 점유할 자연적 권리가 있다 해도 땅의 일부를 영구히 자기 자산으로 삼을 권리는 없었다. 또한 땅을 창조한 조물주는 토지 문서를 발행하는 관청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토지 재산의 관념은 어떻게 생겨난 걸까? 나는 예전에도 말했듯이 경작과 더불어 토지 재산의 관념이 형성되었다고 대답한다. 경작으로 이루어진 발전과 모태가 되는 토지 자체를 분리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런 관념이 생겨난 것이다. 지금까지 발전의 가치는 자연적 토지의 가치를 크게 상회해 자연적 토지의 가치를 흡수할 정도에 이르렀다. 결국에는 모든 사람의 공유권이 개인의 경작권과 뒤섞여버렸다. - 「토지분배의 정의」, p.105



경작은 창조된 땅에 열 배의 가치를 부가했다. 그러나 더불어 시작된 토지 독점은 최대의 해악을 낳았다. 모든 나라 주민들의 절반 이상에게서 자연적 상속을 박탈하고서도 손실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전에 없었던 새로운 빈곤과 비참한 현실을 낳았다. 빼앗긴 사람들의 처지를 옹호하기 위해 내가 주장하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권리다. 그러나 권리는 처음부터 등한시 되었고, 하늘이 정부 제도의 혁명으로 길을 열 때까지는 전면에 대두되지 못했다. (…) 국가 기금을 조성해 토지 재산 제도가 도입되면서 자연적 상속권을 상실한 스물한 살 이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부분적인 보상으로 15파운드의 금액을 나누어주도록 하자. 또한 현재 살아 있는 쉰 살 이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평생토록 해마다 10파운드씩 주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그 나이가 되면 주도록 하자. (1796년의 15파운드는 2016년 기준 1,426 유로에 해당하고, 원화로 약 180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글쓴이 역산) - 「토지분배의 정의」,pp.106-107 


예컨대 젊은 부부가 세상에 나올 때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것과 각각 15파운드씩 손에 쥐고 시작하는 것은 크게 다르다. 이 지원금으로 그들은 소와 몇 에이커의 토지를 경작할 농기구를 구입할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부양 능력보다 자식들의 수가 더 빠르게 증가하는 경우처럼 사회에 짐이 되기보다 유용하고 유익한 시민이 될 것이다. 

 - 「토지분배의 정의」, p.116


빈곤해지는 사람들에게 빈곤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이 이른바 문명이라는 이름을 부당하게 획득한 체제의 관행이다(자선이나 정책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 그보다는 경제적 측면에서라도 가난해지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 수단을 채택하는 게 훨씬 더 낫지 않을까? 방법은 스물한 살이 된 모든 사람들에게 삶을 출발하기 위한 밑천을 지원하는 것이다. - 「토지분배의 정의」, p.117





페인은 진보의 개념을 “문명의 혜택은 보존하고, 해악을 줄이는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국가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 자유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사회적 책무를 인정하였다. 특히 「토지분배의 정의」에서 비롯한 기본소득의 원형적 형태를 제시했다. 특히 페인은 기본소득이 자선이나 시혜의 영역이 아닌 ‘권리의 반환’임을 증명해냈다. 기본소득은 토지 사유제도의 발생으로 불가피하게 흡수된 토지에 대한 인류 전체의 자연적 공유권에 해당하는 상실분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모두의 것이지만 부동산은 일부의 것이다. 부동산에는 소유주의 노력과 투자가 들어있지만, 마찬가지로 태초에 인류가 1/n씩 점하는 자연적인 토지에 대한 권리도 섞여 들어있다. 문제는 토지의 성격상 두 가지 권리가 분리가 안 된다. 그래서 그 토지 그냥 땅주인이 갖고, 땅주인은 지대의 일부를 기금으로 내면된다. 국가는 이 기금을 사회초년기에 한번,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50세에 한번 기본소득으로 토지제도 운용에 따른 불가피한 권리의 상실 분만큼을 금전적으로 보상해주자는 것이다.
 



만약 이 땅의 모든 청춘들이 정착금 180만원을 갖고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면 어떨까? 적어도 학자금 대출이자에 휘둘려 빚과 빚의 악순환으로 시작하는 것보다 청춘의 기가 살지 않을까? 그 돈을 보태 사업을 벌여보기도, 해외여행을 다녀보기도, 등록금을 한번 제힘으로 내보기도 하지 않을까? 또 50대에 개인회생의 기회가 한번 더 찾아오면 어떨까? 삶을 비관하는 이들이 줄지 않을까? 갑자기 몸이 아플 때 병원비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경제적 재기를 위한 휴지기 동안의 귀한 생활비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매달 주는 것이 어렵다면, 인생에 딱 두 번, 아니 한번이라도 기본소득, 사회정착금을 지급하는 것은 어떨까? 여러 가지 물음이 쏟아지는 걸 보니, 20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왜 페인의 사상이 여전히 각광받고 있는지 또 아직도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알 것도 같다. 겨우 오늘의 상식을 회복한 우리사회는 아직 내일의 상식을 위해서는 갈길이 멀었나 보다.



-2017.09.30 @PrismMaker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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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5 부산 자취방 책장

: 대학생활의 거진 전부를 살았던 자취방, 이삿짐 싸기 전 한 컷.

책장은 동네사람들이 버린것들을 주워와 닦아썼다.



20대의 경제적 독립은 가혹했고 

기어코 버텨낸 결과물은 달콤했다.

상금을 타는 족족 책으로 바꾸던 시절이 있었다.

밥을 굶어가며 샀던 책들. 

꽂아두기만 해도 행복했고 바라만 봐도 배가 불렀다.

 이곳에서 나는 풍족하진 않았지만 

후회없이 사랑을 했고 책을 읽고 글을 써냈다. 


다 읽은 책은 명절마다 싣고 올라가

동생과 어머니 돌려보라고 본가에 놓고오곤 했다.

최근 부산생활을 정리하고 본가로 돌아와 다시 합쳤다.

(고로 저기 있는 책은 앞으로 읽어야 할 책...)

나는 알라딘 서재를 주로 글방으로 쓰고 있지만, 

나와 내 책, 책들이 있었던 공간에 대한 포스팅도 필요할 것 같아서

앞으로 종종 새로 업어온 책, 책장 사진을 업로드 할 생각이다. 



- 2017.09.28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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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키모카 2017-09-29 1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에 띄는 한나아렌트 정치사상세트^^ 저도 샀는데 아직 읽지는 못했어요.

프리즘메이커 2017-09-29 20:15   좋아요 0 | URL
저는 비닐도 뜯지 않았어요ㅎㅎ 정치사상이 전공이라서 지르기만 하고.. 고이 모셔두었답니다..ㅎㅎ

cyrus 2017-09-29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본가에도 책이 엄청 많이 있겠군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본가에 있는 책장 사진도 올려주세요. ^^

프리즘메이커 2017-09-29 20:16   좋아요 0 | URL
종종 가벼운 글과 책장사진으로도 찾아뵙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10-09 1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폰카로는 나올 해상도가 아니네요. ^^
좋은 책이 많이 보입니다. ^^

프리즘메이커 2017-10-09 20:10   좋아요 1 | URL
갤럭시s6가 꽤 대단합니다 ㅎㅎ 사람이 못나와서 그렇지 사물은 잘나오더라고요 ㅎㅎ
 


1. 도그마에서 벗어나기 – 기록과 편집으로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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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는 억울하다. 대개 인류 지성사는 이 시대를 ‘무지의 베일’에 가린 아둔한 자들의 침체된 역사라 폄하 해버리곤 한다. 움베르토 에코를 위시한 오늘 날의 일부 석학들이 중세에 가해진 부당한 오명을 벗기기 위해 분투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여전히 일반인들의 무의식 속 중세는 단지 마녀사냥이 자행되며, 인간의 존엄을 짓누르고, 고문과 굶주림으로 점철된 암흑기로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 장 베르동의 『중세는 살아있다』,최애리씨의 번역이 일품이다. 책 구석구석에 정말 친절하고 풍부한 각주를 달아 주셨다. 문장은 주술관계 한번 놓치는 일 없이 깔끔했고, 물 흐르듯 쉽게 읽혔다. 




물론 이 시대에 차마 입에 담기가 무서울 정도의 괴상망측한 일이 종종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중세를 절대 악(惡)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 근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동안의 천편일률적인 중세에 관한 도그마(dogma)에, 엄밀한 사료를 토대로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 역시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혜택 받은 시대를 사는 우리의 책무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양심을 알리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쓴 플라톤의 마음처럼, 이 책의 저자 장 베르동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중세를 위해 본 책을 서술했다.



 역사는 기록과 편집의 집합이며, 집합은 다시 이미지(image)를 낳는다. 이를테면 신문이 날마다 부정적인 사건사고 위주로 기록하고 편집하는 것이, 작금의 사회에 관한 현대인들의 비관적인 인상(印象)에 기여하듯 말이다. 평화롭고 유쾌한 일은 보통 기록되지 않는다. 충격적이고 쓰라린 사건만이 기록된다. 중세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중세말의 혼돈과 타락이 중세 전체는 아닐 것이다. 중세는 약 1000년에 가까운 길고 긴 세월이었다. 우리는 늘 이것을 간과한다. 

 



2. 오이디푸스와 근대인, 그들의 시샘



새 시대가 앞 시대를 넘어서려는 것은 당연하다. 분명 근대는 중세의 반동이지만, 동시에 중세의 자식이기도 했다. 중세의 공백이 근대의 출현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중세의 조용한 유산을 근대가 요란하게 상속 받은 것이다. 중세는 조용하고 길게, 천년동안 천천히 우리 삶의 기반을 주었다. ‘역사는 발전한다’는 명제가 참이라면, 중세의 발전 없이 근대의 출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중세는 정체된 시기라는 누명을 써왔다. 역사발전의 공백기로 치부되어 왔다. 프로이트적으로 아버지를 부정하는 사춘기 소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아니었을까? 근대인의 시샘이었으리라.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전 시대를 돌이켜 보면, 우선 못난 것부터 먼저 눈에 띄기 마련이다. 그다음엔 맥락을 무시하는 오류를 종종 범할 것이고, 과잉 일반화하기 일쑤일 것이다. 근대인들이 그랬다. 근대인의 눈에 비친 중세는 언제나 비합리적이고 추하고 불결했다. 근대인들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는 자부심으로 중세를 모멸하고 무시했다. 그러나,‘나치’의 등장은 이성적이라 자부하던 근대인의 환상을 무너뜨렸다. 어느 시대 어느 세상에서나 명암은 있기 마련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망각한 것이다. 

 


3.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중세 재해석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의 사람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해체’와‘복원’의 변증법이다. 어느 한 시기 전체를 한 단어로 축약해버리는 편견을 해체하고, 생략된 고유한 맥락을 복원한다. 전체를 해체시켜 개체를 분리하고, 다시 개체 하나 하나의 개성을 복원한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살아보지 못한 중세를 복기해야 한다. 작은 화소들을 공들여 모아 만든 선명한 TV 화면처럼 말이다.



중세를 포스트 모더니즘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중세가 평화롭고 풍족한 유토피아였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더 심한 지옥이었음을 밝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중세는 암흑이며 근대는 빛의 세기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중세라는 긴 시기를 긴 호흡으로 천천히 되살펴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논의가 다루지 못한 작은 부분들을 여러 각도에서 복원하는 것이다. 



논리는 선명하고 명확하게 세상을 비추고 또 구분해낸다. 그러나 빛이 강렬할수록 그림자 역시 짙어 지는 법이다. 짙은 어둠은 크고 뚜렷한 것들 외에 모조리 삼켜버린다. 중세가 꼭 그렇다. 천년 중세의 평화롭고 안락한 일상은 거대하고 강렬한 정치 종교적 사건들에 의해 가려져 왔다. 그래서 중세 재조명의 목표는 작고 희미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중세인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이다. 중세 전체의 정치경제적 거대담론이 아닌, 중세인 한 사람 한 사람의 희로애락과 평온한 일상을 다루는 것이다. 그림자가 드리웠다고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4. 중세는 살아있다



중세는 좌우보혁 할 것 없이 어떤 진영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였다.마르크스는 자신의 독창적인 역사 발전의 단계에 한 과정으로 이 긴 시기를 우겨 넣었다. 괴팍한 성격과 풍성한 수염을 가진 한 사상가에게 중세의 자리란 단지, 폐쇄적인 장원에서 벌어지는 영주와 농노의 계급투쟁의 시대였다. 이 소용돌이에서 사회의 생산력은 극히 미약했다. 생산관계는 신분제에 예속되어 늘 굶주렸다. 지배계급은 포악했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에서 이 고난의 시기는 벗어나는 데에만 무려 1000년이 걸릴 정도로 정체된 시기였던 것이다.



자유주의자의 눈에도 중세란 정치권력을 통해 부를 독점하는 악한 체제였다. 신분특권을 이용하여 불로소득을 정당화하고 세습했다. 이 체제는 여러모로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했다. 국왕과 영주는 자의적으로 사람을 가두고 죽였다. 교회는 마녀사냥과 이단재판으로 사람을 불태워 죽였다. 뿐만 아니라 세금이란 명목으로 시도 때도 없이 개인의 재산을 공권력을 이용해 강탈했다. 장원과 신분제는 자유임노동을 공간적으로 구속했고, 특권계급은 자유계약과 공정한 경쟁의 결과를 뒤집었다. 시장에서의 경쟁과 노력이 아니라 핏줄과 DNA를 통해 부를 분배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중세를 저주하고 냉소했다.



하지만 중세의 실상은 이들의 비관적 비판과는 달랐다. 중세는 사람 사는 곳이었고 역으로 1000년 동안 안정된 삶은 영위하던 시기였다. 저자 장 베르동은 중세에 관한 사료들을 끌어 모아 그대로 이 책에서 풀어낸다. 기록과 편집이 부정적이고 선정적인 것들 위주로 된다는 맥락을 재차 고려해보면, 장 베르동이 추려낸 사료이상으로 중세가 사람 살만한 곳이었음을 반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중세에도 웃음꽃이 피어났으며, 사랑을 했고, 여행을 다니며 목가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중세에는 가난한 적도 있었지만 풍족하게 누린 날이 훨씬 더 많았다. 공동체의 온정이 살아 있었다. 노동시간도 오히려 근대보다 덜했으며, 축제도 많이 열렸다. 휴식과 오락거리도 풍성했다. 종교는 사람에게 권세를 부린 적도 있었지만, 대개는 삶에 녹아 도덕적 교화와 정신적 지주가 되는데 더 방점을 두고 있었다. 물론 근대인들의 주장도 부분적으로 사실이었다. 거리는 불결했으며 위생 상태는 최악이었다. 전염병이 창궐했고 흑사병으로 유럽인구의 상당수가 사망했다. 그러나 의학은 끊임없이 발전해 나갔고, 환자를 위한 간호와 완쾌를 바라는 마음은 똑같았다. 중세에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두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발전하고 있었다.

 


단지 중세말기의 타락상을 중세 1000년을 일반화하는 논리 오류만 접어둔다면, 객관적으로 중세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고찰하고 그중에서 계승할 부분을 찾아내는 현명함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생존경쟁에 허덕이며 저녁이 있는 삶을 갈망한다. 사회의 모든 책임은 옅어지고 있다. 시와 노랫말은 사장되는 추세다. 중세인들은 삶에서 여유와 유머를 추구했다. 장인정신이라 불릴 만큼 책임에 높은 가치를 두었다. 낭만과 음유시인들의 발라드가 울려 퍼졌다. 이렇듯 현대의 결핍을 중세의 여유로 치유할 수 있다. 이것들이 21세기 오늘날 , 다시 중세를 되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다. 



우리의 안락한 삶에는 위생과 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중세 의사들의 합리화 노력과 고난이 담겨있다. 그동안 무수한 미신과 주술로 고통 받고 실험되어 일찍 덧없이 죽어간 많은 민초들의 희생이 담겨있다. 합리적 세상을 위해 주술의 영역을 줄여간 정치가와 철학가들의 덕을 우리가 보고 있다. 어느 사회에나 더 나은 세상 더 좋은 시대를 만들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이들의 천년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날의 우리는 혜택 받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바로 이 중세인 들과 우리네 일상 곳곳에 녹아있는 그들의 노고에 조롱과 비웃음이 아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박수를 칠 때가 아닐까?




-2017년 9월 26일 @PrismMaker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2015년 부산대학교 도서관 주최 '효원인과 함께하는 독서왕국'의 우수상 수상작을 발췌 및 재편집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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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9-27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두 권의 책만 읽어서는 중세를 100% 이해했다고 보기 어려워요.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에서 중세인들의 일상생활이 ‘치열함과 열정’에 사로잡혀 살았다고 묘사했어요. 중세를 ‘어둡고 정체된’ 시대라고 생각했던 인식과 다른 시각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프리즘메이커님의 글이 제 북플 뉴스피드에 뜨지 않았어요. transient-guest님이라는 분이 입력한 ‘<중세는 살아있다>를 읽고 싶어합니다’ 내용은 있거든요. 저는 그거 보고 <중세는 살아있다> 책 소개를 확인하다가 프리즘메이커님의 글을 발견했어요. 제가 프리즘메이커님의 서재 ‘즐겨찾기’를 했는데도 글이 안 뜨는 것 보면 알라딘 시스템의 오류인 것 같습니다.

cyrus 2017-09-27 11:51   좋아요 1 | URL
아... 제가 착각했어요. 제가 프리즘메이커님의 ‘친구 신청‘을 수락하지 않아서 글이 뉴스피드에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

프리즘메이커 2017-09-27 16:11   좋아요 0 | URL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1,2,3 > 시리즈를 참 갖고 싶은데 분량과 금액이 너무나도 커서 사지 못하고 있습니다ㅎㅎ
아마도 제가 주로 PC환경의 알라딘 서재로 작업을 하고 모바일 환경에 북플로 송출을 하다보니 이런 문제가 빈번한 듯 합니다. 주로 긴 글을 쓰는 데 모바일은 컴퓨터로 애써 만든 서식들이 다 깨지더라구요.. 그럼에도 잘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ㅎ

cordla2189 2017-09-28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 PC버전으로 감상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1. 인문학 열풍

  



고전 읽기가 유행하고 있습니다일상에 치이는 우리 시민들에게 고전을 직접 읽고 소화할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없지만 앎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니까요. 그래서 대한민국의 똑똑한 사람들과 출판사는 경쟁적으로 고전을 잘 정리하고 각색해서 시중에 여럿 괜찮은 입문서를 내놓고 있습니다. 어느 책을 골라도 쉽게 잘 설명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저는 제대로 된 입문서는 독자로 하여금 직접 원전을 찾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잘 소화하고 대신 씹어주는 해설서들은 읽기엔 편할지 몰라도, 스스로 노력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빼앗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턱을 낮추는 작업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직접 떠먹여 주는 것엔 반대합니다. 인문학 열풍 이면에 있는 손쉽게 무언가를 획득하려는 태도, 지식의 이해와 체화가 아니라 잘 정리된 지식의 단편적 암기로 빠지려는 경향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가이드북의 도움을 받더라도 여기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소화하려는 태도를 갖고 싶습니다.


 

(▲ 개인적으로 한길사의 인문고전 시리즈를 선호합니다. 모아두면 뿌듯해서요)


2. 인간의 고유 능력

 



학부생 4학년 시절, 문헌정보학과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주요 업무는 강의실 청소였는데, 제가 청소하기로 배정받은 시간을 쓰시는 교수님은 항상 강의를 10, 15분 늦게 마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덕에 저는 졸지에 청강생이 되어 문헌정보학10분 토막 지식을 듣는 입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보를 다루는 그 학과의 특성답게 요새 각광을 받는 ‘4차 산업혁명에 관해 교수님이 열정적으로 설명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정보의 분류는 크게 3가지가 있다. 날 것 그대로의 숫자는 Data, 맥락이 부여되면 Information,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면 Knowledge. 여기서 4차 산업혁명이란 인공지능이 인간에게서 Data에 투여되는 단순 노동을 가져가는 것을 말한다.” 정치학밖에 모르고 살던 저에게는 굉장히 신선한 설명이었습니다. 이 설명을 거꾸로 뒤집으면 인공지능이 침범하지 못하는 인간 고유의 지적능력은 맥락을 부여하는 능력의미를 추구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강연을 듣고 고전은 사람맥락의미사이의 거친 호흡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고전을 읽음으로써 인간은 맥락부여와 의미추구라는 인간만의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시대마다 또 장소마다 새로 읽힘으로써, 읽는 이의 현시점, 현 상태, 현재 원하는 바, 읽는 이가 살아왔으며 또 살아갈 역사와 사회의 특정 한 국면이 우연의 도움을 받아 맞부딪힐 때, 독특한 어떤 의미가 창출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이, 한 사람은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수 없으며, 같은 책도 다른 사람은 다르게 읽힐 수밖에 없고, 사람마다 부여하는 맥락이나 창출해내는 의미, 고유한 개성이 부딪히며 나는 무늬()’ 또한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고유한 지문처럼요. 인간의 고유성과 개성을 동시에 확인하는 행위, 그리고 그것을 고양하기 위한 지적 노력이 고전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요?





3. 논리와 가치


 


▲좌 : 장현근. 2011.맹자 바른 정치가 인간을 바로 세운다한길사

▲우: 동양고전연구회. 2016.맹자. 민음


 

2014년 초에 맹자를 읽었습니다. KBS의 사극 정도전에서 고려의 신진사대부이던 정도전이 맹자의 역성혁명’ 부분을 읽고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겠다는 결심을 하는 부분에서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입니다정치학도로서 조선왕조를 주도적으로 설계했던 정도전의 삶과 혁명'이라는 키워드는 매력적이었습니다그래서 저는 그 당시 맹자의 수많은 대목 중 정치사상 부분을 특히 유심히 여기며 읽었습니다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는가에만 초점을 맞췄던 게지요그러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터진 이후, 1년 반 만에 다시 읽은 맹자는 저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었습니다그리고 저는 유독 이 한 구절에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위해가 가해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 한 어린아이가 발을 헛디뎌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갑자기 목격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선 누구나 겁을 먹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그건 그 아이의 부모와 사귀려들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서 칭찬을 들으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비난의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공손추 상·6 (장현근. 2011.맹자 : 바른 정치가 인간을 바로 세운다. 한길사. p.120)

 




어린아이 하나가 우물에 빠진 것을 목격해도 겁을 먹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 사람인데, 우물보다 넓은 바다에 하나보다 많은 304명의 억울한 목숨이 바다에 빠진 사건을 두고 우리 사회는 조롱과 비난과 편 가르기와 소모적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방관했으며, 심지어 동조했습니다. 이 당시 저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격의 파탄공감의 부재에 큰 절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년 반 뒤에 다시 읽은 맹자의 글이 정확한 인과관계와 사실관계에 입각한 논리가 정연한 글이라기보다, 당위에 호소하며 가치를 추구하는 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마디로 문장의 과학이 아니라 공감의 철학이었던 이지요. 다시 읽은 맹자는 제가 무의식적으로 듣고 싶었던 우리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라는 이야기를 새롭게 들려주었습니다. 저라는 사람맹자라는 책에서 세월호의 맥락을 부여해, 잠시 잊고 살았던 소중한 가치를 다시 얻어내고자 그렇게 발버둥을 쳤던 것이지요.


 


 

4. 기존의 사실과 새로운 의미

 



한 학기 동안 네이버 열린 연단의 고전강의를 들었습니다. 이승환 교수는 <동양의 고전 : 동양 고전 이해를 위한 방법론적 서언> 강연에서 고전 독서의 5단계를 제시했습니다. 앞의 4단계는 사실 확인을 철저하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고, 마지막 단계는 확인된 사실을 바탕으로 나만의 새로운 해석을 보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이런 과정을 조금 삐딱하게 봤습니다. 저런 복잡다단한 과정이 일반인들의 지식 접근을 차단하는 높은 문턱이 되는 것은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턱을 낮추는 과정과 지식을 대하는 자세는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접근성을 좋게 만드는 과정과 별개로, 지식을 추구하는 업을 가졌다면 소명의식을 가지고 문구 하나하나, 문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뜯어 살피는 데 영혼을 바쳐야 한다고 막스 베버 선생의 책,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읽었습니다.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



-(막스 베. 전성우 역. 2013. 직업으로서의 학문.나남. pp.33~34)





그리고 좌절했습니다. 엄격한 형식요건을 갖춰야 하기에, 사실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몇 없겠구나. 두려움과 막막함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래서 신뢰감이 생겼습니다. 가짜 뉴스와 권력을 등에 업은 방송신문사가 최소한의 객관성을 의도적으로 지키지 않아 생기는 문제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적어도 학문은 그렇지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석사과정을 막 밟기 시작한 제가 고전을 어떤 자세로 읽어야 할지를 다시 한번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텍스트 하나하나의 의미를 이리저리 뜯어보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을 정신무장과 나의 고집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의도적으로 빼먹지 않는 양심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동시에 강연에서 훈고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낳은 사생아였고, 고증학이 청 왕조의 폐쇄적 검열에 따른 불가피한 조처였다는 내용이 특히 귀에 잘 들어왔습니다. 동서고금의 부패한 집권세력이 객관성을 빙자해 새롭고 비판적인 의견을 탄압하는데 오용했던 역사적 상흔을 배운 탓인지, 저는 너무 사실관계에만 치중하려는 풍토가 힘없는 자들에게 불리한 여건을 만들 거라는 다소 좋지 못한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판결문의 형식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엄격함이 헌법 정신을 수호하듯, 형식의 굳건함은 가치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5. 번역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 지배 계급은 공산주의 혁명이 두려워 전율할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진우 역. 2015.공산당선언. 책세상. pp.59-60)

 




학부 2학년 때, 묘한 호기심에 공산당 선언을 읽어 보았습니다. 도대체 이 책이 뭐길래 전 세계의 절반이 붉게 물들고, 청년들의 가슴이 식지 않는 정열로 타올랐던 것일까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서점에 가 이진우 씨가 번역한 문고판 공산당 선언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불같은 성격으로는 누구에게 뒤처지지 않는 저였기에, 당연히 이 책을 읽으면 가슴이 두근거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독서는 지루함이 멈추지 않았고, 실망은 곱절로 돌아왔습니다



명색이 선언문인데 글에서는 전혀 리듬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어떤 기백조차 담기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뒤흔들 유령을 보낼 두 철학자의 혼백은 전혀 담기지 않았습니다. 특히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라니요. 냉정한 머리로만 한 딱딱한 번역은 내용은 담고 있으나 느낌은 전혀 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글을 읽고 누가 혁명에 가담하겠습니까? 지루하고 난삽한 번역 탓에, 저는 처음 접한 맑스의 저작에 굉장한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학부 4학년의 필자는 서점가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삽화와 새로 번역된 공산당 선언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맨 마지막 장을 펼치고 앞에 언급한 해당 구절을 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소리 내어 읽어봤습니다. 그래 이 맛이지. 이래야 선언문답지. 원작이 아닌 번역의 문제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스러운 일로 여긴다. 그래서 자신들의 목적이 기존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힌다. 지배 계급들을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하라. 이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부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일러스트 공산당 선언 · 공산주의 원리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박종대 역. 2015.공산당선언. 미메시스. p.93)

 





잘못된 번역이 놓치는 것은 내용뿐만이 아닙니다. 뉘앙스나 맥락이나 감정, 정신, 기백과 같은 부분도 함께 사라집니다. 책이 어떤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탄탄한 논리 구조와 내용의 알참도 있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과 호소력 짙은 문체도 한몫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소실된 내용을 각주를 덧붙여 복원하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저는 이 책이 그 시대 그 사회에 주었던 느낌을 잘 살려내는 과정도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그 시대 사람들이 왜 이 책에 매혹되었고, 오늘날의 우리는 이것을 다시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차이점이 명확해지면서, 거기서 엄청난 가능성이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닐까요? 그러다 보면 현재의 시점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편견으로 그 시대의 단점만 들추거나 덮어놓고 무조건 숭상하는 오류가 좀 줄어들진 않을까요?


 

 

6. 주체성의 실종

 


앞서 저는 인간 고유의 능력은 그 자체로는 죽어있는 단순한 숫자나 조각 사실들을 외우는 능력이 아닌, 맥락을 부여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는 능력이야말로 인간 고유의 능력이며, 고전을 읽으면서 이 부분이 가장 활성화된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스스로 꾸역꾸역 거친 책을 읽으면서 머리가 트이고 사고력이 향상되고 책의 기술적인 논리와 테크닉을 파악하고, 또 나만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면서 나만의 무늬, 주체성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고전 교육은 주입식입니다. 남이 간결하게 정리한 요약본을 그냥 암기하는 방식이지요. 이렇게 해서는 어떠한 인간의 지적능력도 자극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독서는 스스로 괴롭게 고민하며 읽되, 다채로운 시각은 즐겁게 함께 공유하는 기쁨이 있길 바랍니다.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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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의 마음에는 타지 않은 불꽃 하나가 감춰져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정의(Justice)’를 말하는 호소력 있는 제목에 충동적으로 이 책을 덥석 집었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누구나 샀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 책은 한동안 책장에 갇혀야 했다. 


삼수생 시절이라 꽤 시간도 많았던 바, 다시 심기를 가다듬고 책을 집어 들었다. 한 페이지 두 페이지 힘겹게 읽어나갔다. 완독했음에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못난 뇌를 탓하면서도, 이런 섹시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부단히 갈고 닦으면 나 또한 멋진 책을 쓸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정치는 공동체를 다루는 학문이며, 정치철학은 ‘정의’의 학문이다. 이 책은 시대를 가른 거인들의 ‘정의론’ 여행기이다. 정치철학은 한 사회가 훌륭해지기 위해서는 따라야 할 원칙과 존중해야 할 가치를 탐구한다. 이를 두고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롤스, 노직, 그리고 마이클 샌델 자신에 이르기까지, 거인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불꽃 튀는 논쟁을 벌인다.


저자 마이클 샌델은 정의에 관한 다양한 관점과 풍부한 해설을 곁들여, 고민하게 할 도발적인 사례를 던져준다. 최근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정의의 평균치가 낮아지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 무한경쟁 속 매몰된 개인은, 돈 앞에 소중한 가치들이 타락하는 장면을 이곳저곳에서 목격한다. 때문에 이 책이 갖는 시대성은 귀중하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는 정치학도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자유가 들불처럼 번지는 세상을 꿈꾼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한국사회의 문법이 바뀌기를 바란다. 최고의 자선은 훌륭한 정치를 보급하는 일이라 믿는다. 우리 개개인의 도전적 사유가 사회 전체의 위대함으로 이어질 것을 확신한다. 이 땅에 정의를 논하는 사람이 더 많아져, 우리네 삶과 그 터전에 품격이 자리 잡기를 소망한다. 책이 선물하는 고민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불꽃이 되길 바라며, <정의란 무엇인가>를 여러분에게 선물한다.


-2017년 8월 28일 @PrismMaker


※ 본 글은 2015년 부대신문 1512호 [내 삶 속의 책] 섹션에 실린 필자의 기고문 입니다.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http://weekly.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4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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