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그마에서 벗어나기 – 기록과 편집으로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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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는 억울하다. 대개 인류 지성사는 이 시대를 ‘무지의 베일’에 가린 아둔한 자들의 침체된 역사라 폄하 해버리곤 한다. 움베르토 에코를 위시한 오늘 날의 일부 석학들이 중세에 가해진 부당한 오명을 벗기기 위해 분투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여전히 일반인들의 무의식 속 중세는 단지 마녀사냥이 자행되며, 인간의 존엄을 짓누르고, 고문과 굶주림으로 점철된 암흑기로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 장 베르동의 『중세는 살아있다』,최애리씨의 번역이 일품이다. 책 구석구석에 정말 친절하고 풍부한 각주를 달아 주셨다. 문장은 주술관계 한번 놓치는 일 없이 깔끔했고, 물 흐르듯 쉽게 읽혔다. 




물론 이 시대에 차마 입에 담기가 무서울 정도의 괴상망측한 일이 종종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중세를 절대 악(惡)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 근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동안의 천편일률적인 중세에 관한 도그마(dogma)에, 엄밀한 사료를 토대로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 역시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혜택 받은 시대를 사는 우리의 책무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양심을 알리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쓴 플라톤의 마음처럼, 이 책의 저자 장 베르동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중세를 위해 본 책을 서술했다.



 역사는 기록과 편집의 집합이며, 집합은 다시 이미지(image)를 낳는다. 이를테면 신문이 날마다 부정적인 사건사고 위주로 기록하고 편집하는 것이, 작금의 사회에 관한 현대인들의 비관적인 인상(印象)에 기여하듯 말이다. 평화롭고 유쾌한 일은 보통 기록되지 않는다. 충격적이고 쓰라린 사건만이 기록된다. 중세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중세말의 혼돈과 타락이 중세 전체는 아닐 것이다. 중세는 약 1000년에 가까운 길고 긴 세월이었다. 우리는 늘 이것을 간과한다. 

 



2. 오이디푸스와 근대인, 그들의 시샘



새 시대가 앞 시대를 넘어서려는 것은 당연하다. 분명 근대는 중세의 반동이지만, 동시에 중세의 자식이기도 했다. 중세의 공백이 근대의 출현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중세의 조용한 유산을 근대가 요란하게 상속 받은 것이다. 중세는 조용하고 길게, 천년동안 천천히 우리 삶의 기반을 주었다. ‘역사는 발전한다’는 명제가 참이라면, 중세의 발전 없이 근대의 출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중세는 정체된 시기라는 누명을 써왔다. 역사발전의 공백기로 치부되어 왔다. 프로이트적으로 아버지를 부정하는 사춘기 소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아니었을까? 근대인의 시샘이었으리라.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전 시대를 돌이켜 보면, 우선 못난 것부터 먼저 눈에 띄기 마련이다. 그다음엔 맥락을 무시하는 오류를 종종 범할 것이고, 과잉 일반화하기 일쑤일 것이다. 근대인들이 그랬다. 근대인의 눈에 비친 중세는 언제나 비합리적이고 추하고 불결했다. 근대인들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는 자부심으로 중세를 모멸하고 무시했다. 그러나,‘나치’의 등장은 이성적이라 자부하던 근대인의 환상을 무너뜨렸다. 어느 시대 어느 세상에서나 명암은 있기 마련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망각한 것이다. 

 


3.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중세 재해석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의 사람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해체’와‘복원’의 변증법이다. 어느 한 시기 전체를 한 단어로 축약해버리는 편견을 해체하고, 생략된 고유한 맥락을 복원한다. 전체를 해체시켜 개체를 분리하고, 다시 개체 하나 하나의 개성을 복원한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살아보지 못한 중세를 복기해야 한다. 작은 화소들을 공들여 모아 만든 선명한 TV 화면처럼 말이다.



중세를 포스트 모더니즘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중세가 평화롭고 풍족한 유토피아였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더 심한 지옥이었음을 밝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중세는 암흑이며 근대는 빛의 세기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중세라는 긴 시기를 긴 호흡으로 천천히 되살펴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논의가 다루지 못한 작은 부분들을 여러 각도에서 복원하는 것이다. 



논리는 선명하고 명확하게 세상을 비추고 또 구분해낸다. 그러나 빛이 강렬할수록 그림자 역시 짙어 지는 법이다. 짙은 어둠은 크고 뚜렷한 것들 외에 모조리 삼켜버린다. 중세가 꼭 그렇다. 천년 중세의 평화롭고 안락한 일상은 거대하고 강렬한 정치 종교적 사건들에 의해 가려져 왔다. 그래서 중세 재조명의 목표는 작고 희미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중세인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이다. 중세 전체의 정치경제적 거대담론이 아닌, 중세인 한 사람 한 사람의 희로애락과 평온한 일상을 다루는 것이다. 그림자가 드리웠다고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4. 중세는 살아있다



중세는 좌우보혁 할 것 없이 어떤 진영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였다.마르크스는 자신의 독창적인 역사 발전의 단계에 한 과정으로 이 긴 시기를 우겨 넣었다. 괴팍한 성격과 풍성한 수염을 가진 한 사상가에게 중세의 자리란 단지, 폐쇄적인 장원에서 벌어지는 영주와 농노의 계급투쟁의 시대였다. 이 소용돌이에서 사회의 생산력은 극히 미약했다. 생산관계는 신분제에 예속되어 늘 굶주렸다. 지배계급은 포악했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에서 이 고난의 시기는 벗어나는 데에만 무려 1000년이 걸릴 정도로 정체된 시기였던 것이다.



자유주의자의 눈에도 중세란 정치권력을 통해 부를 독점하는 악한 체제였다. 신분특권을 이용하여 불로소득을 정당화하고 세습했다. 이 체제는 여러모로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했다. 국왕과 영주는 자의적으로 사람을 가두고 죽였다. 교회는 마녀사냥과 이단재판으로 사람을 불태워 죽였다. 뿐만 아니라 세금이란 명목으로 시도 때도 없이 개인의 재산을 공권력을 이용해 강탈했다. 장원과 신분제는 자유임노동을 공간적으로 구속했고, 특권계급은 자유계약과 공정한 경쟁의 결과를 뒤집었다. 시장에서의 경쟁과 노력이 아니라 핏줄과 DNA를 통해 부를 분배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중세를 저주하고 냉소했다.



하지만 중세의 실상은 이들의 비관적 비판과는 달랐다. 중세는 사람 사는 곳이었고 역으로 1000년 동안 안정된 삶은 영위하던 시기였다. 저자 장 베르동은 중세에 관한 사료들을 끌어 모아 그대로 이 책에서 풀어낸다. 기록과 편집이 부정적이고 선정적인 것들 위주로 된다는 맥락을 재차 고려해보면, 장 베르동이 추려낸 사료이상으로 중세가 사람 살만한 곳이었음을 반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중세에도 웃음꽃이 피어났으며, 사랑을 했고, 여행을 다니며 목가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중세에는 가난한 적도 있었지만 풍족하게 누린 날이 훨씬 더 많았다. 공동체의 온정이 살아 있었다. 노동시간도 오히려 근대보다 덜했으며, 축제도 많이 열렸다. 휴식과 오락거리도 풍성했다. 종교는 사람에게 권세를 부린 적도 있었지만, 대개는 삶에 녹아 도덕적 교화와 정신적 지주가 되는데 더 방점을 두고 있었다. 물론 근대인들의 주장도 부분적으로 사실이었다. 거리는 불결했으며 위생 상태는 최악이었다. 전염병이 창궐했고 흑사병으로 유럽인구의 상당수가 사망했다. 그러나 의학은 끊임없이 발전해 나갔고, 환자를 위한 간호와 완쾌를 바라는 마음은 똑같았다. 중세에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두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발전하고 있었다.

 


단지 중세말기의 타락상을 중세 1000년을 일반화하는 논리 오류만 접어둔다면, 객관적으로 중세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고찰하고 그중에서 계승할 부분을 찾아내는 현명함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생존경쟁에 허덕이며 저녁이 있는 삶을 갈망한다. 사회의 모든 책임은 옅어지고 있다. 시와 노랫말은 사장되는 추세다. 중세인들은 삶에서 여유와 유머를 추구했다. 장인정신이라 불릴 만큼 책임에 높은 가치를 두었다. 낭만과 음유시인들의 발라드가 울려 퍼졌다. 이렇듯 현대의 결핍을 중세의 여유로 치유할 수 있다. 이것들이 21세기 오늘날 , 다시 중세를 되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다. 



우리의 안락한 삶에는 위생과 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중세 의사들의 합리화 노력과 고난이 담겨있다. 그동안 무수한 미신과 주술로 고통 받고 실험되어 일찍 덧없이 죽어간 많은 민초들의 희생이 담겨있다. 합리적 세상을 위해 주술의 영역을 줄여간 정치가와 철학가들의 덕을 우리가 보고 있다. 어느 사회에나 더 나은 세상 더 좋은 시대를 만들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이들의 천년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날의 우리는 혜택 받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바로 이 중세인 들과 우리네 일상 곳곳에 녹아있는 그들의 노고에 조롱과 비웃음이 아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박수를 칠 때가 아닐까?




-2017년 9월 26일 @PrismMaker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2015년 부산대학교 도서관 주최 '효원인과 함께하는 독서왕국'의 우수상 수상작을 발췌 및 재편집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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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9-27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두 권의 책만 읽어서는 중세를 100% 이해했다고 보기 어려워요.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에서 중세인들의 일상생활이 ‘치열함과 열정’에 사로잡혀 살았다고 묘사했어요. 중세를 ‘어둡고 정체된’ 시대라고 생각했던 인식과 다른 시각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프리즘메이커님의 글이 제 북플 뉴스피드에 뜨지 않았어요. transient-guest님이라는 분이 입력한 ‘<중세는 살아있다>를 읽고 싶어합니다’ 내용은 있거든요. 저는 그거 보고 <중세는 살아있다> 책 소개를 확인하다가 프리즘메이커님의 글을 발견했어요. 제가 프리즘메이커님의 서재 ‘즐겨찾기’를 했는데도 글이 안 뜨는 것 보면 알라딘 시스템의 오류인 것 같습니다.

cyrus 2017-09-27 11:51   좋아요 1 | URL
아... 제가 착각했어요. 제가 프리즘메이커님의 ‘친구 신청‘을 수락하지 않아서 글이 뉴스피드에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

프리즘메이커 2017-09-27 16:11   좋아요 0 | URL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1,2,3 > 시리즈를 참 갖고 싶은데 분량과 금액이 너무나도 커서 사지 못하고 있습니다ㅎㅎ
아마도 제가 주로 PC환경의 알라딘 서재로 작업을 하고 모바일 환경에 북플로 송출을 하다보니 이런 문제가 빈번한 듯 합니다. 주로 긴 글을 쓰는 데 모바일은 컴퓨터로 애써 만든 서식들이 다 깨지더라구요.. 그럼에도 잘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ㅎ

cordla2189 2017-09-28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