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복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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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복] 대작가의 초기작과 거니는 1950년대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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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드라마나 영화, 소설, 연극 등을 보는 사람이라면 어떤 경로로든 접하게 되는 작가다. 1950년 등단 이래 1992년 사망하기까지 40여 년 동안 세이초는 장편 100여 편 중단편 1000여 편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썼다. 지금까지 나온 작품 단행본이 750여종에 달하고 66권이 나온 전집이 완간이 아닌 현재 진행 중인 걸 보면 그가 얼마나 엄청난 다작 작가인지 가늠할 수 있다. 흔히 마쓰모토 세이초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부로 소개되고 독자들도 그렇게만 알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미스터리 소설은 소비성과 오락성이 강한 대중통속소설의 일환으로 등장 발전하여 순수문학에 비해 내용도 가볍고 집필 속도도 빠른 경향이 있으며, 양산형 장르문학이나 라이트노벨로 이런 이미지가 더 강하게 굳혀져 있다. 그래서 세이초의 다작과 작품성을 평가 절하해 예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이초의 작품세계는 대단히 방대하다. 물론 세이초가 (사회파) 미스터리 장르로 일가를 이루었고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도 추리·미스터리 관련이지만, 소설과 논픽션을 넘나드는 작가였고 소설의 경우 순수소설과 추리소설, 미스터리소설, 역사소설 등 장르를 종횡무진하는 작가였다. 초기작인 <어느 ‘고쿠라 일기’전>이 일본 최대 상업 문학상인 나오키상에 후보로 올랐다가 도리어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순수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사실이나, 역사소설 집필을 위해 몰두한 일본사에 대해 훗날 학계와 맞서고 학문적 성과를 어느 정도 인정받은 점은 세이초란 인간과 그의 문학 세계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독자가 한 작가의 작품들에 접근하는 방법엔 대표작을 중심으로 읽는 방법과 초기작부터 시작해 시대 순으로 읽어 나가는 방법이 있다. 후자의 방법으로 세이초의 문학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 지난 달 출간된 <잠복>은 강력 추천하는 책이다.

 

 

총 여섯 권으로 기획한 모비딕의 ‘마쓰모토 세이초 단편 미스터리 걸작선’은 1965년에 일본의 문학평론가 히라노 겐이 여섯 권으로 펴낸 ‘신조문고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단편집(신조사)’를 번역한 책이다. 권 순서는 다르지만 일본판과 제목도 수록단편도 같은 단편집 <잠복>은 세이초의 첫 미스터리소설인 [잠복]을 포함하여 1955년에서 1957년 발표한 여덟 편의 미스터리소설을 담고 있다. 단편의 배경이 되는 일본의 1950년대는 2차 대전 종전 후 전장에서 사람들이 돌아오고 패전과 식민지 상실로 입은 경제적 정신적 타격을 한국전특수로 인한 경기부흥으로 극복하는 시기이다. 궁핍한 가정형편으로 학력도 소학교 졸업으로 그쳤고 마흔이 될 때까지 노점상과 인쇄공, 각종 부업 등 별별 일을 했던 세이초는 상금을 받기 위해 글을 쓰면서 등단한 작가였다. 초기단편집인 <잠복>엔 그런 다사다난했던 세이초의 경험과 당시의 일본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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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그르친 완전범죄 [얼굴] - 1956

무명의 연극배우였던 료키치는 그의 연극을 본 이시이 감독의 눈에 띄어 감독의 신작 <봄눈>에 단역으로 캐스팅된다. 대여섯 장면만 나오는 단역에 불구했지만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은 료키치, 이번엔 파격적인 주연 캐스팅 제의가 들어온다. 료키치는 불안하다. 료키치에겐 씻을 수 없는 과거가 있고 그 과거를 아는 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지금껏 조용히 살았다. 전국 개봉하는 영화의 주연, 오랜 무명 생활을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눈앞에 온 상황, 성공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파국을 부르는데.

 

 

어느 잠복형사의 일지 <잠복> - 1955

도쿄에서 발생한 기업 중역 강도 살인사건, 아무런 단서도 없어 한 달째 수사가 난항을 겪던 중 우연히 노상 불심검문 중 범인인 야마다가 체포된다. 순순히 범행을 자백하는 야마다는 처음엔 단독범행이라 진술했다가 공범이 있고 자신은 강도에만 가담했을 뿐 살인까지 저지른 것은 공범인 규이치라고 초기 진술을 뒤집는다. 야마다를 취조하면서 이시이가 자신에 신병에 비관해 자살하려고 했고 죽기 전에 옛 연인을 만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안 경찰은 이시이가 연인을 만나러 갈 것인지 아닌지로 의견이 나뉘고 결국 수사를 두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이시이가 연인을 만나러 갈 것이라 예측했던 유키는 그녀가 규슈에 살고 있는 사다코라는 것을 알아내고 사다코의 집 앞에서 잠복수사를 한다. 계속되는 잠복, 평온한 사다코의 일상, 이시이는 사다코를 만나고 유키는 이시이를 검거할 수 있을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지만 저를 꼭 찾아주세요 <귀축> - 1957

열여섯부터 인쇄소 일을 하던 소키치는 스물일곱에 함께 인쇄소에서 더부살이했던 오우메와 결혼하고 합심해 노력한 끝에 서른둘에 작은 인쇄소를 차리게 된다. 처음엔 하청으로 시작했지만 꼼꼼한 일솜씨로 신용을 얻은 소키치의 사업은 번성한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소키치는 요릿집 접대부인 기쿠요와 불륜에 빠지고 오우메 사이에서 자식이 없던 그는 기쿠요와 3명의 아이를 낳으며 철저한 이중생활을 한다. 하지만 최신 장비를 가진 대형 인쇄소가 지역에 들어서면서 소키치의 사업은 기울게 되고 생활비를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 기쿠요가 오우메를 찾아오면서 8년간의 두 집 살림이 종결된다. 당신의 아이니 책임지라며 세 아이를 두고 떠나는 기쿠요, 오우메의 등쌀 속에서 세 아이들이 죽거나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는데.

 

 

씁쓸하고 다시 생각하기 싫은 내 시골 기자 생활 <투영> - 1957

도쿄에서 신문기자를 하던 다무라는 상사와의 불화로 신문사를 그만두고 아내 요리코와 무작정 낙향한다. 하지만 금세 퇴직금은 바닥나고 다무라가 취업이 잘되지 않자 요리코가 카바레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무라도 곧 그 지역에서 가장 영세하고 다른 기자들에게 무시 받는 3류지 요도신보에서 일하게 된다. 요도신문은 오직 시정 비리를 캐는데 혈안이 된 신문, 그래서 시의회와 시청의 눈엣가시다. 어느 날 다무라의 취재원 중 한명이었던 미나미가 시체로 발견되고, 다무라는 냄새를 맡는데 이건 특종이다!

 

 

나의 너무 좋은 기억력이 무섭다 <목소리> - 1956

신문사 전화교환원인 도모코는 전화교환원 특유의 직업병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예민한 감각과 좋은 기억력으로 전화 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잘 구별하고 잘 알아챈다. 어느 날 야근하던 도모코는 사회부 기자의 부탁을 받고 전화를 건다. 그러나 도모코는 잘못 전화를 걸었고 상대방은 약간 장난스럽지만 퉁명하고 화난 목소리로 전화를 끊는다. 도모코는 잘못 건 번호의 주소를 확인하는데, 다음날 신문에서 자신이 전화를 걸었던 주소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기사를 읽고 충격에 휩싸인다. 목격자는 아니지만 범인의 목소리를 들은 도모코는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그 얘기가 기사화되었다. 그러나 반년 동안 범인을 잡지 못해 미제로 수사가 종결된다. 퇴사 후 결혼하고 전업주부가 된 도모코는 남편 시게오가 홧김에 회사를 그만두고 반년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다. 계속 일을 구하지 못하다가 약품 관련 상사에 취직했다는 시게오는 다달이 꽤 많은 월급을 받아왔다. 도모코 뿐 아니라 시게오 본인도 정확히 어떤 회사인지 알지 못하고 걸핏하면 집에서 세 명의 회사동료와 마작을 하니 수상하기 짝이 없지만 넉넉하고 꼬박꼬박한 월급에 애써 참는다. 어느 날 세 회사 동료 중 한명의 전화가 걸려오고, 도모코는 그 목소리가 과거 살인사건 범인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리는데.

 

 

도쿄에 사는 그녀가 지방신문을 읽는 이유는 <지방신문을 구독하는 여자> - 1957

도쿄에 사는 요시코는 도쿄에는 팔지 않는 Y현 K시의 유명신문 고신신문을 구독한다. 구독하면서 며칠치 예전 신문도 구매하길 원하는 요시코, 배달된 지방신문을 매일매일 탐독한다. 그리고 구독한지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원하는 기사를 찾은 그녀는 구독을 중지한다. 문제는 괜히 구독신청과 구독중지시 사유를 적은 것이었다. 고신신문에 연재 중인 [야도전기]란 소설이 재미있을 것 같아 구독하고 소설이 재미없어져서 구독을 중지한다는 것이었다. 무심코 넘어갈 수 있었을 문제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야도전기]의 작가 류지는 수상함을 느끼고 그녀를 찾는다. 요시코가 고신신문을 읽는 이유는 무엇이고 류지는 무엇을 알아차렸던 걸까.

 

 

그와 그녀의 <일 년 반만 기다려> - 1957

전쟁 중엔 남자가 부족했기에 여자들의 취업이 쉬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남자들이 하나둘 돌아오면서 필요 없어진 여직원들은 대량 해고되었다. 여전 졸업 후 바로 입사했던 스무라 사토코 역시 그 희생양 중 한명이었다. 그의 남편 요키치는 남자였지만 중졸이었기 때문에 전후 인력이 넘치게 되면서 경쟁우위가 없어 역시 실직하였다. 재취업에 실패한 요키치는 주부로 눌러앉고, 졸지에 가장이 된 사토코는 새로운 일자리를 여럿 전전하다 에너지개발 붐에 따른 토목경기활황에 주목,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보험을 판다. 사토코의 예상은 적중했다. 일이 위험해 보험의 수요는 많은데 공사장이 오지인 경우가 많아 보험판매원들의 방문이 거의 없어 엄청난 실적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자 요키치가 방탕한 생활을 하고 사토코를 질투하며 그녀에게 걸핏하면 폭력을 행사한다. 참다못한 사토코는 요키치를 죽이고 정당방위인 면이 많고 페미니스트이자 인기 평론가인 다키코의 지지가 더해져 여론은 사토코를 동정하는 일색으로 흐른다. 그런데 사토코의 비밀을 폭로하는 사내가 등장하는데 1년 반만 기다려?

 

 

내가 살기 위해선 스승을 없애야 한다 <카르네아데스의 널> - 1957

패전 후 국가주의적 역사론이 몰락하면서 그 입장에 섰던 수많은 역사학과 교수들이 추방당했다. 오쓰라 교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애제자였던 구무라는 빠르게 유물론적 사관으로 기조를 바꾸면서 피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하루아침에 처지가 뒤바뀐 그들, 오쓰루는 각종 저술과 강연으로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는 구무라가 부러워한다. 초라해진 스승에 대한 우쭐함도 잠시 오쓰루는 다시 강단에 서게 되고 구무라처럼 유물사관을 펴는 진보사학자가 되어 구무라의 입지를 위협한다. 또 시대가 바뀌어 좌익사관이 불리해지자 오쓰루는 가장 먼저 우익으로 전향하며 구무라보다 교과서 시장을 선점한다. 바다 한가운데 난파했을 때 한 사람만 붙잡고 있어야 살 수 있는 널빤지를 두 사람이 붙잡고 있을 때 다른 한 사람을 밀어내야 자신이 살 수 있는 ‘카르네아데스의 널’ 문제와 같은 구무라와 오쓰루의 관계, 구무라는 결단을 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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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초가 표방한 사회파 미스터리는 복잡한 트릭이나 장르적 기교가 없다. 그래서 열심히 머리 굴리며 추리해 짜릿한 쾌감을 얻길 즐기거나 기술적 정교함이나 자극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독자에겐 밋밋하고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시사적인 사회문제나 사회구조적 모순을 반영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는 장르문학을 즐기는 동시의 작품 발표 당시의 시대적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로 상징되는 1950년대 일본 영화산업의 진일보, 전국 개봉하는 영화가 없었다면 계속 연극배우만 했다면 밝혀지지 않았을 [얼굴]에서 료키치의 범죄는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인쇄소의 흥망성쇠가 담긴 [귀축]의 또 다른 스토리텔링 축은 불륜에 대한 끔찍한 대가로 스스로 자기 아이들을 죽이거나 죽는 것을 봐야 하는 아버지이다. [일년 반만 기다려]나 [카르네아데스의 널]은 종전 이후 고용과 학계가 어떻게 급변하는지, 후자의 경우 변화하는 세태에 생존하기 위해 어떻게 처신해야하는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잠복]이나 [투영], [지방신문을 보는 여자], [목소리]엔 지금은 사라진 직업이나 일의 방식들이 있는데 내용 자체는 지금 읽어도 세련되고 공감되어 매력적이다.

 

 

당대의 사회현실을 반영한 문학들의 강점은 과거를 비추는 거울로서 소중한 유산이 되는 동시에 역사의 굴레에 의해 현재와 맞닿는 작품의 어떤 면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이초는 스토리텔링의 천재였다. 쉼 없이 샘솟는 상상력과 세상을 보는 날카로운 관찰력은 학력도 나이도 콤플렉스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세이초의 수많은 작품들은 한번으로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리메이크된다. 그 저력과 매력의 이유는 책을 직접 읽으면 알 수 있다. 분명 1950년대의 풍경을 담은 <잠복>의 단편들은 예스러움이 생동하고 있는데 지금 읽어도 재미와 시사점이 있다. 단편 안에서도 시나리오 씬을 나누듯 장을 나눈다거나([귀축],[목소리]), 시간과 시점이 엇갈린 일기의 토막을 나열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내용이 전개되는([얼굴]) 등 기법 면에서도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또 수사 과정에 대한 묘사나 세밀한 설정과 인용들은 세이초의 방대한 취재량과 풍부한 지식이 짐작되는 부분이다.

 

 

한편 우리가 외국 장르문학 작품을 볼 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번역이다. 물론 해당 외국어능력은 기본이지만, 장르문학의 번역은 얼마나 학벌이 대단하고 교수 등 프로필이 화려한지는 상관없다. 장르에 대해 잘 이해하고 문장을 쉽고 감칠맛나게 풀어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모비딕에서 펴내는 ‘세이초월드’ 번역의 대부분을 맡은 김경남의 <잠복> 번역은 퍽 마음에 들었다. 역사전문출판사였고 그 동안 임프린트를 따로 내지 않았던 역사비평사가 모비딕이란 장르문학 전문 임프린트를 만들고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인 북스피어와 함께 세이초 선집작업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무척 의외였고 어떤 결과물들을 낼지 궁금했다. 특히 <잠복>의 경우 모비딕이 독자투자모금(북펀드)을 하며 자신감을 내비쳤던 만큼 어떨지 무척 기다렸던 책인데 기대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한 편 한 편 주옥같고 흥미진진하였다. 사회파 미스터리가 가장 붐이던 시대에 만들어진 세이초 문학의 원형들이 담긴 <잠복>, 이후엔 어떻게 작품들이 발전하는지 계속 세이초를 탐닉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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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여행 - 루벤스의 스페인에서 고갱의 타히티까지
요아힘 레스 지음, 장혜경 옮김, 김소희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예술가의 여행] 화가의 여행에서 엿볼 수 있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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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열세 명 화가들의 여행기가 있다. 서유럽 출신이란 공통점이 있고 더러 여행지가 겹치기도 하지만, 국적도 시대도 다른 이들의 여행이다. 시간적으로는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공간적으로는 멘체스터에서 영국까지 굉장히 광범위하다. 하지만 재주 있는 작가는 재치 있는 문장과 많지 않은 분량으로, 13명을 네 가지 주제로 나눠 우리를 안내한다. 화가의 여행에선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이 책의 주 주제인 미술사적 측면에 있어서 화가의 여행은 후원의 역학관계, 미술 양식의 변화, 화가에 대한 배경 지식 등을 알 수 있고 미술사 연구에서 점점 관심이 높아지는 주제라 한다.

 

 

하지만 어떤 독자에겐 이 책이 탁월한 경제경영서로 보이기도 하고, 정치·사회학 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예술가의 여행>은 독자의 관점과 관심분야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읽고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하고, 그 다양한 면들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프루스트의 말을 인용한 이 책의 제사처럼 우리가 책 제목을 보고 주로 떠올릴 여행의 낭만이나 여행이 창조적 영감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은 오히려 가장 안 느껴진다. 한편 <예술가의 여행>은 저자가 서문을 완전한 서평 한 편처럼 썼다(다른 이들이 굳이 서평을 쓸 이유를 못 느낄 만큼). 그래서 목차대로 책의 기본 내용을 숙지하려거나 쇼핑 중이라면 다른 정보 찾지 말고 저자 서문을 꼼꼼히 읽어보길 추천한다.

 

 

화가의 여행은 서유럽 수공업자의 천명에서부터 출발한다. 장인과 도제로 상징되는 중세 서유럽의 길드 시스템에서 수공업자들에게 여행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고 공부였다. 대를 이어 장인이 되는 데 있어, 아버지께 전수 받고 거주 지역의 기술을 습득하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타 지역의 새로운 기술을 배우면서 자신의 기술과 융합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화가도 넓은 의미로 보면 일종의 수공업자다. 자본(후원)이 결합하면서 화가의 여행은 도제수업·장인수업 차원을 넘어 규모와 목적이 확장된다. 16세기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브랜드화를 알았다. 단순한 이니셜 모노그램에 불과했지만 작품마다 붙인 AD는 자기 작품의 상품가치를 높였다. 그리고 뒤러의 성공적인 마케팅엔 영리하고 수완 좋은 아내의 역할이 컸다.

 

 

예술과 외교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한 화가도 있었다. 루벤스는 벨기에와 이탈리아·스페인·영국을 돌아다니면서 외교사절로서 충실하면서 귀족들에게 안정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도 할 수 있었다. 왕과 교황의 미묘한 신경전 사이에서 누구도 불쾌하지 않게 현명한 처신을 한 베르니니도 있다. 홀라르의 사례로 보듯 예술가의 외교활동은 정치적으로 왕과 귀족에 가깝게 접근하면서 훌륭한 예술자문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흔히 전쟁은 이동의 자유를 위협한다고만 생각하지만 기회가 되기도 한다. 루벤스나 벨리니, 홀라르의 여행은 전쟁 시기와 맞물려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라 비판할 사례들도 있지만, 동방문화 탐방을 통해 이질적인 문화를 습득하면서 서유럽의 미술을 더욱 풍부하게 한 화가들도 있다. 술탄 사망 후 오스만과 벨리니 모두 체류의 증거를 없애려 했을 만큼 위험한 동거였지만, 술탄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밑에서 일하며 오스만 문화와 미니아튀르 회화를 접한 벨리니는 독특한 화풍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살아 있는 고대를 체험하고 싶었던 들라크루아는 아프리카로 눈을 돌려 알제리와 모로코 여행을 통해 자신의 이상과 판타지를 한껏 탐구했다. 이국과 그 문화에 대한 화가들의 호기심은 에크하우스·메리안·호지스·고갱·놀데처럼 대륙을 뛰어넘어 남태평양이나 남미로 떠나는 것으로 발전한다.

 

 

<예술가의 여행>을 읽으면 읽을수록 인류 역사에 있어 화가의 기여에 놀라게 된다. 화가는 신분은 높지 않지만 직업적 특성 때문에 여러모로 특수한 계층이었다. 화가는 산업과 과학기술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사진이 없던 시절, 화가는 없어선 안 될 중요한 기록가였다. 그래서 각종 탐사에 참여 했고 식견이 상당했던 인물도 많다. 싱켈과 호지스는 유럽에 새로운 인종들의 모습을 그려 전했고, 메리안은 곤충 그림을 그리다가 당시 과학자들보다 곤충에 대해 훨씬 정확하게 알았다. 인류가 남극을 발견하는 순간에도 화가가 있었다(호지스). 누구도 생각지 못한 제안을 하면서 독일에 근대적 박물관이 생기는데 기여했던 싱켈은 영국의 공장 건물을 스케치하며 새 시대의 꿈을 꿨다.

 

 

여성 문제에 있어 미술이 다른 분야에 비해 훨씬 진보적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6세기 뒤러의 아내 아그네스가 미술상으로서 능력을 발휘했다면 17세기의 메리안은 직접 화가 활동을 한다. 미술가 집안에선 원한다면 딸도 미술을 배우고 관련 일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개척 시대 설탕이 아닌 곤충을 찾는다고 조롱받았고 그녀의 그림책은 여자들의 자수 취미 관련으로 소비되었지만, 메리안은 수리남으로 떠나 화폭 가득 자신이 좋아하는 곤충들의 면면들을 담았다. 18세기의 카우프만의 사정은 더 낫다. 이탈리아에서 볼로냐와 피렌체의 미술아카데미 회원을 거쳐 영국 왕립 미술아카데미 창립 멤버가 된다. 10살 이상 어렸던 난네를이 피아노 잘 치는 소녀로 그쳤던 것과 달리, 카우프만은 자신이 가능한 최선의 상업적 성공을 이루고 화가로서 입지를 세운다.

 

 

글로벌 시대를 사는 우리들보다 훨씬 이동이 힘들었던 옛날 사람들이 더욱 글로벌하게 세계를 종횡무진하는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니 자괴감이 확 치밀며 골이 난다. 0.5초 만에 역사에 남은 비범한 인물들의 얘기니까 그런다고 합리화해본다. 참고로 <예술가의 여행> 한국판엔 원서에 없는 것이 있다. 감수자인 카이스트 김소희 교수(미술사학 전공)가 각 부가 끝날 때마다 ‘김소희의 예술가 이야기’라는 추가 해설을 달아놓은 것이다. 짧은 글이지만 책에 실린 화가들을 좀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책의 맨 뒤에 ‘더 읽어보면 좋은 책’을 적어놓았긴 한데, 전부 독일어 원서라(번역된 책이 하나도 없는 걸까) 많은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

 

 

히사이시 조는 다양한 경험의 중요성에 대해 크게 환상을 품지 말라고 했다. 누구나 하는 경험은 인간의 폭을 넓혀주지 않는데, 남과 차별화되는 특별한 경험하기가 생각 이상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가장 쉽게 단시간에 경험의 양을 늘릴 수 있고 가장 쉽게 특별한 경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평소의 일상과 공부를 통해 배우고 느끼지 못한 것들을 사소한 여행 한번에서 얻을 수 있고, 여행을 많이 할수록 시야나 사유가 넓고 깊어진다. <예술가의 여행>은 여행이 얼마나 다양한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또 결코 어려운 책은 아니지만 암묵지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아는 만큼 보이는 책이다. ‘화가의’ 여행을 다룬 ‘미술’서적이지만 읽으면서 여행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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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원리 - 개정증보판
차동엽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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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지개 원리-2012전면개정판]

5년을 다지고 다시 한국판 탈무드를 향하여

 

 

 

 

작년 이맘때쯤 <무지개 원리>를 읽었다. 출간된 지 4년, 이미 100만부 넘게 팔린 시점이었으니 뒤늦게 독자에 합세한 셈이다. 초판과 스마트버전, 명사편을 읽었는데 스마트버전은 초판을 판형을 달리하고 좀 더 예쁘게 편집한 것일 뿐 같은 내용이라 지인에게 선물하였다. 내 책도 아니면서 말이다. 평소 누가 책을 갖고 싶다고 하면 스스럼없이 주는 편이긴 하지만, 특히 <무지개 원리>는 책을 읽고 난 후 남과 나누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 그것도 무지개 원리를 실천하는 한 방법이라고 말이다. 뒤늦게 책 주인인 어머니께 양해를 구하며, 이러한 얘기를 꺼냈더니 어머니께서도 흔쾌히 수긍하시며 잘했다고 하셨다. 하지만 잠깐 후회하기도 했다. 초판이 잦은 대여와 책 주인의 행태 영향으로 잔뜩 낡아 만지기 조심스러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달 말 출간 5년 차를 맞아 <무지개 원리-전면개정판>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다. 그리고 어버이날을 핑계로 어머니께 깜짝 택배를 보냈다. 그런데 차 신부님의 팬인 어머니의 반응이 생각만큼 좋지는 않았다. 읽은 책인데 <잊혀진 질문>이나 <땡큐 365> 같은 걸 사오지 그랬냐면서 단순히 편하게 읽을 수 있는 튼튼한 책이 새로 생긴 정도로만 여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새 책을 읽으면서 그런 소리가 쏙 들어갔다. 아마 다른 많은 독자들도 이런 반응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보통 개정판이라고 하면 판형과 디자인을 바꾸고 새로운 장들을 추가하는 정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무지개 원리-전면개정판>은 흔치 않은 전면개정판다운 책이다. 당장 목차만 봐도 가늠해볼 수 있는데, 구판과 대조할 엄두가 안 날만큼 구성 자체를 완전히 뒤집으며 기존 내용과 증보 내용을 어울렀다.

 

 

 

 

<무지개 원리>는 상당히 고무적인 책이었다. 첫째는 주로 미국과 일본 번역 책 위주인 자기계발서 시장에서 토종 자기계발서로 150만부 넘게 판매하며 우리 자기계발서 시장에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종교인이 썼고 사목적 성격이 강한 자기계발서가 종교를 초월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두루두루 지지를 얻었다는 점이다. 기독교에선 성소공동체를 강조한다. 종교 부흥을 위해 교인을 관리하고 함께 신앙을 나누며 믿음을 발전시키려는 이유도 있지만, 자살·우울증·왕따 등 점점 사회문제가 증가하는 세태에 대응하여 종교의 기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옥간다, 파면이다 등 무조건적 교리 강요와 협박이 아니라 체계적인 상담·치료·안식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책을 출간하면서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요즘의 기독교 추세다. <무지개 원리> 역시 다분히 그런 성격이 강한 책이다.

 

 

 

 

하지만 논의의 기초를 유대교에서 가져온다는 점이나 하는 일마다 잘되고 스스로 팔자를 고친다는 등의 한국인을 혹하게 하는 주제들이 기존의 외국 자기계발서와 종교계 자기계발서와 차별되고 생각보다 거부감이 적은 이유인 듯싶다. 그러나 5년이 지났고 그만큼 세상도 변했다. 우리나라 자기계발서 시장이 급격히 커진 계기가 IMF 구제금융 때문이라 한다. 지난 15년간 공부 안하면 죽고, 돈 많이 벌어 성공해야 하고,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되고 하는 등의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짓눌렀고 우리 역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처세다 치유다 자기계발이다 하며 열광했다. 그에 대한 허무감과 저항감의 발로로 인문학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경제경영서나 자기계발서도 인문학과 접목하며 진화하였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미국이 주도했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긍정론이 도전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여러모로 <무지개 원리-전면개정판>은 영리한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에 새롭게 삽입된 에피소드들의 상당수가 최신이고 구판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고 공고히 한다. '셰마 이스라엘'에서 출발하고 7가지 원리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종교적 색채는 더욱 줄이고 일상적인 측면을 강화한다. 저자가 짚는 무지개 원리의 포인트는 3원리와 4원리고, 기존의 자기계발서와 <무지개 원리>의 차별점을 서술해놓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낀 이 책의 차별점은 6원리와 7원리의 실천 강조에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도 그런 점을 의식하기에 누구나 만사형통할 수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에겐 해당하지 않는다는 얘기들을 전면개정판에 추가하지 않았을까.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가 없다. 자기계발을 동반하지 않는 자기계발서 독서는 그저 잠깐 자극을 주고 휘발되는 책뽕(마약)일 뿐이다.

 

 

 

 

‘무지개 원리’는 지키기 힘든 거창한 이상도, 혜성처럼 등장한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무지개 원리’가 내재하고 있다. 다만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무지개 원리>는 조력자 역할이다. 유대인들이 ‘셰마 이스라엘’을 입 밖으로 계속 외는 이유는 자각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한편 <무지개 원리>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한국판 탈무드가 되는 것이란 점에서 이번 전면개정판 역시 과제가 남는다. 이번 책은 변화하는 세태에 맞춰 시사성 있게 내용을 보완하고 전체 내용을 다진다는 의의는 있다. 하지만 탈무드가 수천 년을 내려오며 어느 시대 어느 사람에게나 통하듯 <무지개 원리> 역시 그런 책이 되려면 굳이 개정할 필요가 없는 탈 시대적인 예시와 서술들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5년 만에 나온 <무지개 원리-전면 개정판>은 앞으로의 도약을 향한 디딤돌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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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2 버지니아 울프 전집 1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출항1,2] 나비, 바다를 딛다

 

 

 

 

 

 http://der_insel.blog.me/120160562721

 

수심을 모르는 나비는 바다가 무섭지 않다. 스물넷 아가씨 레이첼에게 산타마리나행 출항은 전아가 뒤흔들리는 충격이었다. 가정교사에게 수업 받고, 자수나 피아노 연주 같은 취미를 갖고, 가끔 집 근처를 산책하는 등 조신하게 자라다가 결혼하는 것이 당대 귀족 딸들의 삶이었다. 딱히 교우도 없는데다 아버지와 고모들의 과보호 속에 자란 레이첼은 더욱 세상과 사람에 무지하였다. <출항>은 버지니아 울프의 첫 장편소설로, 주인공 레이첼에게 자신을 많이 투영했다. 10번을 넘게 고치며 무려 11년에 걸쳐 완성한 <출항>, 처음 쓸 때 레이첼 또래였고 역시 미혼이었던 작가는 30대의 주부가 되어서야 레이첼을 놓을 수 있었다. 레이첼을 통해 그녀는 어떤 꿈과 생각을 담았던 걸까.

 

 

울프의 문학적 관심은 인간 내면 심리와 육체적 고통, 새로운 시도, 여성 해방 등이었다. 그러나 재밌게도 울프는 작정한 이 역작을 가장 트렌디한-당시 유행하던 가정/연애/여행 소설-방법으로 풀어간다. 데뷔작부터 대놓고 파격이 아니라 기성 문학의 틀 안에 본의를 삽입하며 은근한 변형을 꾀하는 전략적 타협을 한 것이다. 순진무구한 귀족 아가씨의 해외여행과 로맨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에 엘리트와 보헤미안이 한꺼번에 덤비는 삼각관계까지 <출항>의 외형은 완벽한 연애소설이다. 하지만 전개 과정과 결말 처리, 세밀한 레이첼의 심리 묘사, 레이첼과 환경(주변 인물) 간의 대비를 통해 작은 혁명을 도모한다. 그래서 <출항>은 연애소설이면서 성장·계몽소설이기도 하다.

 

 

<출항>의 배경이면서 울프 문학 세계의 기저인 빅토리아 시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울프는 양 대전이 관통하는 시기에 작품 활동했던 현대 작가이다. 하지만 스무 해 가까이 빅토리아 시대를 경험했고, 시대의 흔적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앞서 말한 <출간> 당시 문학 트렌드는 빅토리아 시대 문학의 여전한 유행이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 제국주의 시대의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가장 풍요롭고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이 시대가 아이러니하게 영국 역사상 가장 보수적이고 여권은 퇴보했던 시절이다. 활동은 더 제한되고 부인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며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남성 작가로 위장해야 <제인 에어>나 <워더링 하이츠> 같은 ‘위험한’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시대, 수많은 여성들이 자살했다.

 

 

열세 살부터 죽을 때까지 울프를 괴롭혔던 정신병, 발병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지만 여섯 살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가족사가 깊은 트라우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후기 빅토리아 시대와 일치한다. 울프에게 빅토리아 시대는 온 몸에 새겨진 모순과 고통의 기억이고 문제의식의 시작이었다. 작가로서 커리어의 시작인 <출항> 집필에 들어가는 때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인 것은 과연 우연일까. 윌로우비에서 체일리까지 <출항> 속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각각 시대의 편린들을 담고 있다. 인물의 관념성이 강하기 때문에, 레이첼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레이첼의 단계별 게임 퀘스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출항>은 무밭을 찾아 바다를 딛는 나비의 날갯짓 같은 소설이다.

 

 

서평으로 문예 활동을 시작했던 울프는 20대 초반에 이미 독서 편력이 상당한 상태였다. 170여 개의 역자 각주의 대부분이 책 얘기일 정도로, <출항>에서 울프는 책들의 나열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울프 문학의 지향점과 대척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레이첼은 여자이기 때문에 고등 지식은 배울 수 없다. 독서도 소설책이나 사교생활에 지장 없는 정도의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랬던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그녀가 내적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되는 책은 입센의 희곡들(정신적 각성)과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지적 성숙)다. 그러나 주변인물들이 그녀에게 권하는 책은 제인오스틴, 이유는 ‘남자처럼 글을 쓰지 않아 영국의 가장 위대한 여성 작가’이기 때문이다.

 

 

레이첼은 자신에 대해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이성의 뻐꾸기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리처드에게 기습 키스를 당하고 나서도 그 느낌이 어떤지 상대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 모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생각들을 정리하고 벌벌거린다. 그래서 레이첼의 첫사랑이 더욱 특별하게 보인다. 산타마리나에서 레이첼은 두 남자를 만난다. 허스트는 스물넷에 집안 좋고 똑똑한 완벽남이고 그녀에게 기번을 알려주지만 당대 남성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스물일곱에 700파운드의 연 수입으로 글 쓰며 지내는 소설가 지망생 휴잇은 자유분방하고 양성적인 독특한 인물인데 여권 등 여러 면에서 레이첼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끌린다.

 

 

그러나 환상적 동지가 되겠다 싶은 기대와 달리 레이첼과 휴잇의 사랑은 ‘무서움’, ‘고통’ 등의 단어로 표현된다. 그들의 관계와 연애는 대단히 기괴하고 특이하다. 두 남녀는 끔찍하게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 도망치려 하고, 끊임없이 생각을 나누고 스스로 고민하며 확인과 혼란을 반복한다. 조력자(헬렌)의 도움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각성하는 봉건 여성 레이첼은 이 단계부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한계는 결말을 통해(자기의지는 아니지만) 더욱 분명해진다. 물결에 전 나비는 지치고 시리다. <출항>의 결말은 울프가 고집했던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현실성 있고 여운이 있지만, 울프도 레이첼도 이 여자들은 왜 이렇게 아플까 일호 부아가 난다(현실의 울프는 공교롭게도-작품 때문은 아님- <출항> 집필 전후 모두 자살을 기도한다).

 

 

울프 문학을 3기로 나눴을 때 초기와 말기는 기존의 전통적 소설 특성이 강하고 문학성으로도 대표작에 비해 저평가 받는다. 그런 점에서 <출항>은 울프 소설 중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의식의 흐름 등 울프 특유의 문체와 기법이 <출항>에서 엿볼 수 있지만 개성이 강하지 않고 구성과 전개도 평이하다. 다른 울프 소설처럼 <출항> 역시 작품의 매력은 문장에 있다. <출항>의 스토리텔링과 인물 설정은 너무나 전형적이고 단순하다(비슷한 장르를 썼던 앞선 시대 작가들의 작품보다 퇴보한다). 번역은 역자가 울프 전공자답게 크게 거부감 없으면서 영어와 울프 문체의 특성과 늬앙스를 잘 살린 편이다. 문장 감상에 더욱 주력하도록 돕기 위함일까, 솔은 친절하게 책 뒤에 등장인물을 전부 정리해(때문에 스포일러 피해가 있지만) 독자의 수고를 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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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1 버지니아 울프 전집 1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출항1,2] 나비, 바다를 딛다

 

 

 

 

 

 http://der_insel.blog.me/120160562721

 

수심을 모르는 나비는 바다가 무섭지 않다. 스물넷 아가씨 레이첼에게 산타마리나행 출항은 전아가 뒤흔들리는 충격이었다. 가정교사에게 수업 받고, 자수나 피아노 연주 같은 취미를 갖고, 가끔 집 근처를 산책하는 등 조신하게 자라다가 결혼하는 것이 당대 귀족 딸들의 삶이었다. 딱히 교우도 없는데다 아버지와 고모들의 과보호 속에 자란 레이첼은 더욱 세상과 사람에 무지하였다. <출항>은 버지니아 울프의 첫 장편소설로, 주인공 레이첼에게 자신을 많이 투영했다. 10번을 넘게 고치며 무려 11년에 걸쳐 완성한 <출항>, 처음 쓸 때 레이첼 또래였고 역시 미혼이었던 작가는 30대의 주부가 되어서야 레이첼을 놓을 수 있었다. 레이첼을 통해 그녀는 어떤 꿈과 생각을 담았던 걸까.

 

 

울프의 문학적 관심은 인간 내면 심리와 육체적 고통, 새로운 시도, 여성 해방 등이었다. 그러나 재밌게도 울프는 작정한 이 역작을 가장 트렌디한-당시 유행하던 가정/연애/여행 소설-방법으로 풀어간다. 데뷔작부터 대놓고 파격이 아니라 기성 문학의 틀 안에 본의를 삽입하며 은근한 변형을 꾀하는 전략적 타협을 한 것이다. 순진무구한 귀족 아가씨의 해외여행과 로맨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에 엘리트와 보헤미안이 한꺼번에 덤비는 삼각관계까지 <출항>의 외형은 완벽한 연애소설이다. 하지만 전개 과정과 결말 처리, 세밀한 레이첼의 심리 묘사, 레이첼과 환경(주변 인물) 간의 대비를 통해 작은 혁명을 도모한다. 그래서 <출항>은 연애소설이면서 성장·계몽소설이기도 하다.

 

 

<출항>의 배경이면서 울프 문학 세계의 기저인 빅토리아 시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울프는 양 대전이 관통하는 시기에 작품 활동했던 현대 작가이다. 하지만 스무 해 가까이 빅토리아 시대를 경험했고, 시대의 흔적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앞서 말한 <출간> 당시 문학 트렌드는 빅토리아 시대 문학의 여전한 유행이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 제국주의 시대의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가장 풍요롭고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이 시대가 아이러니하게 영국 역사상 가장 보수적이고 여권은 퇴보했던 시절이다. 활동은 더 제한되고 부인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며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남성 작가로 위장해야 <제인 에어>나 <워더링 하이츠> 같은 ‘위험한’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시대, 수많은 여성들이 자살했다.

 

 

열세 살부터 죽을 때까지 울프를 괴롭혔던 정신병, 발병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지만 여섯 살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가족사가 깊은 트라우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후기 빅토리아 시대와 일치한다. 울프에게 빅토리아 시대는 온 몸에 새겨진 모순과 고통의 기억이고 문제의식의 시작이었다. 작가로서 커리어의 시작인 <출항> 집필에 들어가는 때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인 것은 과연 우연일까. 윌로우비에서 체일리까지 <출항> 속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각각 시대의 편린들을 담고 있다. 인물의 관념성이 강하기 때문에, 레이첼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레이첼의 단계별 게임 퀘스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출항>은 무밭을 찾아 바다를 딛는 나비의 날갯짓 같은 소설이다.

 

 

서평으로 문예 활동을 시작했던 울프는 20대 초반에 이미 독서 편력이 상당한 상태였다. 170여 개의 역자 각주의 대부분이 책 얘기일 정도로, <출항>에서 울프는 책들의 나열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울프 문학의 지향점과 대척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레이첼은 여자이기 때문에 고등 지식은 배울 수 없다. 독서도 소설책이나 사교생활에 지장 없는 정도의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랬던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그녀가 내적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되는 책은 입센의 희곡들(정신적 각성)과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지적 성숙)다. 그러나 주변인물들이 그녀에게 권하는 책은 제인오스틴, 이유는 ‘남자처럼 글을 쓰지 않아 영국의 가장 위대한 여성 작가’이기 때문이다.

 

 

레이첼은 자신에 대해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이성의 뻐꾸기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리처드에게 기습 키스를 당하고 나서도 그 느낌이 어떤지 상대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 모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생각들을 정리하고 벌벌거린다. 그래서 레이첼의 첫사랑이 더욱 특별하게 보인다. 산타마리나에서 레이첼은 두 남자를 만난다. 허스트는 스물넷에 집안 좋고 똑똑한 완벽남이고 그녀에게 기번을 알려주지만 당대 남성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스물일곱에 700파운드의 연 수입으로 글 쓰며 지내는 소설가 지망생 휴잇은 자유분방하고 양성적인 독특한 인물인데 여권 등 여러 면에서 레이첼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끌린다.

 

 

그러나 환상적 동지가 되겠다 싶은 기대와 달리 레이첼과 휴잇의 사랑은 ‘무서움’, ‘고통’ 등의 단어로 표현된다. 그들의 관계와 연애는 대단히 기괴하고 특이하다. 두 남녀는 끔찍하게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 도망치려 하고, 끊임없이 생각을 나누고 스스로 고민하며 확인과 혼란을 반복한다. 조력자(헬렌)의 도움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각성하는 봉건 여성 레이첼은 이 단계부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한계는 결말을 통해(자기의지는 아니지만) 더욱 분명해진다. 물결에 전 나비는 지치고 시리다. <출항>의 결말은 울프가 고집했던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현실성 있고 여운이 있지만, 울프도 레이첼도 이 여자들은 왜 이렇게 아플까 일호 부아가 난다(현실의 울프는 공교롭게도-작품 때문은 아님- <출항> 집필 전후 모두 자살을 기도한다).

 

 

울프 문학을 3기로 나눴을 때 초기와 말기는 기존의 전통적 소설 특성이 강하고 문학성으로도 대표작에 비해 저평가 받는다. 그런 점에서 <출항>은 울프 소설 중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의식의 흐름 등 울프 특유의 문체와 기법이 <출항>에서 엿볼 수 있지만 개성이 강하지 않고 구성과 전개도 평이하다. 다른 울프 소설처럼 <출항> 역시 작품의 매력은 문장에 있다. <출항>의 스토리텔링과 인물 설정은 너무나 전형적이고 단순하다(비슷한 장르를 썼던 앞선 시대 작가들의 작품보다 퇴보한다). 번역은 역자가 울프 전공자답게 크게 거부감 없으면서 영어와 울프 문체의 특성과 늬앙스를 잘 살린 편이다. 문장 감상에 더욱 주력하도록 돕기 위함일까, 솔은 친절하게 책 뒤에 등장인물을 전부 정리해(때문에 스포일러 피해가 있지만) 독자의 수고를 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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