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뱅이 언덕 - 권정생 산문집
권정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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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 동화를 찾아서

소담한 글이 품은 강한 힘과 울림

등단 이후 발표한 산문과 시를 추리고 한 편의 동화를 더한 故권정생의 산문집

 

 

영국의 극작가인 버나드 쇼에게 덴마크의 한 소녀가 편지를 보냈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동화 작가가 될 수 있겠는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쇼는 답장에 이렇게 썼다. “첫째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질 것, 둘째도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질 것, 셋째 역시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질 것”  *본문에도 나오는 구절(p.200)*

 

 

 

어린 내게 동화는 귀한 것이었다. 도서관도 책대여점도 없었다. 부자든 가난하든 어미의 마음은 같아서 자식에게 책을 주려고 어머니는 부단히 발품을 팔았다. 남의 집 잔치에 요리를 해주고 품삯 대신 그 집 아이들의 책을 빌려오고, 이웃네 친구네 놀러갈 때 나를 데리고 가 책을 읽혔다. 나는 어머니랑 보물 찾는 날이 참 좋았는데 폐지 버린 더미에서 책을 주워와 깨끗이 닦는 걸 우린 그렇게 불렀다. 사정을 들은 친척들이 책을 물려주기도 했다. 속이 없어 집안일과 부업에 지친 어머니가 목이 쉬고 입이 부르트도록 밤마다 책을 읽어 달라했고 한권 두권 외우다보니 글씨를 알게 되었다. 까막눈이었을 때부터 책을 볼 수 있을 땐 무조건, 빨리, 많이 보는 게 습관이 된 탓에 유치원에 입학해선 그곳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아무 친구도 안 사귀다가 선생님의 요주의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나는 동화를 읽으면서 글과 세상을 알았고 동화 삽화를 베끼며 미술을 익혔다. 7살쯤부터는 읽을 책이 없으면 동네 애들을 앉혀놓고 되도 않는 이야기를 지어내며 어떠냐고 묻고 다녔다. 나는 말을 안 들으면 발목이 잘리고, 아이들이 할머니를 삶아 죽이고, 못된 계모를 젓갈로 만드는 전래 동화들보다 고운 말로 지금 우리의 얘길 하는 창작동화들을 좋아했다. 이상교, 권정생, 이오덕 등의 동화를 읽으며 그들처럼 누군가를 위해 재미지고 예쁜 글을 쓰는 어른이 되길 꿈꿨다. 그런데 나를 키운 그 많던 동화들이, 꿈을 꾸며 부풀었던 마음이 지금은 어딜 갔을까. 휘발되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잃어버렸다. 별것 없는 잡문의 모음인데 <빌뱅이 언덕>은 끊임없이 기억을 두드리고 가슴을 울리며 나의 상실과 생채기를 일깨워주었다.

 

권정생의 동화와 소설 몇 권을 읽었지만 그의 생애를 관심 있게 찾아본 적은 없었다. 올해는 그의 귀천 5주기이다. 선생은 천상병 시인과 함께 귀천이란 말이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수많은 베스트셀러 동화를 썼지만 한 번도 풍족한 적이 없었다. 마을교회 문간방에서 종지기로 살다가 30년 전에야 강아지 같은 빌배산의 강아지 꼬리 같은 빌뱅이 언덕 아래에 강아지 똥 같은 작은 제집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유언은 인세를 어린이를 위해 써달라는 것이었다. 전쟁과 가난 그리고 때를 놓친 치료로, 스무 살에 얻은 폐렴과 늑막염으로 망가진 몸은 영영 회복되지 않았다. 남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자취 없이 죽을 생각을 했던 젊은이는 세월이 지나 사람의 삶은 수많은 타인에게 신세를 지며 이루어짐을 깨닫지만 그 때의 마음을 모두 잊진 않았던 건지 끝내 가정을 이루지는 않았다.

 

머리말을 읽다가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발상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아찔했다. 여러 출판사가 함께 먹고 살아야 하며 당신의 전집이 나오는 것을 반대했다는 얘기였다. 선생의 뜻을 지키겠다는 재단(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엄밀히 말하면 그의 뜻이 아님에도 굳이 엮어낸 이 책은 어떨지 궁금해져 재빨리 본문으로 책장을 넘겼다. 생전 선생은 산문집을 낼 생각이 없었지만, 여러 잡지에 기고했던 글을 묶어 남의 뜻으로 낸 산문집이 두번 있었고 모두 절판되었다. 세 번째 <빌뱅이 언덕>도 남의 뜻이다. 절판된 두 산문집을 추리고 1975년부터 2006년까지 잡지에 발표했으나 단행본화된 적 없는 글을 재단과 출판사가 새로 찾아 43편의 산문을 담았다. 또 단행본으로 내기엔 분량이 애매했던 시 7편과 동화 1편도 담아 한 권의 책을 꾸렸다. 그래도 채 담지 못하고 남긴 글은 다음을 기약하며.

 

산문은 총 3부로 나누어 1부엔 선생의 자전적 산문들을, 현재의 세태에 대한 성찰을 담은 산문들을 1990년대~2000년대의 산문은 2부에 1970년대~1980년대의 산문은 3부에 담았다. 시와 동화는 부록으로 처리했고, 머리말은 재단 사무처장이자 시인인 안상학이, 책 끝의 발문은 문학평론가 염무웅 교수가 맡았다. 또렷한 기억의 편린이지만 곳곳의 구멍으로 부정확한 사실들은(ex.연도) 각주를 통해 차이를 밝히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겼다. 지배국에 사는 식민지인이 받는 처우와 그들의 생활, 가족을 갈라놓고 인도를 잃게 하고 몹쓸 병을 퍼뜨리는 전쟁과 가난, 어제처럼 추억이 생생해 더욱 그리운 친구와 사랑했던 이, 어여뻐 하는 아이들과의 웃고 우는 일, 그리 순한 성품에도 역성을 들며 비판하는 것들, 쌓이는 인생의 나날만큼 깊어지고 늘어지는 수많은 상념들. 두런두런 선생을 닮은 글에서 선생의 삶과 철학이, 그리고 우리들이 살던 수십 년이 뚝뚝 묻어난다.

 

슬프지만 절망이 없는 이야기, 우리가 겪은 고난이기에 세대를 초월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누구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인간이 인간답고 아이가 아이답길 바라며 쓴 이야기. <빌뱅이 언덕>을 읽으며 나름대로 선생의 동화론을 정리해보면서 무척 공감하였다. 어린 날 이런 동화를 읽다가 할매는, 아저씨는 이랬어하고 물으면 무뚝뚝하고 말주변이 없던 어른들마저 술술 입을 열며 꼬마와 수십 년을 허는 친구가 되었다. 고통스러웠던 경험들이 안주거리 추억이 되고 더 큰 상처도 이겨낼 수 있음은 물론 한마저 사라지는 것에서 나이 듦의 장점, 슬프지 않은 슬픔을 알았다. 아무리 남녀노소 즐길 수 있다 해도 선생의 동화는 역시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면, <빌뱅이 언덕>은 아이를 지나 시간의 켜들을 맞으며 다 커버린 어른들을 위한 책이다. 아이인 적이 있었기에, 귀천한 선생이 산 궤적을 밟으며 매일 늙어가고 있기에 더욱 파고들고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방끈이 긴 자는 자신이 배운 지식으로 이성과 논리에 입각해 사리를 따진다. 이런 이들에게 선생이 전쟁이나 통일 등 시사적인 주제에 대해 쓴 글은 비판할 구석이 여럿 보인다. 그러나 경험과 감정에 입각한 이 주장들을 수준 낮고 그르다고 과연 단언할 수 있을까, 오히려 아는 만큼 눈이 머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한편 새삼 신선했던 점은 20대에 개신교에 귀의한 이래 평생 교회 일을 했던 선생이 경향이나 생활성서 같은 천주교 잡지에 글쓰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나 담임목사부터 개신교 전체까지 조목조목 통렬히 꾸짖는 것이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그 동안 책으로 안 나온 것이 원통할 정도로 빼어난 문학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교가 있는 문장도 아니다. 권정생이란 이름을 지우고 보면 옆집 할아버지가 쓴 것도 같다. 그만큼 평범하고 수수하다. 하지만 염무웅의 표현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내는 가장 맑은 목소리’가 무엇인지 통감하고 읽는 이의 가슴을 알캉이게 하는 힘이 있는 책이다.

   

우리 아동출판의 황금기는 1990년대였다.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표현은 더욱 자유로워졌고 끝없는 호황으로 더욱 여유로워져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더 많고 질 좋은 아동서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만큼 많이 사고 많이 읽었다. 그 혜택을 받은 90년대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거짓말처럼 나라가 파산한다.  돈의 무서움을 온몸에 아로새긴 그들은 신자유주의에 동물처럼 반응하고 수많은 가치를 버리며 살아남기 위해 처절히 경쟁했지만 돌아온 건 88세대니, 3포세대니 하는 낙인이었다. 재산과 경력이 보잘것없고 힘든 것은 20대에 당연한 것인데, 절망에 휘감기며 자라다 벌써 지친 건지 패기도 적고 정말 3포의 유혹을 느끼기도 하고 누가 조금만 위로해줘도 동요한다. 어떤 어른보다 어린 시절 좋은 책을 읽었지만 자라면서 독서가 사치가 되어버린 90년대의 아이들, 하지만 이전 세대가 그랬듯 그들도 대부분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며 동화를 다시 찾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멈출 수 없고 희망을 믿기에. 

 

http://der_insel.blog.me/120170736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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