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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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익숙함과 결별할 때 바로 보이는 진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기원? 대표작은 달랐다
 
세이초는 자신의 추리소설이 사회파라고 불리는 점에 대해서 “사회 구조를 테마로 삼아서 거기에서 비롯된 범죄 등을 써왔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하면서, “사회소설을 쓰는 데 추리소설의 방법을 적용한 것은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그리고 조금씩 진실에 다가가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대담집 <발상의 원점>). 이 말에는 세이초의 추리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가 들어 있습니다. 즉 세이초가 우선 현대사회의 부조리와 그 안에 처한 인간의 삶을 ‘테마’로 잡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추리소설이라는 ‘방법’을 쓰고, 마지막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리얼리티’를 부여합니다. - pp.239~240(역자의 말 中)
작가의 최고 작품은 꼭 연륜(연차)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님을 <점과 선>을 읽으며 또 한번 느꼈다. 물론 <점과 선>을 세이초의 최고 작품이라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1천여 편이 넘는 그의 작품에서 대표작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점과 선>, 읽어보니 왜 그런 평가를 받는지 알 것 같았다. <점과 선>은 1958년에 출간한 소설로 비교적 세이초의 초기작이다(세이초는 1950년 등단). “여행”이란 잡지에 1957년 2월부터 1958년 1월까지 연재했다가 단행본으로 낸 소설인데, 연재 당시에는 같은 시기에 함께 연재했던 <눈동자의 벽>이 훨씬 폭발적인 반응이었고 <점과 선>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식출간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쳤고, 누적판매 500만부를 돌파하며 대표작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또한 <점과 선>은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기원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세정과 통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대중소설의 한계를 세이초는 오히려 문학이 더욱 잘 현실을 반영하고 더 쉽게 대중과 소통하는 강점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점과 선>은 당대를 향한 세이초의 비판의식은 무엇인지, 세이초식 사회파 추리가 무엇인지 살필 수 있는 좋은 견본이다.
 
 
완벽한 사건, 정말 빈틈은 없는가
 
가사이 해변의 동반 자살 사건은 탈도 없고 잡음 하나 없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 흘러갔다. (...) 이 사건에 끼어들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 p.51(본문 中)
미하라는 지쳤다. 그는 벽에 포위되어 있었다. 어느 쪽 벽도 깨지지 않았다. - p.197(본문 中)
해변에서 한 쌍의 남녀 시신이 발견된다. 남자는 비리의혹을 받고 있는 ○○성 과장 대리였고 여자는 요정 여종업원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은 전형적인 불륜지간의 동반자살로 판정하고 심드렁해한다. 유사 이래 이런 류의 동반자살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오토키(죽은 여자)가 낯선 남자와 기차를 타는 것을 본 목격자도 확보되었고 탑승기차, 투숙여관, 이동경로 등 상황 판단도 끝났다. 비리가 밝혀질 것을 두려워한 실무책임자 사야마(죽은 남자)가 애인 오토키를 꼬드겨 함께 음독자살한 사건으로 결론내리고 별다른 추가수사 없이 덮으려 한다. 그러나 관할 형사 도리카이는 수상쩍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성 비리 사건을 수사하다 사야마의 자살 소식을 듣고 의혹을 품은 도쿄 경시청 미하라 경위가 합세해 진실을 찾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혼자만 밥을 먹은 영수증 등 이상한 사실들 몇 개를 발견하지만 사건의 곁가지에 불과하거나 심증만 있지 정확한 물증이 없어 둘은 답답해한다. 아무리 발로 뛰고 머리를 굴려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수사, 철옹성처럼 견고한 시나리오에 농락당하는 기분이다. 정말 숨겨진 비밀은 없는 걸까.
 
 
일상의 해체와 재구성, 훔쳐보고 상상하는 사람들
 
전국의 여러 지방에는 일제히 기차가 정차해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인생에 따라 기차에 타거나 혹은 내린다. 나는 눈을 감고 그런 정경을 상상한다. (...) 나는 지금 이 순간, 여러 고장에서 펼쳐지는 스쳐 지나가는 인생을 한없이 공상할 수 있다. 타인의 상상력이 만든 소설보다도 자신의 공상이 훨씬 흥미롭다. 꿈이 떠다니는, 고독한 즐거움이다. - pp.137~138(본문 中)
‘점과 선’이란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좌표였다. X축과 Y축이 교차된 평면 위에 점들의 궤적이 함수(관계)가 되고, 축이 추가되면 차원이 높아지고 축을 없애면 1차원이 되며, 그 모든 것의 시작이자 기본은 점과 선이다. 세이초도 비슷한 발상인데, 그가 말하는 ‘점과 선’의 1차적 의미는 기차이다. 점(길)과 선(역)으로 이루어진 기차노선표, 그 위의 여정과 사건을 ‘점과 선’이라 단순화하고 추상화시킨 개념으로 짧게 표현한다. 일상을 해체해 낯설게도 보고 상상도 하면서 재구성하는 것이 <점과 선>의 발상이자 감상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흥미로운 인물인 료코가 등장한다. 오토키가 일했던 요정의 단골 다쓰오의 아내로 폐결핵 때문에 병원과 요양을 전전하는 그녀는 소설보다 기차시간표와 노선표 읽는 것을 좋아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점과 선, 숫자의 교차를 보며 가고 싶은 곳을 그려보고 기차 위의 인생들을 상상하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그녀는 평생 엄청난 여행을 했지만 어릴 적엔 가난으로 발이 묶였던 작가의 투영이기도 하고 지금 이 소설을 읽으며 골똘히 추리하는 독자의 투영이기도 하다.
   
 
왜 조직 비리사건의 희생자는 항상 과장 대리급일까
 
과장 대리라는 건 그야말로 실무의 프로. (...) 대신에 출세할 가능성은 없어. (...) 그런 사람들은 상관이 한번 잘해주면 감동하거든. 줄곧 포기하고 있던 출세에 희망이 보이니까, 상관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지. (...) 이번 비리 사건에서도 모든 선이 사야마 과장 대리에 집중돼 있어. (...) 과장 대리들 (...) 사명감에 쉽게 목숨을 버리지. 대형 비리사건에서 자살하는 사람은 꼭 과장 대리급이거든. - pp.186~187(본문 中)
세이초의 소설은 명쾌하다. 콘셉트 하나, 주제 하나, 고발점 하나 등 단출하게 골격을 잡고 기지를 채워가는 식이다. <점과 선>에서 세이초가 주목한 것은 조직의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핵심인사가 아닌 과장 대리급에서 처벌하다 끝나는 불편한 현실이었다. 아닌 경우도 있지만, ‘과장 대리’가 연차는 쌓여 있는데 과장으로 승진하긴 모한 직원들을 위해 만든 허울 좋은 직급으로 만들어놓는 조직이 많은데 <점과 선>에서의 과장 대리에 대한 묘사들을 보면 세이초 역시 그런 부정적 뉘앙스의 ‘과장 대리’를 말하고 있다. 이용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진급의 희망에 몸을 내던지지만, 역시나 총알받이였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도리카이의 고군분투에 미하라가 합류하면서 <점과 선>은 동반자살에만 대한 집중에서 동반자살과 ○○성의 비리가 따로 또 같이 만났다 평행선을 그렸다 하며 이야기가 확장된다. 이러한 소설의 후반부 양상은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휘말리는 개인의 이야기를 추리소설의 방식으로 풀어가는 세이초식 사회파 추리의 양상이자 결말이 가까워 옴을 알리는 신호다.
 
 
익숙함에 눈 멀 때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기차가 교차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필연이지만, 타고 있는 사람들이 공간적으로 교차하는 것은 우연이다. - p.138(본문 中)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점 (...) 저희는 잘못된 선을 그어서 둘을 묶은 것입니다. - p.222(본문 中)
<점과 선>의 트릭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 이 소설의 사건 정답을 푸는 열쇠는 트릭에 집착하기보다 맹점에 눈을 뜨는 것이다. 앞서 ‘점과 선’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기차’를 상징화한 것이라 말하였다. 세이초는 왜 굳이 그런 발상을 했을까, 그저 멋들어진 책 제목을 짓기 위해? 익숙하고 전형적인 관념에 빠져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할 때 눈은 멀기 시작한다. 상식과 신념에 의문을 품을 때, 일상을 해체하고 낯설게 볼 때, 거짓말처럼 답답함이 사라지고 전말이 모두 보인다. 복선을 하나하나 챙겨가며 사건의 조각을 엮을 필요도 없고, 한번만 생각을 틀면 끝난다. 그래서 어떤 이에겐 그냥 작가의 문장을 따라 끝까지 붙을 책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겐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을 알고 보는 소설이기도 하다. 추리하는 재미는 별로 없는 소설, 높이 평가하는 것은 장르적 트릭 기교의 훌륭함보다는 사소한 발상의 전환으로 장편을 이끌어가는 능력 때문이다.  1968년이 있다면 그 10년 전엔 '점과 선의 복합'이 있다. ‘점과 선’의 1차적 의미가 사건의 배경이 되는 기차라면 사건을 풀기 위해 인물과 단서를 나열하고 연결하는 소설 전체가 ‘점과 선’ 자체기도 하다.
  
 
우리식 <점과 선> 특별판
 
<점과 선>의 배경은 도쿄를 중심으로 해서 북쪽으로는 홋카이도, 서쪽으로는 규슈지방에까지 이릅니다. (...) 점과 선에는 수많은 지명에다가 여러 철도 노선까지 등장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모비딕 편집부에서 틀림없이 뭔가 해주실 테니까요. -p.241(역자의 말 中)
반백년 전 외국소설을 오늘의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영화나 드라마로는 알게 모르게 접했지만 정작 원작을 읽어본 적 없는 이들을 위해 세이초월드를 만드는 출판사는 매번 고심했다. <점과 선> 자체도 이미 특별하다. 작가가 소설 중간 중간 강조하고 싶은 구절에 계속 방점을 찍고 노선도와 플랫폼 배치, 시간표들을 삽입했다. 그런데 일본에선 세이초 탄생 100주년을 맞아 분게이슌주에서 새로 낸 <점과 선>이 등장한다. 컬러 삽화가 담은 특별판 개념의 책이었다. 고분샤의 <점과 선> 판권을 산 모비딕판 <점과 선>은 원래 <점과 선>과 그대로 방점과 그림을 옮겼지만 분게이슌주의 컬러삽화는 없다. 대신 27개의 흑백삽화를 새로 넣어 나름 우리식 <점과 선> 특별판 을 만들어냈다. 비교적 짧은 분량으로 세이초의 스타일을 파악하고 싶다면, 방점과 그림이 있는 '조금 특별한' 세이초 소설을 읽고 싶다면 <점과 선>을 읽어보라 추천한다. 한편 <점과 선>은 '점과 선2'로 불리는 <시간의 습속(1962)>이란 속편이 있다. ○○성 비리 사건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도리카이와 미하라가 다시 합심해 새로운 사건을 해결한다고. 이 작품도 모비딕에서 한창 번역 중인데 <점과 선>만큼 재밌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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