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rl Meets Football 그녀, 축구를 만나다 - 여성을 위한 축구 핸드북
이승용.정예은 지음 / 북마크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그녀 축구를 만나다] 정말 dogcow 속성 과외북, 그보다 함의

 

 

 

여러 가지 니즈가 얽혀 집은 책이었다. 물론 글로라도 좋으니 궁금한 축구를 이제는 꼭 알아야겠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사면선비 30, 더 이상은 못 참겠). 대단히 얇게, 그리고 여자들을 위한’ ‘쉬운내세운데다가 월드컵 시즌에 맞춰 기획한 신간이기에 단연 선택 0순위였다. 또래가 쓴 책인데다가, 주저자가 스포츠 마케터라는 점에서 잿밥이 더 탐나서였던 감도 없지 않다. 책장을 펴며, 2009년 졸업을 앞두고 여성마케팅랩에 있던 때를 떠올렸다. 당시 랩에서 활발하게 얘기하던 주제가 여성 야구 마케팅이었다. 앞으로 여성 야구팬은 계속 증가세일 것으로 전망하기에 미리 무기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작가 역시 여성 야구팬 얘기로 운을 떼며 축구로도 시선을 확장해야 한다는 얘기를 한다.

 

정말 기획의도에 충실한 책이다. 축덕인 남친 세윤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 축구를 알려고 고군분투라는 축구문외한 상여자 여대생 새롬이, 그리고 새롬이의 멘토를 자처한 축구여신 동기 빛나와 빛나의 오빠 필승의 속성 과외담이란 콘셉트로 책을 구성하였다. 스토리텔링에 사진도 많고, 전반적으로 여유시간에 잠깐 커피 한잔 하며 잡지 넘기듯 가볍게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한글만 읽을 수 있다면 금붕어도 읽을 수 있는 dogcow(개나소나) 책이다. 알고 봤더니 빛나에겐 나름대로 노력한 역작 축구노트가 있었고, 착한 벗을 둔 새롬이는 날로 먹을 수 있었다. 매우 최소한의 기본 규칙과 등번호의 의미, 주요 축구 리그와 선수 및 감독, 경기 관람이나 쇼핑 팁까지 본문 내용만 숙지하면 당장 방언 터지듯 TV랑 쌍방향 대화 축구 중계할 기세가 되고, 축구커뮤니티를 종횡무진하며 키보드 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어도 남자들 얘기에 끄덕끄덕하며 상냥한 리액션은 가능하다.

 

 

최근 여성 스포츠팬의 숫자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축구 책을 접해 오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바로 축구에 완전히 문외한인 여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 최근 여성 야구팬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모습을 보며 이제 축구도 여성들이 함께 즐기고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입문서 형식의 들고 다니기 좋은 포켓북을 만들고 싶었다. 또한 남성들이 여자 친구나 아내에게 자신의 세계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선물해주고 싶은 책으로 남았으면 한다. (...) 이 책의 집필 목적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축구문화 혹은 지식 전파는 아니다. 그보다는 남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축구지식 축소판에 가깝다. - 머리말

 

나 역시 이게 여성들의 축두에 대한 지식수준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그녀들에게는 여전히 잘생긴 선수가 관심 1순위일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선수보다 연예 뉴스에서 접할 수 있는 유명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현실이었다. - 머리말

 

남자에게 축구는 자신만의 왕국이었다. 남성들에게 축구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하나의 배출구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축구 하나로 말이 통하는 것을 보면 그저 대단하다. 그래서인지 남성들은 축구로 더 대동단결하고 문을 굳게 걸어 담근 뒤 다른 이들, 특히 여성의 존재를 얼굴만 보고 좋아하는 얼빠일거야라는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 (...) 축구가 의외로 여성들이 남성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는 매개체라는 사실이다. (...) 밤낮과 주말 안 가리며 축구에 죽고 못 사는 남성들이 한심해 보일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관점의 전환, 터치 포인트이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고, 한발 안으로 들어가 축구를 바라보라. 축구 하나로 이전에 알지 못했던 남성들의 심리를 꿰뚫을 수도, 또 그들과의 유대감이 쉽게 생길 수도 있다. 남성들이 왜 축구, 축구 하는지 그 이유를 안다는 사실 하나로 당신은 이미 (남성들 사이에서)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여성 중 한 명이 되어 있을 것이다. - 에필로그

 

내가 정말 이 남자를 사랑한다면 축구가 뭔지 한 번 알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p.18)

 

그녀는 학교 내 밴드에서 보컬을 하는 등 굉장히 활발한 스타일로 늘 주변에 남자가 많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특정 짓는 이미지 중 하나는 축구였다. 빛나는 한국대 공대 내에서 축구여신으로 불린다. 가끔 학과 친구들과 밥을 먹으러 가도 항상 그녀는 남자들과 축구를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내가 다른 여자애들과 다른 얘기를 할 때도 그녀는 늘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독차지하며 축구얘기 하나로 여신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p.20)

 

남자에게 축구는 정말 접근이 가장 쉬운 아이템이야. 자동차처럼 돈이 많이 들지도 않고 여자처럼 자기 의지대로 사귀고 헤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 몸을 움직이고 뭔가 에너지를 분출하고 싶은 남자 몇 명이 공 하나만 있고 넓은 공간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축구거든. 또 중고등학교 때 학교 운동장에서 하기 제일 만만한 게 축구, 농구 이 정도인데, 체육시간에 나가서 공 하나 던지고 20~30명 집중시키기에 이만한 게 없지. 이때부터 축구에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어. 모든 남자가 축구를 좋아하진 않겠지. 단지 축구가 가장 보편적으로 어릴 적부터 다가가게끔 되어 있단 얘기야.(p.29)

 

여자가 축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렇지 않은 여자보다 더 좋아한다고 볼 수는 없어. 아까 빛나가 말한 대로 축구는 남자들의 세계라는 관념이 좀 있어. 그래서 축구에서도 여성은 약간 소비되는 느낌이지 같은 팬층으로 취급하지는 않아왔던 것 같아. 그런 거 보면 확실히 남성들이 축구와 자신들을 더 동일시하는 것 같아. 그래도 한편으로는 축구팬 남성들의 로마이 바로 축구 좋아하는 여자야.(p.34)

 

남자들은 축구 좋아하는 여자들에 대한 환상이 있어. 자신이 응원하는 팀 레플리카를 입은 여자를 보면 눈에서 하트가 자연스럽게 나오지. 남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지. 하지만 여자가 너무 많이 축구를 아는 것보다는 적당한 수준에서 축구를 알아서 남자의 문화를 이해해 주는 수준이 더 좋다고 봐.(p.44)

 

<그녀, 축구를 만나다>23초 젊은 부부가 쓴 책이다. 짐작하듯 당연히 남편이 열혈축구매니아이자 대기업 스포츠 마케터이고, 제약회사에 다니는 아내는 축구의 축도 모르고 군대-축구-군대에서 한 축구 남성3단레파토리를 싫어하는 전형적인 한국여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랐고 유용했던 것은 의외로 축구지식보다 남자가 원하는 축구 좋아하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책의 초반부에 주로 언급되긴 하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의식이다. 이 책의 본질은 주제(축구 속성 과외)가 아니라 함의(남성의 니즈 어필)였다. 복잡하고 은근하게 돌려 말하는 건 여자만의 언어습관이라고 생각했던 내겐 다소 충격적이었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측은하기도 하였다. 얼마나 한국여자는 한국남자들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던 걸까, 이해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거의 하지 않고 사는구나 싶었다.

 

요약하면 축구에 있어 남자가 찾는 여자는 동료가 아니라 해어화이다. 아무리 양성평등하고 싶어도 여자가 손님으로 비즈니스 접대에 끼는 등 남자들이 하는 것 다 하려고 하다간 미친년 취급받으며 양성 모두에게 매장 당하, 축구 역시 남자들만의 동성 유니티 성격이 강한 영역이란다. 축구지식과 뉴스를 다 꿰고 있고 술술 말하는 같이 오타쿠질을 할 광팬보다는 언제 어디서 축구를 봐도 이해해주고 안주나 아이템을 챙겨주는 센스가 있고 축구 얘기에 눈 반짝거리며 잘 들어주는 여자가 남자들이 원하는 축구 좋아하는 여자였다. 화룡점정은 축완얼, 차처럼 같이 응원 다니면 폼 나는 예쁜 여자면 금상첨화이다.

 

원하는 지식 습득 때문에 집었다가 남자들의 적나라한 니즈까지 알고 갈 수 있어 횡재한 기분이었지만 한편으론 야구나 농구 등 다른 스포츠 종목보다 팬질의 진입장벽이 쎄겠구나 싶어 씁쓸하였다. 또 으레 여성들은 그렇다며 자꾸 누가 잘생겼고 타령만 줄창하는 작가에게 화를 내고 싶다가도, 이러한 주장과 시선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맞다, 순도100% 종목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여자가 축구에 빠지기는 정말 쉽지 않다. 얼빠나 이성 때문에 축구를 공부하고 좋아해보겠다는 게 나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책의 카피처럼 씨날두만 알았다고 끝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본 포메이션이나 언제 어떤 경기를 어떻게 보고 즐겨야 하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했던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시작은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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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너머 1318 그림책 2
이소영 글.그림 / 글로연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림자 너머] 나는 나의 주인공 : 빛을 찾아 떠난 머리=몸=마음의 여행
 
 
 
어디로 가는 걸까, 다들 뭐 하는 거지? 난 무얼 하고 싶은 걸까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기분이 들 땐,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 보는 거야. 그림자 너머.
 
- 본문 中
 
언젠가부터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에서 우리 작가의 수상 소식들이 속속 들리기 시작하였다. 매년 번역서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우리나라는 현재 출간되는 책 10권 중 4권이 번역서이다. 매출순위 상위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동 및 학습서 출판사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은 가운데,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사랑 받는 작가들이 계속 등장한다는 것은 매우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2014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 수상작들이 한창 출간 중인 요즘,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된 우리 작가 이소영의 책 역시 출간되었다. 제목은 <그림자 너머>, 삽화 전부를 실크스크린으로 작업한 이 그림책에 빠져 있노라면 괜찮은 현대미술 전시회에 다녀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많은 색을 쓰지 않음에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삽화의 색감들과 거칠고 단순한 듯 보이지만 주제의식은 뚜렷한 그림, 그리고 그 그림과 어우러지는 스토리텔링에 한없이 빠져들고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나는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마음
손해 보지 않고 빨리 갈 수 있는 마음
너 없이는 허전해서 살 수 없는 마음
너를 더 열심히 살게 하는 마음
- 본문 中
 
몸통이 없는 머리가 머리가 없는 몸통을 만나러 간다는 <그림자 너머>의 기본 아이디어는 쉘 실버스타인의 <The Missing Piece(국내에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를 떠올리게 한다. 주목할 것은 머리와 몸통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마음’인데 작가는 이것이 뇌(머리)의 영역이 아닌 심장(몸통)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적·감성적 발상이므로 이에 대한 신경생리학적 오류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머리가 굵어진다’는 표현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는 타인과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에 맞춰 성장하는 것을 ‘머리’의 세계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나’를 깨닫기 위해, 마음의 소리를 듣기 위해 ‘몸(통)’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에게 마음을 품은 ‘몸(통)’이 ‘참자아’이다. 그래서 책 속에서 머리와 달리 몸통은 가슴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대부분의 그림책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가끔 성인을 위한 그림책이 나온다. 하지만 경계인인 청소년을 위한 그림책은 많지 않다. 장르 특성상 웬만한 그림책들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청소년 대상으로 한정할만한 특별한 주제가 거의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림자 너머>는 독특하게도 청소년을 위한 그림책이고 이 책을 낸 글로연에서 기획한 1318그림책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그러나 <그림자 너머> 역시 청소년 도서들이 주로 다루는 자아 찾기나 정체성 고민의 주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다만, 이런 주제와 타깃의 ‘우리’ ‘그림책’이 많지 않았다면, 개척자의 차원에서 충분히 존재 가치가 있다.
 
 
예전에 우린 같은 곳에서 함께 세상을 바라봤어
언젠가부턴가 너의 커지는 생각이 나를 작아지게 했지
커진 네 그림자 속에서 내 빛도 점점 희미해졌어
 
내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찾은 너
수많은 너의 마음들을 지나 찾아온 너
그리고 점점 자라나는 너
한층 더 환한 너
 
- 본문 中
 
<노자(도덕경)>에 ‘知人者智 自知者明’란 표현이 나온다. 남을 아는 것을 지혜라 하고 자신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는 말인데 이 밝음(明)이란 개념이 <노자>를 관통하는 明道, 도를 깨우쳐 환함(혹은 그런 사람)이다. <그림자 너머>의 결론을 보며, <노자>를 떠올렸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남의 시선과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세상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그림책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청소년 뿐 아니라, 인간이 평생 안고 가야 할 고민일 것이라고 말한다. 수상 사실만으로도 믿고 가는 삽화의 매력, 그것이 담은 철학적 메시지까지, 청소년 대상이지만 다른 연령대에서도 충분히 공감하고 빠질만한 그림책이다. 책 끝에 부록 성격으로 담은 실크스크린 작업기나, 띠지 뒤의 미니갤러리도 확인해보길, 특히 작가의 에필로그는 꼭 읽어보길 권한다. 작가의 주제의식을 명확히 엿볼 수도 있고, 어떤 서평보다 더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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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너머 1318 그림책 2
이소영 글.그림 / 글로연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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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너머] 나는 나의 주인공 : 빛을 찾아 떠난 머리=몸=마음의 여행
 
 
 
어디로 가는 걸까, 다들 뭐 하는 거지? 난 무얼 하고 싶은 걸까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기분이 들 땐,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 보는 거야. 그림자 너머.
 
- 본문 中
 
언젠가부터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에서 우리 작가의 수상 소식들이 속속 들리기 시작하였다. 매년 번역서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우리나라는 현재 출간되는 책 10권 중 4권이 번역서이다. 매출순위 상위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동 및 학습서 출판사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은 가운데,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사랑 받는 작가들이 계속 등장한다는 것은 매우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2014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 수상작들이 한창 출간 중인 요즘,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된 우리 작가 이소영의 책 역시 출간되었다. 제목은 <그림자 너머>, 삽화 전부를 실크스크린으로 작업한 이 그림책에 빠져 있노라면 괜찮은 현대미술 전시회에 다녀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많은 색을 쓰지 않음에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삽화의 색감들과 거칠고 단순한 듯 보이지만 주제의식은 뚜렷한 그림, 그리고 그 그림과 어우러지는 스토리텔링에 한없이 빠져들고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나는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마음
손해 보지 않고 빨리 갈 수 있는 마음
너 없이는 허전해서 살 수 없는 마음
너를 더 열심히 살게 하는 마음
- 본문 中
 
몸통이 없는 머리가 머리가 없는 몸통을 만나러 간다는 <그림자 너머>의 기본 아이디어는 쉘 실버스타인의 <The Missing Piece(국내에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를 떠올리게 한다. 주목할 것은 머리와 몸통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마음’인데 작가는 이것이 뇌(머리)의 영역이 아닌 심장(몸통)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적·감성적 발상이므로 이에 대한 신경생리학적 오류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머리가 굵어진다’는 표현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는 타인과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에 맞춰 성장하는 것을 ‘머리’의 세계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나’를 깨닫기 위해, 마음의 소리를 듣기 위해 ‘몸(통)’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에게 마음을 품은 ‘몸(통)’이 ‘참자아’이다. 그래서 책 속에서 머리와 달리 몸통은 가슴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대부분의 그림책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가끔 성인을 위한 그림책이 나온다. 하지만 경계인인 청소년을 위한 그림책은 많지 않다. 장르 특성상 웬만한 그림책들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청소년 대상으로 한정할만한 특별한 주제가 거의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림자 너머>는 독특하게도 청소년을 위한 그림책이고 이 책을 낸 글로연에서 기획한 1318그림책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그러나 <그림자 너머> 역시 청소년 도서들이 주로 다루는 자아 찾기나 정체성 고민의 주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다만, 이런 주제와 타깃의 ‘우리’ ‘그림책’이 많지 않았다면, 개척자의 차원에서 충분히 존재 가치가 있다.
 
 
예전에 우린 같은 곳에서 함께 세상을 바라봤어
언젠가부턴가 너의 커지는 생각이 나를 작아지게 했지
커진 네 그림자 속에서 내 빛도 점점 희미해졌어
 
내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찾은 너
수많은 너의 마음들을 지나 찾아온 너
그리고 점점 자라나는 너
한층 더 환한 너
 
- 본문 中
 
<노자(도덕경)>에 ‘知人者智 自知者明’란 표현이 나온다. 남을 아는 것을 지혜라 하고 자신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는 말인데 이 밝음(明)이란 개념이 <노자>를 관통하는 明道, 도를 깨우쳐 환함(혹은 그런 사람)이다. <그림자 너머>의 결론을 보며, <노자>를 떠올렸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남의 시선과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세상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그림책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청소년 뿐 아니라, 인간이 평생 안고 가야 할 고민일 것이라고 말한다. 수상 사실만으로도 믿고 가는 삽화의 매력, 그것이 담은 철학적 메시지까지, 청소년 대상이지만 다른 연령대에서도 충분히 공감하고 빠질만한 그림책이다. 책 끝에 부록 성격으로 담은 실크스크린 작업기나, 띠지 뒤의 미니갤러리도 확인해보길, 특히 작가의 에필로그는 꼭 읽어보길 권한다. 작가의 주제의식을 명확히 엿볼 수도 있고, 어떤 서평보다 더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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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메인터넌스 - 자전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누카야 그룹 감수.협력, 유가영 옮김 / 함께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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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메인터넌스] 내 자전거에 상냥한 이들을 위한 필수서

   

300! 요즘 우리나라에서 자전거에 최소 300만 원 이상 투자 안 하면 어디 가서 취미라고 말하지도 말란다. 쪽팔리니 지하철도 태우지 말고, 동호회도 들어가지 말고, 동네마실이나 하라고. 원래 자전거 인구와 관심은 꾸준했지만, 의상과 장비를 브랜드 풀세트로 반드시 갖추는 중장년 아웃도어 트렌드가 등산에서 자전거로 넘어간 것이 현재의 고급화 고가화 바람을 촉진시킨 결정적 원인이다. 용감하게 도로를 질주하는 출퇴근족이나 시내 자전거도로를 이용하거나 날 잡아 교외로 자전거하이킹 여행을 떠나는 이도 있지만, 역시 편하게 라이딩하기에는 한강 등 하천 자전거도로만한 곳이 없다. 하천 자전거도로는 실제로 미세먼지와의 전쟁 속에서도 눈비만 아니면 낮밤 가리지 않고 달리는 이들로 가득하다. 이런 추세 덕에 요즘 반가운 것이, 좀처럼 살아나지 않을 것 같았던 동네 자전거 가게들이 속속 생기고 손님도 제법 있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스스로 자전거를 관리하거나 자전거에 대한 기본 상식을 알 수 있는 콤팩트한 자전거 바이블이 필요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문득 들어 찾아보았다. 이미 자전거 전문 잡지도 있었고, 자전거 자가 관리 서적도 몇 권 출간되어 있었다. 그 중에 <자전거 메인터넌스>에 눈이 간 것은 일본 번역서긴 하지만, 사진 자료가 굉장히 많아 이해하기 쉽고 비슷한 류의 책 중에 그리 두껍지 않고 최신간이었기 때문이다. ‘자전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1,250점의 컬러사진등을 강조하는 <자전거 메인터넌스>2011년 일본 학연사 편집부가 누카야 그룹의 감수와 협조를 받아 만든 책이다. 누카야 그룹은 도쿄에 4개 매장을 갖고 있는 자전거 전문점 체인이다.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자전거 메인터넌스>가 다루는 주제는 크게 자전거에 대한 기본 상식, 자전거 관리 방법, 바르고 건강하게 자전거 타는 방법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자전거를 걸음마 뗄 무렵부터 타왔고, 지금도 한번 타러 나가면 10~40km를 달리는데 크게 자전거 관리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휴대용 펌프 하나 챙겨 나설 뿐이었다. 싸구려 동네마실 자전거라고 놀림 받으면서 12년째 한 자전거만 줄기차게 타고 있는데, 오래되어 잘 안 접어진다는 것만 빼고는(주인의 무능력 때문일 수도) 너무 멀쩡하고 무거워도 튼튼만 하니 바꿀 생각을 안했는데, 왜 그랬던 건지 <자전거 메인터넌스>를 보고 알게 되었다. 공동구매로 싸게 샀던 자전거라 정말 MTB인지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내 자전거는 MTB가 맞았고, 그렇기 때문에 26인치에 무거울 수밖에 없었고(충실하게 MTB 표준을 맞춘), 아무리 주로 한강변을 달린다 하더라도 궂은 길이나 유리 파편 등을 만나게 되는데 쉽게 펑크 나지 않고, 다리가 찢어질 정도로 크게 굴러 넘어져도 자전거는 멀쩡했던 것이다. 또한, 165cm에서 175cm 정도 사람에게 맞는 높이라 남녀공용인지 알았는데 안장을 보면 여성용 자전거라는 것도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안장의 모양은 패션이 아니라 성별에 맞춘 이유 있는 차이였다. 자전거 세심하게 관리 못할 무심하고 거친 주인이라면, 이렇게 용도에 상관없이 MTB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같다.

로드바이크, 하이브리드, 미니벨로, MTB 이렇게 자전거의 기본 네 종류를 숙지한 후 책을 읽어보면 별로 오랜 시간 걸리지 않고도 금세 자전거에 대한 각종 지식들을 터득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각 주제별 관련 사진들도 매우 자세하고, 이런 경우엔 어떤 공구가 필요하거나 이런 점검은 얼마 만에 한 번씩 해야 되는지 등등이 꼼꼼하게 제시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쉽다. 어떤 식으로 응용할 수 있는지도 절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자전거 전문점 체인이 감수했다고 해서 특별히 상업성이 짙은 것도 아니고, 초반부 자전거 가격 정도가 엔화로 제시된 것을 제외하면 일본책이라고 의식하게 될 거리도 없다. 결국 <자전거 메인터넌스>의 결론은 잘 관리하여 내 애마(자전거) 좀 더 오래, 바르게, 행복하게 타자인데 책에서 제시하는 것들은 비싼 자전거든, 싼 자전거든 상관없이 보편적이고,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자가 관리 방법이고 비용도 크게 들지 않는다.

 

본론인 자전거 관리법만큼 책에서 유용하게 얻은 팁이 자전거 타는 바른 자세와 자전거 타기 전 준비운동이었다.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의외로 우리가 많이 소홀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NG 자세들 사진을 보면서 크게 웃었는데, 당연히 바른 자세로 잘 타고 있었을까 자문하니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자전거 타기 전 준비운동의 경우 꼭 자전거 타기 전 뿐 아니라 매일 운동하면 좋은 것들이다. PT받아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 책에서 런지, 크런치 등 전문용어를 쓰지 않을 뿐 여기에서 알려주는 운동들이 몸 만들려고 1시간에 5만 원 이상씩 주고 배우는 대표적인 운동들이라는 것이란 걸 말이다. 전체 책에서 차지하는 분량은 얼마 안 되지만, 주동근 제시나 설명이 잘 되어 있는 편이라 충분히 혼자 따라할 수 있을 듯하다. 준비한 자만이 헐벗고 즐기는 여름이 왔다. 황사와 스모그와 미세먼지의 경계가 없는 장기 대기오염은 피하다 피하다 적응할 지경에 이르렀고, 자전거도 타고 불철주야 몸 만들 때가 돌아왔다. 누구나 자전거에 수백 수천을 투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자전거를 위해책 한권쯤은 읽어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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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 1 - 현실과 가상이 중첩하는 파타피직스의 세계 이미지 인문학 1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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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1]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키워드 ‘파타피직스’

 

 

 

 

어느새 ‘디지털’이라는 낱말은 낡은 것이 되었다. ‘디지털’이라는 말을 듣기 힘들어진 것은 디지털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로 아날로그 매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 p.007

 

‘인문학 위기’란 결국 텍스트에 기초한 고전적 인문학의 위기다. 정보의 저장 및 전달의 매체가 달라졌다. 과거에는 책이 사람을 형성했다면 오늘날 인간의 의식은 영상으로 빚어진다. 텍스트 중심의 인문학은 이제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 속에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이는 이미지에 기초한 새로운 유형의 인문학을 요청한다. - p.008

 

미디어는 세계와 인간을 매개하면서, 동시에 그 둘을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세계와 인간은 미디어와 더불어 공진화한다. 이렇게 변화한 세계는 과거와는 다른 ‘존재론’을 요구하며, 그렇게 변화한 인간은 과거와는 다른 ‘인간학’을 요구한다. - p.009

 

저자는 현재를 포스트디지털 시대로 규정하고, 포스트디지털시대의 디지털인문학은 기존의 디지털인문학과 다른 프레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든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키워드는 ‘이미지’다. ‘이미지를 못 읽는 자가 미래의 문맹자가 될 것’이라는 그의 촌철살인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니콜라스 카 등 디지털 트렌드 전문가들의 분석과 궤를 같이 한다. 이 책의 아이디어는 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서의 논문에서 시작하였다. 기본적으로는 2008년부터 ‘디지털 미학과 미디어 미학’을 주제로 기술미학연구회와 함께 진행했던 각종 연구와 토론, 원고들을 바탕으로 하나 이번에 단행본화하면서 대폭적으로 수정, 가필하였다. 미학자인 동시에 이 시대 대표적인 논객으로서, 특히 PC통신에서 트위터까지 온라인매체를 십분 이용해왔던 그이기에 더욱 이러한 주제를 잘 파고들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지 인문학1>은 크게 두 축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미술작품 감상을 통한 포스트디지털예술과 이미지미학이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동향과 풍경들이다. 그를 통해 궁극적으로 ‘디지털 혹은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을 구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자 ‘이미지 인문학’이다. 제목에서 알아차릴 수 있듯 이 책은 한권으로 끝나는 책이 아니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키워드가 다르다는 점-1권의 키워드는 ‘파타피직스’, 2권의 키워드는 ‘언캐니’-을 제외하면 각 권의 구성은 유사하다. 다만 1장과 3장 때문에 <이미지 인문학1>이 좀 더 개관적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면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 ‘파타파직스’는 무엇일까. 프랑스 작가 알프레드 자리가 주창한 개념으로 일종의 사이비 과학을 의미한다.

 

 

‘상상력’으로 설명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디지털 시대의 주요 키워드는 메타포, 하이브리드, 하이퍼텍스트 등이었다.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영역과 여지가 거의 없어진 시대, 끊임없는 변주와 새로운 매체로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창조자들의 숙명이다. 이러한 논의가 있은 지는 불과 수십 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진중권의 분석에 따르면 그 시대도 벌써 종언했으며 지금의 디지털 시대는 완전히 다른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미지 인문학1>을 읽으며, 과거 구디지털 시대는 모더니티와의 결별이 아닌 모더니티와 현재의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교두보로서의, 일종의 포스트모더니즘 ‘이행기’는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하였다. 진중권의 지적처럼 메타피직스(형이상학)와 메타포(은유)가 구디지털 시대만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은가.

 

 

[1장 中] 첫째 전설에서는 인간이 가상으로 걸어 들어가고, 둘째 전설에서는 가상이 현실로 튀어나오고, 셋째 전설에서는 가상이 살아 움직인다. 이 세 가지는 이미 기술적으로 실현되었다. 이 첫째 마술을 우리는 ‘가상현실’이락 부른다. 이른바 ‘몰입기술’을 통해 현실의 주체는 가상의 세계에 입장한다. 둘째 마술은 ‘증강현실’이라 불린다. 여기서는 영상인식, 위치추적 등을 통해 가상의 좌표를 현실적 좌표와 매치함으로써 가상이 현실적 공간에 중첩된다. 셋째 마술은 ‘인공생명’이라 부른다. 오늘날 이미지는 ‘진화 알고리즘’을 통해 스스로 증식하고 진화한다. 디지털 이미지는 살아서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이미지다. - p.063

 

[2장 中]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더불어 사진은 지표성을 잃었다. 디지털 사진은 복제가 아니라 생성이나 합성의 이미지다. (...) 디지털 사진은 현실의 ‘사본’이 아니다. 그것을 여전히 ‘재현’이라 부른다면 그것이 재현하는 현실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컴퓨터로 만들어진 합성 이미지는 우리 현실을 열등하게 재현한 것이 아니라 다른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 우리의 현실은 이미 현재와 잠재가 어지럽게 뒤섞인 혼합현실이다. ‘가상현실’은 어느새 ‘현실가상’이 되고 있다. - p.109

 

[3장 中] 과학과 기술을 전유한 상상력이라는 면에서 파타피직스는 과학과 기술을 적대시하던 과거의 낭만주의적 상상력과는 구별된다. 외려 과학과 기술을 상상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빌렘 플루서가 말하는 ‘기술적 상상력’애 근접한다. 다만 이 기술적 상상력을 진지한 목적이 아니라 지적 농담에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파타피직스의 본질을 이루는 과학기술과 시적 상상력의 융합은, - p.125

 

[4장 中] “디지털 이미지는 전통적 사진의 시각적 사실주의보다 열등하지 않다. 완벽하게 사실적이다. 오히려 너무 사실적이다.” 디지털 이미지의 과도한 선명함은 (...) “인간의 시선보다 더 완벽한 어떤 다른 시각”, 즉 “컴퓨터의 시각”에서 나온다. 컴퓨터의 눈으로 세계를 재현하는 것은 그저 재현의 옛 방식을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 리얼리즘을 지향하든 포토리얼리즘을 지향하든 디지털 이미지가 보여주는 현실은 언제나 ‘낯설게’ 나타난다. 그것은 디지털 이미지가 전통적 사진을 모방하는 데서 벗어나 이미 고유의 미학을 추구하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 p.253

 

[5장 中] 미디어는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디지털은 사진의 기록적 성격을 파괴한다. 이로써 조롱당하는 것은 역사,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주의 의식이다. (...) 역사는 상징계에서 상상계로 거처를 옮기고 있다. 사실은 허구로, 증명은 날조로, 진리는 오락으로 대체된다. (...) 관거에 역사는 해방된 미래를 위해 피억압자의 기억을 조직하는 행위였으나, 디지털 부족에게 과거는 사극의 재료요, 미래는 SF의 배경일 뿐이다. 역사는 무엇인가? 그것은 환상의 재료, 허구의 배경이자 농담의 소재일 뿐이다. - pp.312~313

 

플루서의 지적처럼 디지털 시대의 상상력은 ‘기술적 상상력’이다. 그리고 파타피직스가 도래한 디지털 시대의 심화기, 탈지디털 시대는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는 파타포의 세계이다. 실제로 지어지지 않을 가설적 건축 프로젝트 ‘아키그램’이나, 존재하지 않는 대학의 교수를 자처하며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의 음악작품을 발굴해 발표하는 작곡가 피터 시켈레, 만화의 주인공을 예언자로 모시는 패러디 교회 ‘서브지니어스 교회’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흥미로운 것은 진중권이 포스트디지털 시대, 파타피직스의 예로 드는 것 중 상당수가 20세기(심지어 초중반까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디지털 이전의 포스트디지털적 특성, 시대 구분의 무의미성, 진중권의 안내에 따라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면면을 확인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역시나 동시대를 스스로 정의할 수는 없는 건지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의 무책임할 만큼 광범위하고 근본 없음처럼 탈디지털 시대의 특성 역시 가상과 현실, 과거와 현재의 중첩 속에 생동하고 있는 (역사의)‘흐름’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미지 인문학1> 책 전체도 하나의 파타피직스 놀이처럼 여겨질 정도다. 흥미를 돋우는 예술 작품 해석,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설명, 그래서 다루는 주제와 내용을 감안했을 때 생각보다 대단히 편하게 읽게 되는데 얼마만큼 많이, 정확히 이해하느냐는 독자의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일 듯싶다. 모든 인문학이 그러하듯.

 

 

어쨌든 <이미지 인문학1>을 통해 누구나 얻어갈 수 있는 보편적인 것들이 있는데, 가장 꼽을 수 있는 것은 (물론 해외 예술가와 작품 예시도 많지만) 한상필, 이명호, 정홍섭, 안상석 등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과 현재 트렌디한 예술작품의 감상법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2권이 궁금해지게 하는 ‘언캐니’ 개념과 ‘게이미피케이션’이라는 대중적 파타피직스 놀이 개념을 들 수 있다. 두 개념 모두 관련 단행본이 예정되어 있다는 공통점(전자는 <이미지 인문학2>, 후자는 <게이미피케이션-게임의 미학>)이 있다. 한편 책을 읽으면서 편집에도 눈이 갔는데 주제상 총천연색에 수많은 이미지 자료가 삽입될 것은 예상했지만 본문 안에 QR코드를 넣어 독자의 하이퍼텍스팅을 유도하는 것이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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