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남자를 말하다 - 손목 위에서 만나는 특별한 가치
이은경 지음 / 책이있는풍경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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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계 속성 과외, but not for a Mania

국내 유일 시계 컨설턴트 이은경의 ‘All that Watch’ 

   

"안목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아요. 안목이란 건 태어날 때부터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이미 정해진 거예요." 드라마 <청담동 엘리스>의 한 대사이다. 비단 안목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은 자신이 아는 만큼의 세계를 산다. 대개 ‘내게 너무 먼 세계’의 물건, 사람과는 안 만나게 된다. 그러나 와인, 보석, 시계, 자동차, 스포츠 등 글로라도 어느 정도는 알 필요가 있는 분야들이 몇 있다. 직무 뿐 아니라, 연애 등 친교생활에도 요긴한 교양들이니 말이다. 남과 대화할 때 ‘말이 통하고’, ‘화제가 풍부한’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여자에겐 가방이라면, 남자에겐 시계이다. 자동차와 함께 대부분 남자들의 로망이자 잇 아이템이다. 중저가 쿼츠를 끼더라도 최소한 무슨 브랜드, 무슨 모델 이상은 되어야 한다. 여자들이 화장품이나 성형 귀신처럼 알아보듯, 시계 좀 좋아하는 남자치고 사람 만날 때마다 손목 쳐다보고 SNS 프로필 사진 한번쯤 시계(혹은 시계를 강조한 본인)로 해두지 않은 사람 없을 것이다(심지어 이 책 <시계, 남자를 말하다>를 읽고 있는 사람만 보고도 좋아 죽는 이도 있다.).

 

그런데 생각만큼 우리나라에 시계 전문가는 많지 않나보다. 저자의 직업인 시계컨설턴트만 해도 국내 최초이자 유일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8년 동안 시계 보는 일을 하다 낸 그녀의 첫 책 <시계, 남자를 말하다>에선 사명감 같은 게 느껴진다. 자신의 전문 분야인 시계 컨설팅이나 제목에 충실한 ‘남자와 시계’ 주제 외에 시계의 역사와 소개, 관련 에피소드 등 ‘All that Watch’라는 부제를 단 ‘시계종합서’를 출간했다. 이런 기획이 국내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 생각은 다 비슷한지 똑같은 생각으로 3년 전 한 시계 전문기자가(심지어 시계 관련 일한 경력도 비슷)가 낸 <시계 이야기>란 책이 이미 존재한다. 하지만 그 책을 제외하곤 국내 저자가 쓴 ‘시계책’은 없고 번역서도 거의 없다(있어도 너무 오래됨). ‘시계책’에 있어선 ‘국내 최초 유일’의 타이틀을 뺐긴 점은 저자에게 씁쓸하겠지만, 최신 정보가 담겼고, 거의 다루지 않는 주제의 책이 나왔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그저 반갑다.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이 책이 시계 마니아들의 니즈를 절대 충족시키지 못하며, 애초에 그들을 타깃 독자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평소 각종 미디어 콘텐츠에서 시계를 다룬 것은 귀신 같이 찾아보고 온라인 시계 커뮤니티 하나쯤은 가입한 그들에게, 특히 “암, 남자는 시계지!”하며 남성의 로망을 알아 준 이 책 제목에 감동하며 달려 올 남성 마니아들에게, 안타깝게도 <시계, 남자를 말하다>는 위키피디아 항목처럼 느껴질 뿐인 책이다. <시계, 남자를 말하다>는 시계 마니아를 제외한 모든 시계 관심자를 위한 시계 속성 과외 책이다. 명품 시계를 살 여력은 없지만 생활 소양을 쌓기 위해 시계를 알고 싶거나 앞으로 시계에 빠져보고 싶은 이들에겐 글로 빠르게 시계를 배울 수 있는 안성맞춤 책이다. 책 제목에 충실하기 위해 저자는 기계식 시계(아날로그 시계)를 중심으로 글을 풀어나간다.

 

시계가 없어도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럼에도 수많은 이들(특히 남자) 시계, 특히 기계식 시계에 빠지고 열광하는 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클래식함(손목을 보면 그의 품격을 알 수 있다)’ 때문이라고 저자는 꼽는다. 액세서리 기능도 그렇지만 정밀 기술이 압축되어 있는 ‘기계’다 보니 기계나 장난감에 환장하는 니즈가 투영된 것으로도 보인다(일상생활에서 통감하는 것 외에 본문 속에 나오는 수많은 명사들의 시계 애호 에피소드를 봐도 느낄 수 있다). 한국인이 제대로 된 시계를 마련하는 것은 보통 결혼 예물 구입 때고 저자도 추천한다. 그러나 롤렉스가 오토매틱(몸을 움직여야 작동)인 걸 모르고 고장 난 시계로 취급했던 저자의 남편처럼 그 시계의 가치와 속성을 정확히 아는 소비자는 많지 않다. 무브먼트, 핸드와인딩, 오토매틱, 쿼츠, 오트 오롤로지 등의 시계 관련 용어나 스와치, 하이에크, 바젤월드 등의 시계 관련 브랜드인사행사를 알고 싶으면 1장을 충실히 읽길 바란다. 이 책의 존재 이유이자 가장 핵심인 장이기도 하다.


시계의 역사를 논하는 2장, 1장에서 시계의 등급과 구조를 언급했다면 슈트에 어울리는 드레스워치부터 각종 특수시계를 소개하며 시계의 종류를 다루는 3장, 범인과 마니아를 가를 기준이 될 부품과 디테일 보는 법을 알려주는 4장은 1장의 이해를 높이고 내용을 보강한다. 5장과 6장은 앙투아네트부터 김정은까지 각종 명사들의 시계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1장부터 4장까지가 시계에 대해 최소한 알아야 할 기본 교양 지식이라면, 5장부터 6장까지는 당신의 대화를 풍부하게 해줄 화젯거리로써 유용하다. 시계 컨설턴트 이은경의 이름을 걸고 저자의 장기를 십분 발휘하는 대목은 마지막 7장이다. 시계 쇼핑 팁을 다루는 이 장을 어느 독자는 가장 궁금했을 것이다. 본문 전체에 실린 수많은 총천연색 시계 사진들과 각 장을 시작하는 시계 관련 명언, 각 장 중반부마다 실은 ‘이은경 기자의 시계파일’은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책을 읽다가 눈을 뗄 수 없었던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오늘날의 스위스 시계를 만든 니콜라스 G. 하이에크의 손목이었다. 그는 항상 8개의 시계를 차고 다녔고, 언제나 시계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고 자신할 만큼 열정가였다. 가족기업의 전문경영에 있어 상징적인 인물인 하이에크와 그의 경영 사례는 깊은 인상을 준다. 또 하나 책에서 엿본 열정은 저자였다. 의류직물학을 전공하고 패션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시계와 주얼리 기사를 담당하면서 인생의 아이템 시계를 만나 투신하였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좋아하는 것에 대한 몰두의 중요성 등 많은 영감을 받았다. 마지막 열정은 시계를 만드는 이와 사랑하는 이의 것이다. 이렇듯 시계는 열정 그 자체이다. 그리고 저자의 말처럼 시간time을 담는 시계의 세계는 영원timeless하다. 그를 알아보는 뜨거운 남자들의 영원한 로망이다, 시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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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 오천 자로 세상 모든 비밀을 풀다
노자 지음, 정창영 옮김 / 물병자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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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정창영 역)]

함께 공부하는 도덕경 - 학도와 선생의 사이에서

 

 

<도덕경>의 저자는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보고 영화도 누릴 만큼 누려본 사람, 그 시대의 혼란한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도대체 인생이 무엇이냐를 깊이 탐구한 사람, 그러다가 도와 덕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환골탈퇴한 사람, 그리하여 마침내 천지의 도와 하나 되어 자유인이 된 사람이었으리라. 그가 현직에서 물러나 자신의 깨달음을 노래한 것이 <도덕경>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꼭 누구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시대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며, 그의 가르침이 오늘 나에게 무슨 뜻이 있느냐가 훨씬 중요할 것이다. - p.307

노자는 정말 은둔하는 현자였을까, 노자와 도가와 도교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노자의 사상은 주자성리학에 그렇게 위협적인 것이었을까. <도덕경>을 다 읽고 나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머릿 속을 가득 채운다. 한번 그 고전의 전체를 읽어냈다는 뿌듯함과 함께 앞으로 이 고전을 어떻게, 얼마나 건드려야 할까 과제가 생겼다. 노자의 인생은 불분명하다. 사상가인 동시에 교조로 떠받들어져서일까, 200여년을 살았다고 하질 않나 필요 이상 신화화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위대한 작가들은 다량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소량의 언어를 표현했다.”고 하였다. 노자는 평생 5천자 정도 되는 책 한권만을 남겼다. 도편과 덕편으로 나뉘어져 있어 혹자는 <노자>라고 부르고 누구는 <도덕경>이라 부르는데 같은 책이다. 그러나 그 5천자가 범인들에겐 결코 녹록지 않다. 수많은 역자와 연구자가 원문을 해석하고 다 다른 방대한 주석과 해설을 제시한다. 어떤 것이 '바르고 정확한' 해석인지에 대해선 늘 논란이고 정해진 바가 없다.  

단순히 원문의 직역 정도만 제시하는 입문자용 <도덕경>도 시중에 수없이 많다. 도저히 선택의 기준이 안 서 최대한 최신의 번역본을 보자 싶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올 3월 중순에 출간된 물병자리 출판사의 정창영 역 <도덕경>이다. 독특한 이력의 역자이다. 전공은 신학이나 30년 넘게 동서양 경전 연구와 번역에 전념했고 현재는 천문학에 빠져있다고 한다. <도덕경>의 경우 14년 전(2000) 같은 기획 의도로 시공사에서 책을 낸 적이 있는데 '오늘에 맞는 가장 친근한 번역'을 표방하며 이번에 새 번역을 선보였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각 장마다 원문을 짝수 페이지에, 번역문을 홀수 페이지에 실었다는 점이다. 원문을 실으면서 해석 주석을 달아놓아 원문 직역과 저자의 의역을 비교하며 읽을 수 있다. ‘스포츠’, ‘에고’, ‘도를 체득해 환해진 사람등 당시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나 역자만의 개성적인 해석을 보면 이 책이 추구하는 번역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다.

 

정창영 역의 <도덕경>함께 공부하는도덕경이다. 81장 본문이 끝날 때까지 역자가 제시한 해석을 길잡이 삼아 독자 스스로 원문을 짚고 생각해 보면서 읽게 한다. <도덕경> 본문 자체보다 주석과 해설이 더 많거나, 해제자의 주관성이 너무 강한 <도덕경> 번역서나 관련서에 염증을 느꼈던 독자에겐 반가울 점이다. <도덕경>을 처음 읽는 독자에게도 이런 책으로 <도덕경>을 시작해 아무런 편견 없이 스스로 원문의 민낯부터 접하고 이해를 높이는 방법이 좋을 수 있다. 그렇게만 끝났으면 학도의 책이었겠지만, 맨뒤에 70여 페이지 분량의 해제를 실어놓음으로써 선생 역할도 약간 한다. <도덕경>의 문장은 촌철살인이나 쉽다. 그래서 남녀노소 누구나 읽을 수는 있지만 느끼고 아는 만큼은 제각각이다. 먼저 <도덕경>에 빠져 탐구했던 사람으로서 역자는 독자에게 최소한의 도움을 주고자 한다.

 

<도덕경>은 노자와 집필 당시 시대 상황을 알고 읽을 때 내용이 더 명확하게 들어온다. 주나라 왕실도서관 관장이었던 노자는 왕실용 정치처세서로 <도덕경>을 썼다. <도덕경>을 읽다보면 상편()과 하편()이 서로 뒤 바뀐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실제 군자의 됨됨이를 논하는 덕편이 먼저이고 이후 도의 의미를 깨치도록 도편을 뒤에 둔 책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도덕경은 구전과 필사를 통해 후대에 전해내려오며 순서를 바꾸고 개인의 품성 수행서쪽으로 읽혔다. 춘추전국시대를 살며 노자는 기존 유가사상에 반론을 제기했고, 전쟁에 반대했다. 속세에 환멸을 느낀 은둔자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현실 참여하는 지식인이었다. 노자는 공자를 사사했고, 그의 사상도 유가와 완전히 유리된 것이 아니라 그 허점을 메우고자 하는 대안이었다. 박세당이나 윤휴처럼 노자의 관점에서 유학을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수많은 유생들이 <도덕경>을 즐겨 읽던 것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정창역 역자 덕에 처음 <도덕경>을 완독하면서 어떤 구절에도 표시를 할 수 없었다. 일독자에게 <도덕경> 5천자는 모든 장과 문장이 촘촘이 엮여 한 몸체 그 자체로 보였다. 고전은 오랜() 세월 널리 읽히고 살아남은 명저에 붙는 타이틀이지만 그만큼 그 수준이 높고() 읽기 고된() 책이다. 인문사회학 공부법 중 강독이란 게 있다. 텍스트를 거듭 읽다 보면 그 의미가 들어오고 새로운 것이 보이고 학문 수준이 깊어지는 것으로 대단히 오래되고 기본적인 공부법이다. <도덕경> 역시 이번 일독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 생각하였다. <도덕경>으로 괜찮은 책이었다. ‘읽어냄이 언젠가 읽음으로 바뀌는 때를 기다리며, 아장아장 첫 걸음을 떼는 어느 우매한 학생에게 길잡이자 벗으로 함께 해준 역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노자를 닮은 책. 표지, 내지 모두 친환경용지로 제작한 센스!

표지가 무코팅이라 약해서 겉표지를 또 둔 상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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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해방 - 개정완역판
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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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Animal Liberation(1975;미국)

연암서가의 2012년판 개정완역본은 2009년에 출간된 <동물해방> 4판의 번역이다.

 

 

 

[동물해방] 생동하는 혁명서 : 모든 동물의 해방과 안녕을 기다리며

 

 

 

 

 

 

동물 해방 운동은 현대의 여러 사회 운동들 중에서 강단 철학권 내에서의 토론과 연결되어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인간 아닌 동물들의 지위를 고찰하면서 철학계에서는 자체적인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즉 철학은 동물의 지위 문제를 검토함으로써 기존의 도그마를 편안히 따르길 포기하고, 고대 소크라테스의 역할로 되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 p.409

 

"여성도 권리가 있고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면 짐승에게도 그래야 한다." <동물해방>은 1792년에 있었던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시작한다. 이는 짐승을 위하는 게 아니라 인간(남성) 우위 관점에서 여성과 짐승을 동일한 지위로 놓고 비하·차별하는 발언이었다. 18세기 말 시작한 여성 해방론은 19세기 중반 흑인 차별 문제가 더해지며 발전한다. 그러나 대중 일반에 이러한 운동이 인지되고 실질적 성과가 나오는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여성의 권리나 흑인의 권리에 대한 법은 동물의 권리에 대한 법보다 훨씬 나중에 나온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화’에 대한 고민과 차별에 대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같은 동물이면서 다른 동물보다 우위에 있는 ‘만물의 영장’이란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피터 싱어의 말처럼 "대부분의 인간들은 종차별주의자(p.39)"이다.

 

 

종차별주의는 능력적 우월성을 기준으로 종 간 우위와 열위를 나눌 수 있으며 마땅히 우월한 종은 다른 종과 차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가장 우월한 종은 당연히 인간이며, 그래서 인간중심적 패러다임을 정당화한다. 종차별주의는 인간과 짐승을 나누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월 정도에 따라 차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도 나눌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고, 우월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지능·장애·성별·인종 등 또 다른 차별을 낳는다. 피터 싱어는 이러한 종차별주의에 반대하며 “동물 해방은 곧 인간해방(p.23)”이란 입장에서 논지를 전개한다. 1975년 <동물해방>이 등장하기 전까지 ‘동물해방’이란 개념은 없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오늘날 동물해방운동이 시작되었다. 재밌는 것은 흔히 동물운동가들이 보이는 연민이나 애정의 정서가 피터 싱어에겐 전혀 없다는 것이다. 철저히 철학적이다.

 

 

평등은 도덕적 개념이지 사실에 관한 단언이 아니다. (...) 인간 평등의 원리는 인간이 실질적으로 평등하다(이는 근거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기술이 아니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처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규정이다. 도덕 철학의 한 학파인 개혁적 공리주의의 창시자인 제러미 벤담은 "모든 사람은 각각 한 명을 간주되어야 하고, 아무도 그 이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정식을 이용하여 도덕적 평등의 핵심적 토대를 자신의 윤리학 체계 속에 편입시켰다. 달리 말하자면 어떤 행위로 인해 영향을 받는 모든 개별 존재들의 이익은 다른 존재들의 이익과 다를 바 없이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또한 동일한 비중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p.33

 

“문제는 그들이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또한 그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가도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벤담은 동물의 처지를 흑인 노예의 처지와 비교하면서, 그리고 “빼앗겨서는 안 되었지만 폭정의 손에 빼앗긴 권리를 여타의 동물들이 다시 획득할” 날을 기대하면서 ‘인간의 지배’를 합당한 정치라기보다는 폭정이라고 비판한 최초의 사상가였다. pp.346~347

많은 철학자들과 저술가들이 이익 동등을 기본적인 도덕원리로 내세웠으나 벤담 등 일부만이 그것이 우리 자신 외의 다른 종에게도 적용된다고 고려하였다(p.36). 피터싱어의 철학은 벤담의 공리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 동물해방론 역시 벤담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벤담은 이익을 갖고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존재의 요건으로 쾌고능력을 꼽았다. 쾌고능력은 행동, 신경계의 특징, 진화적 유용성 세 가지 측면에서 입증할 수 있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쾌고능력이 있다(1장, 6장). 그래서 쾌고능력이 없는 식물은 해방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유전자 조작이나 과다 농약화학비료 사용 등은 식물 학대나 착취가 아니며, 식물은 어떤 죄의식도 없이 마음껏 먹을 수 있다. 피터 싱어는 ‘종차별의 반대’가 ‘모든 생명이 동등한 가치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고통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하나 분명히 할 것은 ‘동물해방’이란 개념의 중의적 의미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인간의 종차별주의의 희생양인 ‘동물(Animal)’은 ‘인간을 제외한 동물’이다. 그러나 동물(Animal)이 아닌 짐승(Beast) 등의 대체어를 쓸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은 것은, 결국 인간도 동물이며 그래서 동물해방과 인간해방을 떼려야 뗄 수 없음을 동시에 강조하기 위함이다. 인간의 종차별주의가 동물에 가하는 대표적 착취영역으로 피터 싱어는 각종 동물실험과 공장식 축산을 든다(2장, 3장). 참고는 가능하더라도 이종의 반응을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굳이 실험을 하지 않더라도 생명에 치명적인 것을 알 수 있으면서도 필요 이상의 동물실험을 너무나 무감각하게 행하고 있다. 모든 도살행위가 기본적으로 반인도적이지만, 철저한 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해 운영되는 공장식 축산과 육류 생산과 소비를 끝없이 증가시키는 거대 식품산업은 비윤리적일 뿐 아니라 환경에 있어서도 큰 문제이다.

 

작금의 현실에 반대하기 위해 모든 동물 실험이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직접적이면서 긴급한 목적에 필요하지 않은 실험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여타 연구 분야에서는 가능한 언제이건 동물 실험을 대체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p.87

 

독물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한 종에서 확인되는 사실로부터 다른 종에 대한 사실을 추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모험이라고 생각해 왔다. - p.114

 

축산 잡지는 동물의 고통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물론 동물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관행을 피하라는 기사가 간혹 실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권고하는 이유는 동물들이 고통을 겪을 경우 체중 증가율이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농장주들에게 가축을 도축장으로 끌고 갈 때 가급적 살살 다루라는 충고를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상처가 난 고기의 가격이 낮게 책정되기 때문이다. -p.177

횡포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러한 횡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p.317). <동물해방>에서도 종차별주의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많은 부분은 할애한다(5장). 구약성경-고대 그리스-아우구스투스-토마스 아퀴나스-르네상스(인간중심주의)-계몽주의시대-현대로 이어지는 , 20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동물에 대한 서구의 사유는 인간이 동물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데카르트는 동물들이 자동기계라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었다(p.41). 이러한 서구의 사유가 오늘날 대부분의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사유 방식이 되었음(p.318)을 피터 싱어는 대단히 유감스럽게 여긴다. 적어도 동물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동양이 그나마 사정이 낫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나마 서양에서 긍정적인 사상가로는 가톨릭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 외 생물들의 복리에 관심을 가졌던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있다. 그러나 모든 생물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 기반을 두고 동식물과 생물·무생물을 구별하지 않는 그의 사상은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는 점에서 피터 싱어는 비판한다.

 

 

피터 싱어는 “사유 없는 실천은 맹목하고 실천 없는 사유는 공허하다.”는 칸트의 말을 삶으로 몸소 보여주는 철학자이다. 흔히 실천윤리학으로 표현하는 피터 싱어 철학의 준칙은 ‘사상과 행위가 불일치하는 논리적 모순에 빠진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동물해방론은 채식주의로 귀결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인간 아닌 동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식사 시간에 이루어진다(p.173). 어릴 때부터 육식을 하면서 동물을 사랑하는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동시에 갖게 되는데 대부분 그 모순에 대해 갈등하지 않는다. 적어도 잡식동물의 딜레마(동물이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이 먹는)를 인지할 수 있다면 논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위해 쾌고능력이 없는 식물만을 먹는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피터 싱어가 주장한다. 대량축산이 야기하는 환경오염 문제와 단백질 등 영양분 생산효율성을 고려했을 때도 채식주의가 바람직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비건만을 인정한다. 피터 싱어는 100% 식물성 음식 섭취로도 충분히 모든 필요 영양소를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동물을 죽이는 것은 그 자체가 마음이 괴로워지는 행위다. 만약 우리 손으로 먹을 동물을 직접 죽여야 한다면 우리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 p.264

 

우리는 “동물을 먹는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가 있는가”라고 물어서는 안 되고, “이 고기를 먹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p.279

 

인간이 먹는 1파운드의 동물 단백질을 생산하기 위해 송아지가 먹는 단백질은 무려 21파운드이다. 1에이커의 땅에서 콩을 재배하면 300에서 500파운드의 단백질을 얻지만 가축을 키우면 40에서 55파운드의 단백질만 얻는다. (p.287)

 

가축에서 온 고기를 식물성 음식으로 대체한다.

구할 수만 있다면 공장식 농장에서 온 계란을 방사한 닭의 계란으로 대체한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계란을 먹지 말라.

우유와 치즈를 두유, 두부 또는 다른 식물성 식품으로 대체하라.

하지만 유제품이 들어 있는 모든 음식을 피하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상세히 알아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 p.305

 채식주의자가 소수이고 채식주의와 그 장점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그 단점과 고민부터 부각하는 사회분위기 때문에 잘 못 느끼지만, 사실 채식주의는 대단히 급진적인 사상이다. 채식주의가 적게는 다섯에서 많게는 열 개 이상까지 종류가 나뉘고, 가끔씩 채식주의자와 그 자녀의 영양실조나 사망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피터 싱어 역시 모든 사람들이 식습관에서 종차별주의적 요소를 일시에 제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인정한다. 대신 문제의식을 갖고 그가 제시하는 지침들을 하나씩 실천해보려고 노력하고 그 생각을 남들과 공유하려고 한다면 동물해방운동에 동참한 것이라고 본다. 책에는 제시되지 않았지만 육류의 통소비 같은 것들이 잡식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일반 대중들이 고려해볼 수 있는 예이다. 피터 싱어는 그 스스로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해 풍부한 사례와 읽을거리를 소개하며 본문을 썼다.

 

<동물해방>이 흥미로운 것은 동물해방운동의 효시인 동시에 끝없이 생동하는 혁명서라는 점이다. 책 스스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1975년 첫 출간 이후 1990년, 2002년 그리고 이번 2009년판까지 3번 개정하였고, 그가 살아 있는 한 또 다른 개정판이 계속 등장할 것이다. 그는 지난 30여 년간 주기적인 개정을 통해 이전 판들 동물 해방 문제에 있어 학계 및 관련 산업의 변화와 연구 성과들을 추가해왔다. 2009년판이 이전 개정판과 다른 점은 그에서 더 나아가 주장도 한 가지 수정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고기를 먹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더 많은 가축이 태어날 수 있는 것이 축복’이라는 주장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하는 입장에서 고민하는 입장으로 생각을 바꿨다. 어떤 결론을 내릴지, 또 어떤 새로운 사유들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한편 그의 저서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발전하는 그의 사유의 총체를 반영하는데 <동물해방>의 문제의식의 경우 <죽음의 밥상>이나 <사회생물학과 윤리>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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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 푸슈킨에서 체호프까지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이현우 지음, 조성민 그림 / 현암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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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러시아 문학강의 19세기]

푸슈킨에서 체호프까지

로쟈가 안내하는 러시아 문학의 찬란한 태동기

 

 

 

1000년이 다 되도록 문학이 제대로 없던 나라가 있었다. 심지어 모국어조차 제대로 발달되지 못했다. 19세기 근대를 열 당시 이 나라의 문맹률은 95%에 달했고, 지배계급의 제1언어는 프랑스어였고 독일어나 영어를 제2언어로 사용하였다. 그런 나라에서 1820년대 기라성 같은 세 작가가 나타나 문학의 토양을 닦았고, 그 다음 세대의 작가 두 명은 세계 최고의 소설가들이었다. 그리고 문학이 사회를 견인하고 당대 철학과 사상을 담당한다. 이 나라는 러시아다. 러시아 문학은 방대한 양과 본명·애칭·부칭·약칭 정신 차릴 수 없이 복잡한 인물 이름의 세계 때문에 처음 놀라고, 이 독특한 문학사 때문에 또 한 번 놀란다. 짧은 역사와 더 짧은 문학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처음 서구 문학이 유입될 때 압도적으로 많이 읽힌 것이 러시아 문학이었다고 한다. 대표적 사례로 1920년대에 가장 많이 읽힌 3대 작가가 이광수, 톨스토이, 투르게네프였던 것을 들 수 있다. 다만 소련 공산화로 인해 단절기가 길어서 낯설어졌던 것일 뿐이다. 로쟈는 이를 역사적·정서적 유사성 때문으로 분석한다.

 

 

로쟈(이현우)는 북로거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독서광이자 유명한 인터넷 서평꾼이다. 막상 그의 전공은 러시아 문학으로 대학 출강도 하고 일반교양 특강도 많이 했는데 전공 책을 낸 게 거의 없어 항상 궁금하고 기다려왔었다. 드디어 올해 19세기와 20세기 두 권으로 나눈 러시아 문학 강의서가 나왔다(후자는 근간). 다룬 작품들과 설명 내용은 다른 많은 강의에서 이미 했던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책 구성은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진행했던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따왔다. 19세기와 20세기로 나눈 후 각 8강씩 강의하는데, 각 세기별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대표작가 일곱 명을 소개하고 그들의 대표작을 해설하였다. 사진과 그림을 포함하여 권당 300쪽 내외로 편집하였으나 책을 읽으면 1000분 넘어가는 8강 강의를 굳이 들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대화체에 강의와 거의 똑같은 내용으로 서술하였다.

 

같은 포맷의 강의가 2009년과 2010년 아트앤스터디에서 <로쟈의 러시아 문학기행>이란 이름으로 진행된 적도 있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시리즈가 다루는 두 세기 16명의 작가와 대표작과 관련해선 강의록이 완성형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고, 부정적으로 보면 수업 연구가 거의 없는 강사로 평가할 수 있다. 실제로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출간 후 있었던 관련 현장 강의를 들어보면 강의록과 강의가 책의 내용과 다른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거의 같다. 해당 작가와 작품을 전혀 모르는 독자도 이해할 수준의 일반인 대상 교양 강의가 다룰 수 있는 범위의 한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가 다루는 작가는 19세기 초 러시아 근대 문학을 태동시킨 세 작가 푸슈킨, 레르몬토프, 고골과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사실주의를 이끈 대표적 세 작가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를 다루고 마지막으로 19세기와 20세기의 경계에서 19세기 문학을 마감하는 체호프를 언급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시리즈는 소설 중심의 러시아 문학사책이다.

 

 

푸슈킨 전에 러시아 문학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영향 받은 카람진 같은 선배 작가가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근대 문학 시대가 열리는 동시에 러시아에 문학다운 문학이 비로소 시작하는 것은 푸슈킨부터다. 러시아 최초의 전업 작가라는 점부터가 근대적이다. 푸슈킨은 ‘푸슈킨 공동체’로 표현할 수 있는 근현대 러시아 문화의 정체성 그 자체이다. 전 국민이 그의 작품을 읽고, 작가들은 자신을 정의할 때 어떻게든 푸슈킨과 엮으려 한다. 레르몬토프는 러시아 문학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주인공을 만들었고, 우크라이나 촌놈 고골은 러시아인이라서 가능한 기상천외한 발상과 장기를 보인다. 시로 쓴 소설 <예브게닌 오네긴>, 오늘날에 봐도 현대적이고 매력적인 페초린이 있는 <우리 시대의 영웅>,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를 통해 본 고골의 9급공무원·음식·속물에 대한 집착적 애정, 책 초반부터 매력적인 작가들과 작품들의 향연이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과 <아버지와 아들>은 그의 대표작인 동시에 자전적인 소설이란 점에서 인상 깊고 평생 반사회참여적 태도로 일관했음에도 후자 같은 작품을 썼다는 게 놀랍다. 더 놀라운 것은 러시아 문학 최고 인텔리임과 동시에 가장 희한한 사생활을 가진 ‘이상한 투르게네프’였다는 점이다. 러시아 문학의 양대 산맥이자 세계 최고의 두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와 관련된 장은 단연 이 책의 하이라이트이다. 두 장을 넘나들면서 성격, 삶의 모습, 사상 모두 정반대의 작가와 작품을 비교하고 있노라면 재밌으면서 어떻게 이런 인물 둘이 혜성처럼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 등장했는지 기가 막힌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미완성 작이자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최대 작이란 점도, 수많은 소설을 썼음에도 사실상 문학적 미학성을 인정할만한 톨스토이 작품은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밖에 없다는(굳이 더 따지면 초기작 포함) 사실도 흥미롭다. 동시대인임에도 체호프와 고리키의 문학은 세기적 간극이 있고 황혼의 달관을 담은 유머를 추구한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상식과 교양은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도 어떤 독자에겐 어떤 영감과 흥미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가벼운 책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러시아 문학을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도 모르겠거나, 관심은 있어 매번 읽어봐야지 하면서 포기했던 초보 러시아문학 독자에겐 이만한 든든하고 훌륭한 이정표 역할을 하는 안내서도 없다. 그만큼 로쟈의 문장은 쉽다. 어려운 주제를 어렵게 쓰는 것은 결코 잘 쓰는 것이 아니다. 누가 읽어도 러시아 문학의 큰 얼개를 파악하고 어떤 작품들을 읽을지 갈피를 잡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중에 지금까지 일반인을 대상으로(특히 우리 한국 독자에게 맞춘) 러시아 문학 입문서가 없었다는 점에서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는 잘 쓴 책이다. 벼락 맞듯 어느 날 갑자기 찬란하게 태동했던 19세기의 러시아 문학은 20세기, 문학의 무덤인 사회주의를 만나 급격히 침몰한다. 더러는 숨고, 더러는 있어도 없는 자식 취급 받고, 더러는 타협하고, 더러는 가출하면서 반짝이는 존재감을 과시하는 작품들이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20세기>에서 대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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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의 역사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지음, 하정희 옮김 / 예지(Wisdom)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인종차별의 역사] 실체 없는 타자 증오의 근원을 찾아서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모순의 민낯을 마주보기 위한 역사적 탐구이자

그 반인도적 범죄의 상속자이자 행위자인 서양의 통렬한 자기반성적 기록

인종차별주의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 마음 안의 그 괴물을 반드시 지워야 한다

 

 

 

 

인종차별주의자, 그들은 타인을 미워한다. 그 타인들의 행위(또는 한 개인으로서 그들이 과거에 했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그 자체 (또는 인종차별주의자 자신이 인위적으로 규정한 한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점) 때문에 그런다. (...) 인종차별이란 타자로서의 타자에 대한 증오다. 흑인으로서의 흑인, 경찰관으로서의 경찰관, 동성애자에 대한 증오 말이다. - p.15

 

이 책을 쓴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이다. 출판사의 저자 소개에 따르면, 생전 그는 시대의 쟁점이라는 관점으로 철학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읽어내고 지배와 탄압의 메커니즘을 밝히는데 철학의 역할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인종차별주의와 관련된 연구와 저술도 많이 하였는데, 2000년 작 <인종차별의 역사>는 그의 그 오랜 사유를 정리하며 자국의 동시대인과 후손들에게 호소하는 책이다. 그렇다, 프랑스 철학자가 쓴 이 역사책은 철저히 프랑스(굳이 확대하면 프랑스어권) 독자를 대상으로 한정한다. 특히 13장과 14장은 현재 프랑스 사회의 과제로서 성격이 강하다. 첫 번째 이유는 인종차별의 역사와 인종차별이 행해진 사회가 너무 광범위해 취사선택이 불가피하였고, 두 번째 이유는 자국 프랑스가 이 주제에 대해 결코 자유롭지 않음을 강조하며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결정적 계기는 쇼아(‘인류의 마지막 대재앙’이란 뜻의 히브리어 표현으로 기독교적 의미를 담은 ‘홀로코스트’에 저항하는 대체어)이다. 쇼아는 나치독일을 기폭제로 서구에 뿌리박힌 반유대주의의 광증이 폭발했던 유럽 모두의 범죄였다. 1만 5천명이 넘는 외국계 유대인을 한 체육관에 몰아넣고 굶겨 죽인 밸디브 사건 같은 경우도 프랑스인들이 자발적으로 행하고 침묵한 일이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프랑스 방송인 로르 아를러는 쇼아를 ‘시효로 소멸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라고 정의하며 미래의 개념을 우울하게, 진보와 조화로운 세상을 해치는 용서할 수 없는 악이라 단언하였다. 인종차별도 마찬가지다. 인종차별이란 이름으로 인류 역사 내내 수많은 범죄와 전쟁과 학살이 일어났다.

 

우리가 인종차별(주의), 인종주의로 번역하고 있는 'Racisme(racism)'은 특정사회집단에 대한 적의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단어이다. 즉, 단순 유색인종 차별 뿐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나누고 특정 인간과 집단을 차별하고 증오하는 모든 행위가 '인종차별'이다. 이러한 타자 증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류는 역사 내내 차별받는 인간들에게 태생적인 결함을 찾고 믿었다.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는 <인종차별의 역사>를 통해 그 실체 없는 신화와 신앙을 산산조각 낸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인종'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인종차별'은 무지(대개 악의와 동반하는)의 소산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모든 인간은 유전적·생물학적으로 너무 많이 동일해 객관적으로 분류할 만큼의 차이가 너무나 부족하고, 결국 인종차별은 선택가능한 정치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인종차별이 완전히 사라지기 위해선 인종차별의 역사를 돌아보며 무지와 싸워야 한다고, 그래서 중립적이지 않은 인종차별은 그 역사 역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가장 먼저 부수는 관념은 '인종차별은 항상 존재해왔다(인종차별은 불가피하고 불멸의 개념이라는 믿음)'는 신화이다. 처음으로 인종차별의 조짐이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인(로마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고대 말 그리스-로마 문명부터이며 반유대주의가 형성되는 헬레니즘 문명 때를 본격적인 기원으로 봐야 한다. <인종차별의 역사>는 세 장에 걸쳐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 이방인에 대한 태도(1장)가 히브리인을 차별하는 반유대주의의 태동(2장)과 여자와 노예의 하등인간 취급(3장)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기술하며 인종차별의 원형을 밝히고 있다.

 

불행하게도 당대 소피스트들의 인종차별적 담론들에 반박하였으나 '그리스 남자'의 패러다임 안에서 자신의 완벽한 논리를 완성할 수밖에 없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철학의 근간이 되는 바람에 그 후 서양에서 이루어진 모든 인종차별 역시 그의 사상에서 근거하게 되었다. 중세를 다룬 두 장은 기독교가 서양문명의 헤게모니를 쥐면서 더욱 발전시킨 반유대주의(4장)와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나병에 대한 그릇된 공포와 무지가 만든 남프랑스의 '카고 차별'의 사례(5장)을 다룬다. 근세의 인종차별의 범인 역시 기독교다. 두 장에 걸쳐 자본주의와 십자가의 이름으로 찬란히 빛났던 대항해 시대의 비극, 아메리칸 인디언의 파멸(6장)과 아프리카 흑인의 노예화(7장)을 다룬다.

 

합리주의와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근대는 인류지성의 폭발적 성장만큼 인종차별 역시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여 발전시킨다. 인종차별에 과학이 동원되는 것도 이때부터이다. 그 과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이비이고 신화에 불과했는지 두 장(8장, 9장)에 걸쳐 서술된다. 저자는 18세기에 과학적 방식이라는 이름으로 인종차별적 담화들의 편입이 시도되었고 19세기에 그 학설들의 통합이 이루어진 결과가 20세기를 '대학살의 시대'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아르메니아 학살(10장)을 시작으로 양 세계대전 동안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인종차별 의식과 이론(11장), 유대인과 집시 학살(12장)이 일어난다. 그에 대한 반성은 채 오래지 않아 망각과 조작으로 변질되고(13장) 다문화시대의 외국인 차별(14장)이나 남아공·캄보디아·동티모르·르완다 등 세계전역에서 일어나는 그칠 줄 모르는 인종차별 관련 참극을 고발(15장)하며 마친다.

 

주체만 다를 뿐 인종차별의 양태는 동서양 모두에서 있어왔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가 프랑스의 오늘을 걱정하며 쓴 이 책이, 굳이 확대해서 본다 해도 서구 문명 속에서의 인종차별에 한정된 이 책이 동양의 우리도 읽을 의미가 있다. 인종차별의 무지가 무서운 것은 그것이 순수한 무지가 아니라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타자를 증오하고픈 욕망이 압도해 저지르는 다분히 의도적인 무지라는 것이며, 더욱 끔찍한 것은 전혀 근거 없고 비상식적임에도 상당한 역사문화적 전통이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인종차별의 무실체성에 허무함을 깨닫는 동시에 이런 역사와 사실을 안다고 인종차별이 과연 사라질 수 있을까 무기력함에 빠진다. 저자는 해결책으로 정치의 책임을 든다. 어떤 시도를 하든 쉽지 않겠지만, 이 불의와 싸우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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