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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 만화, 가능성을 사유하다
닉 수재니스 지음, 배충효 옮김, 송요한 감수 / 책세상 / 2016년 9월
평점 :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사유를 부수고 전진시키는 비범한 만화
‘내 생각의 형태는 어떨까. 색은? 방식은? 변한 것이 있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이 있는지. 누군가에겐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엉뚱한 의문일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곤 하였다. 충격적이고 버거웠던 신간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를 읽어내며, 그 생각을 더욱 총체적이고 집요하게 다시 했고,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찰하며 깨달은 자신의 현황에 적잖이 놀랐다. 필자의 사유세계는 처음 숫자 중심적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숫자와 함수로 변환해 기억하였다. 예를 들어 어떤 지식을 어떤 책 몇 쪽의 좌표 몇으로 위치를 기억한다. 악보를 그래프처럼 읽어낸다. 숫자의 개념을 모른 아기 때부터 손가락, 발가락을 꼽으며 그렇게 생각을 하였는데,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참 자란 후에 알았다. 그 후 이미지적 사유와 언어적 사유가 더해졌다.
2015년 출간된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는 2016 린드 워드 그래픽노블상, 프로즈상를 수상하고 미국 도서관협회와 각종 언론에서 주목받았다. 책세상에서 발 빠르게 판권을 사 올 9월 번역 출간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기 전에 이 책이 ‘하버드 대학이 출간한 최초의 만화 철학책’, ‘컬럼비아 대학의 논문 심사를 통과한 최초의 만화 철학논문’이란 사실을 알았다. 이 타이틀만으로도 덮어놓고 찾아봐야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지성의 실험, 그 개척과 진보의 여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짜릿한 일이니. 이 책을 서둘러, 반드시, 직접 읽고 싶어 안달이 났던 이유가 또 있다. 출판사 홍보자료를 봐도 책이 잘 파악이 안 되어서 외국 서평을 읽고, 공개 컷들을 찾아봤는데도 어떤 책일지 가늠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닉 수재너스는 현재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인문학부 조교수라고 한다. 그런데 남다른 책만큼 이력이 남다른 저자다. 수학을 전공한, 교육학자이자 만화가이자 예술비평가라니(수학,미술 학사,석사/교육학 박사). 하버드 수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 중에 돌연 논픽션 만화가로 진로를 틀은 래리 고닉 같은 전례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이 책이 저자의 교육학 박사학위 논문이면서 훌륭한 철학책이고, 그 자신은 만화에 가장 집중한다니. 이 책의 교육학적 주제는 ‘가르침과 배움에 있어 시각적 사고의 중요성에 대한 논쟁’이다. 그러나 언플래트닝(Unflattening)이라는 새로운 (철학) 개념의 주창으로서, 새로운 논문 형식의 주창으로서, 탁월한 작품성의 그래픽노블로서 등등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를 톺을 관점은 한없이 많다.
언플래트닝이라는 개념은 빅토리아 시대에 나온 수학소설이자 환상소설이고 SF소설인 에드윈 애벗의 <플랫 랜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모든 것이 납작한 평면의 2차원 세상 플랫 랜드를 다룬 이 소설에서 화자인 정사각형은 플랫 랜드를 벗어나 더 저차원인 라인 랜드와 더 고차원에서 온 구를 겪는다. 정사각형은 구 스승을 통해 3차원 이상의 차원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지만 4차원을 겪어보지 않은 구는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사각형은 4차원 이상의 세상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으며 자신의 플랫 랜드로 다시 돌아와 다양한 차원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데 여생을 투신한다. 그러나 플랫 랜드 주민 역시 겪어보지 않은 차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저자는 여기서 칼비노, 마르쿠제 등 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더하며 개념의 살을 붙여나가고 마침내 완성한다.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가 결국 강조하는 다양한 관점의 사고이다. 평평하고 단순한 사고에서 벗어난 ‘언플래트닝’한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유용한 수단은 시각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총 8개의 장(단조로움/다양한 관점의 중요성/5차원/생각의 형태/생동하는 인간 실체/판에 박힌 길/벡터의 세계/자각)과 2개의 막간극장(플랫랜드/묶인 줄)을 통해, 저자는 자신이 가능하고 보여줄 수 있는 ‘그래픽노블’로 독자들의 시각적 사고를 자극한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지식인을 동경하고 평생 지평의 확장을 위해 애쓰듯 저자가 제안하는 시각적 사고, 다양한 사고가 결코 쉽지 않음을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책을 읽고 있는 자세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게 읽으면서 이 책을 텍스트 논문으로 변환해 읽고 있었으며 이런 태도는 본문 뒤 마련된 작가노트, 참고문헌, 감사의 말, 초기 스케치들까지 다 읽고 있음을 깨달았다(이걸 읽으면 안그래도 남다른 그림이 얼마나 한컷한컷 지독하게 치밀한 구성이었음에 더욱 놀란다).
인간은 겪지 않은 것을 상상하기 힘들기에 고정된 시각을 철저히 전복하려면 노력만으론 불가능하다는 저자의 메시지를 읽으며, 문득 잊고 싶은 고통스러운 과거 하나가 생각났다. 20대 후반 반년 동안 투병했던 원인불명의 난독증. 그게 사고체계를 전복시켰다. 보다 언어적으로 정교하고 언어에 예민해진 대신, 나도 모르게 숫자에서 출발해 이미지로 한없이 유연해진 사고를 다시 언어적으로 축소시키는 후유증이 생긴 것이다. 200쪽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이 만화를 보며 머릿속에서 텍스트 논문을 구성하며 책의 그림과 텍스트를 분리해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렇게 읽어 장점도 있었다. 감탄스러운 그림에 가려져 모를 뻔 했는데, 이 책의 텍스트 양이 상당하며 충분히 학위논문의 구성과 내용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각하고 흥미롭게 이 책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필자의 이력과 관심사 때문인지도 모른다. 숫자에서 이미지로, 다시 언어로, 그리고 혼종으로 다양한 사고체계의 전복과 혼합을 겪었다. 평생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면서 난독증에 걸려봤다. 천성을 믿고 30대에 수학과 컴퓨터언어를 도전하며 문이예 섭렵을 향하는 생고생 중이다. <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는 일반 출간 후 ‘교육학’ ‘논문’으로서가 아니라 ‘철학’ ‘그래픽노블’로서 존재가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책 속에서, 독자들에게, 다면적으로 사고할 것을 목 놓아 외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을 특정한 프레임으로만 일독하고 그치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가 부디 저자의 바람처럼 많은 독자들이 자신의 사고체계를 돌아보고 자신의 생각의 형태에 대해 진단해볼 수 있게 하는 자극제였으면 좋겠다. 그 파격과 부정, 전복과 모색의 시간이 행복한 진보의 여정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