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철의 세계건축기행
김석철 지음 / 창비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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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안쪽에 1998년이라 적혀있는 걸 보고서 대학교 졸업하던 해 교양수업 때 이 책을 읽고 감상문을 써낸 기억이 났다. 그때만 해도 책을 많이 안 읽어서 책을 사는 일이 계기나 목적을 필요로 했었지. 보통 그런 '필요'에 의해 내게로 온 책들은 먼지가 소복히 쌓이게 마련인데, 이 책은 그런 점에선 예외이다. 건축이란 결국 인간을 위한 공간이므로 건축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려는 이 책의 따뜻한 의도를 간파한다면 더욱더 그러하다.

*일본인들은 우리와 다르다(p.101)*

기억을 더듬어 보건데 감상문을 써낼 당시엔 일본의 '이세 신궁'에 대해 중점적으로 썼던 것 같다. 사업상 일본 출장이 잦으셨던 아빠가 사오신 기념 엽서 속의 일본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을까. 본문 중의 '일본인들은 우리와 다르다'라는 문구가  유난히 마음에 와 닿았었다. 그리고 얼마전 여행에서 만난 일본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아, 정말 다르구나'를 또 한번 느꼈다. 물론 중국인들도 우리와 다르고 서양 제국들의 사람들도 우리와 다르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다름'이 더욱더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떤 감정적 이질감 때문일 수도 있고, 매우 비슷할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조금만 속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 일본과의 특수한 괴리감 때문일 수도 있다. 일본 건축에는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 대한 느낌이 건축에도 고스란히 베어 있다. 가꿔지고 다듬어진 미, 숨막힐 듯한 정교함 같은 것 말이다.

*베네치아의 싼 마르꼬 광장(p.187)*

그리고 최근 여행 때문에 다시 들추게 된 이 책에서 베네치아에 대한 상세한 역사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가보기 전에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물 위의 도시'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도 역시 믿을 수 없는 베네치아. 그 중에서도 싼 마르꼬 '광장'에 대한 다음의 인용구는 최근 시청 앞에 조성된 '광장'의 의미를 냉정하게 되새기게 해 준다.

-광장의 형태와 내용은 한 사람의 천재가 아닌 역사와 시간의 산물이다(p.189).

'광장 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 유럽의 문화를 직접 보고 나서,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절실히 필요한 한국의 현실을 안타까워 했었는데, 여행 후 시청 앞 광장이 완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기뻐했었다. 그렇지만 역사와 시간이 부재한, 한 사람의 천재에 의해 급조된 광장은 그 곳이 '광장이 아니었던' 시절에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어준 일체감보다는 '불편함'과 혼란스러움을 안겨주었다는 일견을 듣고 약간의 씁슬함이 느껴졌다.

속성으로 건축을 하는 인간들과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픽픽 쓰러지는 건축물들, 그 직접적인 피해가 부메랑처럼 스스로에게 돌아오는데도 반성하지 못하는 우리들. 길게는 수천년에서 짧게는 몇백년을 거뜬히 버텨내는 이 책 속의 건축물들은 바로 그런 우리에게 역사와 시간의 힘, 생명과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 건축의 힘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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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들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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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불운이란 없으며 오직 백인이 있을 뿐이라고." (p.183)

이 책에서 백인의 잔혹함을 논하는 것은 또다른 인종차별주의를 낳는 것에 다름아니란 생각으로, 그 잔혹함에 대해 얘기하려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토니 모리슨도 어쩐지 그 잔혹함을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저 멀리에 그렇지만 매우 짙게 그  거대한 괴물의 그림자를 깔고 있는 듯 하다.

말하고 싶은 것은 백인대 흑인이 아니라 인간대 인간의 문제이다. 왜 한쪽에는 억압하는 인간군이 있으며 왜 다른 한쪽에는 핍박받는 인간군이 존재하는걸까? 정말 서글픈 일이다. 하물며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에게서도 동정심을 혹은 불쌍함을 느끼는 법인데 어찌 똑같이 먹고,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를 단지 피부색 하나로 부정하게 되었는가.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요소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보다는 '하등'하다고 단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차별'이라는 꼬리말이 붙은 단어들이 실은 다 그런 오해를 업고 태어난게 아닌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건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이건 분명 계몽의 세기, 과학의 세기라 불리던 18-19세기에, 아니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오는 현실이다. 인간이 도구가 되고, 무엇의 대상이 되는 전쟁의 상황. 분명 신은 우리 하나하나를 위하여 피를 흘렸다고 했는데 이러한 차별이 현실이라면, 그 대상은 '모두'가 아니라 '선택받은 누군가'일 뿐이다.

그 삶, 그 생명력이 대체 무엇이길래 발이 형채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도, 또 지독한 외로움을 견뎌야 할 때도 살아남게 하는 걸까. 내가 시이드였다면 내가 폴디였다면 난 도저히 '삶'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 지긋지긋한 것을 어서 빨리 끝내버리고 싶었을 거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허용되지 않는 삶에서 사랑과 추억이 대관절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다.

물론 번역이라는 거름종이를 통하긴 했지만 토니 모리슨의 문체와 묘사는 이렇게 절규하게 할 만큼 폭력적이고 한맺혀 있다. 외로움으로 똘똘 뭉친 덴버만해도 그렇다. 사실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내게 직접 외롭다고 말한들 그 느낌이 이렇게 사실적으로 느껴지진 않을테니 말이다.

어느 날 신문에 실린 신현림 시인의 짧은 글에서 토니 모리슨의 어느 책에서 인용했다는 몇구절을 보고 그게 혹시 "빌러비드"가 아닐까 하고 사게 된 것이 내가 이 책과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이다. 토니 모리슨이 주로 자신의 민족에 대한 얘기를 다룬다는 건 알았지만, 그 구절이 사랑에 대한 아포리즘이었고 이 책이 나에겐 그녀의 처녀작이어서 이렇게 큰 충격을 안겨줄 거라고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페스트"를 읽었을 때처럼 가끔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읽고 상상하는 게 더 끔찍하고 생생할 때가 있다. 더럽게 아프고 적나라한 고통의 느낌. 그 고통이 내 몫이 아니라 너무나도 다행스런 느낌. 내겐 그런 고통의 느낌이 아직 없다는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책. 그게 이 책이 내 머리를 감싸쥐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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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초 편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야생초 편지 2
황대권 지음 / 도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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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여쁘고 가슴 아린 책이다. 우선 어여쁘단 느낌은 선명한 총천연색의 야생초들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고, 두번째로 가슴 아리단 느낌은 이런 어여쁜 책이 옥중서한이라는 아이러니에서 비롯된다. 그런 느낌이 드는 건 그 삭막한 시멘트 네모 상자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각박하게 만들지 않으려 애쓰며 쓰여졌을 편지의 탄생에 대한 조금은 지나친 마음씀 때문일까.

할머니가 돌아가시 일년 전 초여름에 마지막으로 할머니와 함께 갔던 바닷가. 그 갯벌 위편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고모댁. 고모댁 주변을 돌아 제법 높게 자라있던 명아주. 약간 정신을 놓으셨던 할머니는 성치 않은 걸음걸이로 명아주 뜯기에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보이셨다. 옛날엔 이걸로 나물 무쳐 먹으셨다면서...  어린 시절 더러운 개천가에 무성하게 피어있던 명아주를 본 기억과, 명아주는 개천가 같이 더러운 곳에서 잘 자란다는 잘못 심어진 지식 때문에 참 싫었더랬는데 할머닌 왜 저리 먹지도 못할 것을 그것도 이파리만 또옥똑 따시는 걸까. 할머니의 추억을 무시한 무정한 손녀딸 때문에 할머닌 결국 명아주 무침을 드시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런 아쉬움 때문인지 이 책을 슬쩍 훑어보다 명아주 삽화를 발견하곤 그 페이지부터 읽어내려갔다. 이 책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겨버렸던 것들에 대한 작은 비밀들이 들어있다. 저자와 같은 경험으로 또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나도, 명아주가 노인들에게 튼튼한 발이 되어줄 만큼 크게 자라 지팡이로 쓰인다는 사실을 이 책을 보고서야 알았다. 할머니가 그렇게 맥없이 돌아가시기 전 이 책을 읽었더라면 고모댁에 심겨져 있던 명아주 한뿌리를 캐어 잘 키운 후 할머니께 지팡이를 만들어드릴 수도 있었을텐데...

그런 아쉬움과 추억의 버물림과 더불어, 봄이면 앞다투어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흔한 야생초가 달라보인다는 것이, 그래서 정원 손질 때 어김없이 퇴출당하는 잡초가 더욱더 생명력 있게 보인다는 것이 이 책의 힘인듯 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것이 조금 되어서 인지, 얼마전 참 미안하기도 하고 바보같기도 한 짓을 저질렀다. 그만 한데 오글오글 모여있는 민들레가 너무 예뻐서 잔인하게도 꽃대만 싹독싹독 잘라 컵에 이파리 몇개와 소북히 꽂아 놓았더랬다. 고추모 심고 화단에 물주고 저녁무렵 집안에 들어오니 땅의 정기를 받을 땐 고렇게 탐스럽고 예쁘던 노오란 꽃들이 모두 오그라들고 갈변해서 차마 볼 수가 없게 된것이다.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며칠을 더 두고 보며 감탄할 수 있었을텐데, 이거야 말로 정말 이기심의 극치랄 수밖에...  민들레란 녀석들이 땅에 고약한 뿌리를 박고 있을 땐 그리 약한 존재인지 몰랐는데, 꽃대를 자를 때 줄기가 약했던 걸 보며 의아했을 때 그만두었어야 했다. 그래서 집 앞 진입로에 만발할 마가렛도 피기만 해봐라, 한 단 굵게 모아 꽃병에 꽂아주마고 벼르고 있었는데 절대로그러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다. 그리고 내일은 책을 들고 나가 비인칭으로 불렸던 야생초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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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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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회가 시작되기 직전, 무대에 오른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저마다 악기를 들고 조율을 하거나 음을 맞춰본다. 그 중에서 내 눈길을 끄는 것은 육중한 몸매의 콘트라베이스. 언제나 맨 뒤켠에서 오케스트라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악기이다. 그렇지만 스폿라이트는 항상 무대 중심을 비추고 자그마한 악기들이 바쁜 손놀림으로 연주회 내내 음색을 뽐낼 때에도, 콘트라베이스는 드문드문 '둥둥' 소리를 내지만 그마저도 배경 속으로 사라져 우리들의 귓가엔 있으나마나한 것으로 치부된다.

콘트라베이스 혹은 그 주자는 마치 연극무대에서 '지나가는 여인1'의 배역과도 같다. 주연도 조연도 아니지만 그가 없다면 연극의 맛이 살지 않는 것처럼, 있을 때는 그 존재감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그것이 빠져버리면 '연주음이 흩어져 버린다'. 콘트라베이스의 소리는 대규모 오케스트라보다는 소규모 재즈밴드에서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콘트라베이스를 퉁길 때 나는 '둥둥거림'은 낮은 주파수 때문인지 귀로 듣는다기 보다는 가슴의 울림을 통해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모랄까... 이 책은 자신의 가치를 잘 알아주지 못하는데서 오는 히스테릭한 변명들로 이루어진 독백같다. 고백하건데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왠 흰소리인가, 머리속에도 잘 들어오지 않고 해서 초반부 즈음에서 책을 덮어버렸더랬다. 그리고 아주 많이 시간이 흐른 뒤 연주회에 갔다가, 높은 음색의 악기들이 서로 잘 조화하도록 아랫부분을 채워주는 콘트라베이스 소리를 귀여겨 듣고 다시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마음 편히 콘트라베이스 주자의 넋두리를 들을 수 있었다.

쥐스킨트는 사회 내에서 소외받고 적응하지 못하며, 우리의 이해와 관심의 시선에서 빗겨간 사람들을 즐겨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는듯 하다. 그의 손가락과 콧날만큼이나 섬세한 필치로 소외된 자들의 괴짜같은 표면 뒤에 숨겨진 아픔과 진실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한 권의 책이 이렇게 내 경험과 맞물려 마음 속으로 폭 내려 앉는 느낌이야말로 독서의 즐거움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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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행복의 비밀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강주헌 옮김 / 큰나무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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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발자크의 방대한 소설 백과사전 <인간희극> 중 두 개의 단편을 골라 엮은 것이다. <사랑과 행복의 비밀>은 '풍속 연구' 중 '사생활의 정경'에 속해 있으며, 원제가 <가정의 평화La Paix du Menage>로 1830년에 쓴 소설이다.  <아듀Adieux>는 '철학 연구'에 속하며 원제 그대로 1832년에 쓴 것이다. 사랑의 행복과 그 보다 더 진한 슬픔을 교차시킨 이 책의 구성은 삶이란 기쁨과 슬픔이 혼재하는 것이란 진리를 전달하려는 기획 의도가 엿보인다.

<사랑과 행복의 비밀>은 전쟁으로 인한 군인들의 양산, 그에 따른 사랑과 가정 생활의 불안정함을 상류사회의 무도회장을 배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결혼한 부부라도 정부를 갖고 있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당시 사회상을 꼬집듯 발자크는 이 사회의 대모격인 랑삭 부인의 입을 빌어 "가정의 평화를 깨는 짓은 절대 하지 말아라"라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번쩍이는 보석과 평생을 보장해 줄 연금이 표상하는 "덧없는 열정보다 진정한 애정이 백 배, 아니 천배의 사랑을 안겨주는 법이다"라고 조언한다. 이 소설의 결말은 남성에게 '조강지처의 사랑과 믿음이 주는 가정의 행복'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  

평생 여성을 사랑하고, 여성과 결혼, 가정생활을 주제로 책을 쓴 발자크는 여성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비밀에 대해 이 책에서 은밀히 얘기해 주고 있다. 하지만 발자크 역시 오랫동안 한 여자의 정부였던 것을 생각할 때 이 소설의 교훈은 아이러닉한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두번 째 소설 <아듀>는 전편의 소설과는 대조적으로 비극적 결말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삶을 되찾게 해주기 위해 남자는 상처를 상처로 치료하는 방법을 택했으나 삶을 되찾은 여인은 행복의 충격 때문인지,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생을 마감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식의 결말이 이미 구시대적인 것이 되어버린 요즘,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우리는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극적 구조를 지닌 이 두 개의 소설은 우리 삶이 점점 망각하는 것들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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